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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Cine] 생활의 발견
두 번의 동침과 한 번의 고백
 
공희준 Cinema Jockey   기사입력  2002/03/24 [18:14]
자문자답을 해보련다. "孔Cine님! 최근에 접했던 가장 인상적인 카피 두 개만 말씀해주실 수 있으세요?"

물음에 대답하자면 두 가지 문구가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호각지세를 이루고 있다. (1) 만지나 안 만지나 3만원 (2) 번지점프 중에 하다

(1)은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점심 먹고 사무실로 들어오다가 이면도로에 주차된 어느 자동차의 백밀러에 누군가 끼워 넣은 것을 발견한, 이름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새로 개업한 단란주점을 광고하던, 조악한 지질(紙質)과 조잡한 도안으로 만들어진 찌라시 선전문구다.

(2)는 작년 이맘때 비교적 흥행에 호조를 보였던 이병현-이은주 주연의 「번지점프를 하다」란 영화를 패러디한 B급 16mm 에로영화 제목이다.

(1)과 (2)의 문안을 착안했던 인물들이 어디서 뭘 하며 먹고사는지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고 알고자 하는 마음도 없다. 다만 이른바 주류(Main Stream)의 시각에서는 그들 모두 나처럼 지극히 지리멸렬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지리멸렬한 B급 인생들, 쌈마이 인간들의 생활을 발견하기 위해 홍상수가 카메라를 들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에 기대어, 수정이란 이름을 다섯 번이나 애절하게 외치던 그가, 드디어 이제야 별로 잘 나지 못한 인간들의 영양가 없는 생활을 발견하면서 삶의 진정성에 조금씩 눈떠가고 있는 듯하다.

「생활의 발견」에 관한 리뷰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지리멸렬"이라는 코드가 공통적으로 포착된다. "동아새국어사전"에서 지리멸렬(支離滅裂)이란 단어를 검색하자 "갈가리 흩어지고 찢기어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됨"이란 의미로 풀이된다.

{IMAGE1_LEFT}「생활의 발견」은 영화계 연착륙에 실패한 연극배우 경수가 춘천과 경주에서 각각 만난 두 여자와 나누는 섹스와 연애담에 관한 이야기가 얼개를 이룬다. 이게 영화 스토리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십 년 전 개봉한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이 떠올랐다. 「경마장...」과 「생활의 발견」을 나누는 변별점은 주인공이 상대하는 여자가 하나가 아니라 둘 이라는 점, 남자 주인공이 「경마장...」의 R처럼 박학다식하거나 달변이 아니라는 점 외에는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존심 강하기로는 남부럽지 않다는 홍상수가 장선우에 대한 오마주로 이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닐 터이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고리는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러다 정신을 발딱 세우는-그렇다! 발딱 서는 것은 거시기 만이 아니다-화두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위에서 언급한 지리멸렬이라는 한 단어였다.

「경마장 가는 길」이 지식인의 지리멸렬함을 다룬다면 「생활의 발견」은 105평에 살지 못하는 평범한 이들의 지리멸렬을 그린다.

경수(김상경)가 춘천으로 내려온 것은 순전히 영화의 캐스팅에서 잘린 울적함을 벗어나기 위함이다. 이건 지리멸렬이다. 선배 성우와 함께 색시집에서 작부 둘을 데리고 질펀한 술판에서 벌인 옷벗기 게임도 지리멸렬하다. 후배인 경수에게 좋아하는 여자 명숙(예지원)을 뺏기는 성우도 지리멸렬하긴 마찬가지다. 경수에게 나비처럼 접근해서 벌처럼 섹스를 나누고,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명숙의 유혹도 결국에는 일거에 거부할 수 있는 집착으로 지리멸렬한다.

{IMAGE2_RIGHT}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선영(추상미)을 향한 경수의 집착에는 특별한 목적의식이 없다. 경수가 끈적끈적한 육체적 열락을 좇는 맹목적 욕망에 사로잡혀 선영에게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몸을 섞은 침대 위에서 경수가 중얼거리는 "이제 섹스는 그만하고 같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뇌까림에서는 「오 수정」에서 정상에 깃발을 꽂고 환호하는 정보석의 성취감은 보이지 않는다. 선영과의 만남을 통해 경수가 몸의 즐거움보다는 정신적 쾌락을 중시하는 플라토닉 러버로 변신한 것 같지도 않다. 일상 속에서 인간들이 내리는 결정의 성격은 주체적 선택보다는 상황에 떼밀려 통밥을 굴리는 쪽에 가깝다. 선영에게 쏟아지는 경수의 돌연하고 열렬한 구애는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또래의 유부녀를 향한 미혼 남성의 환상적 사고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기실 일정한 나이를 통과한 후에는 비슷한 연배의 여자를 만날 경우, 처녀보다는 유부녀에게 야릇한 매력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생활의 발견」을 통해 무언가의 철학적 함의를 이끌어내려 궁싯거릴 필요는 없다. 물을 끼고 있는 유원지에는 지천으로 널리다시피 흔해빠진, 페달로 움직이는 백조배 옆에 여자를 태우고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에 대해 장황하게 해석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른바 평단의 사람들과 저널에 몸담고 있는 인물들이 즐겨 하듯이 이름도 생소한 불어권 감독들이나 철학자들의 이름을 억지로 끌어대는 리뷰를 위한 리뷰를 펼칠 필요도 없겠다.

「생활의 발견」은 문자 그대로 현장의 호흡을 살려 만들어진 영화다. 감독의 자랑처럼 영화 속에서 배우들은 정말로 취해 있다. 예지원의 눈은 진짜로 부어 있고 삼겹살에 소주를 붓는 추상미의 혀도 실지로 꼬부라져 있다. 명숙이 무용시범을 보이는 테이크에서 가장 많은 폭소와 웃음이 터진다. 정말로 예지원은 춤을 춘다. 연기로 추는 춤이 아니라 자기도 흥에 겨워 추는 춤 같다. 영화 속에서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지리멸렬하다. 빈틈없고 촘촘한 대사로 짜여진 시나리오에 간혹 즉흥적인 애드립이 섞인 장르영화와는 달리 대화의 흐름은 종종 끊어지며 맥락을 잃고 헛도는 경우가 잦다. 이거야말로 우리 생활의 사실적 모습이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나누는 대화를 반추해 보라. 거의 대부분의 얘기가 영화속 주인공들의 대화처럼 핵심을 못 찌르고 불능하거나, 아니면 상대방의 의사는 아랑곳없이 저 혼자 생각에 지레 결론을 조루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영화에는 배경 음악이 없다. 특별한 사운드 효과도 없다. 마이크에 잡히는 소리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진정한 자연의 소리다. 경수와 선영이 소주를 마시는 대폿집 옆자리에서 된장찌개를 정신없이 퍼먹고, 경수가 괜한 오해를 사 시비가 붙는 곱창집 미장센이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 삶의 현장이다. 카메라라는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 잡힌 이웃의 모습에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직접 육안으로 목격하고 살을 비벼대면 인상을 찌푸리는 인간의 약음과 약함을 다시 한번 드러내는 것이 이 영화에서 길어 올린 발견의 개가이다. 우리 자신의 사는 모습은 약간의 거리를 놓고 보면 상당히 우습고 정겹다.

영화의 배경으로 나오는 공간들은 꿀꿀하기만 하다. 호반의 도시 춘천과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는 도시를 수식하는 그럴싸한 캐치프레이즈와는 달리 지리멸렬한 공간으로 등장한다. 일상 생활 속에서 춘천과 경주는 아무 차이가 없다. 두 곳 모두 싸구려 술집이 있고, 아무런 특색 없는 백조배가 있으며, 좁고 누추한 골목길이 있다.

사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매 번의 연애마다 이번 경우는 좀더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느낌, 이런 떨림, 이런 감정은 처음이라고 상상한다. 그건 순 착각이다. 경수가 각각 체험한 명숙과 선영과의 연애는 따로 또 같은 연애다. 주체와 대상이 다를 뿐 두 번의 연애 모두를 관류하며 규정하는 감정의 실체는 집착이다. 심지어 두 여자가 경수에게 건네준 메모내용도 똑같다. 그건 경수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되지 못해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선배로부터 들은 얘기를 경수 역시 명숙에게 그대로 들려주니까.

「생활의 발견」이  「경마장 가는 길」처럼 미래에 대한 아무런 비전 없음과 전망 없음의 결말을 짓는 것은 아니다. 진보와 수구를 가르는 뚜렷한 이념적 단층은 모두 사라졌다며 모든 것을 설익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마구잡이로 용해시켰던 1992년보다는 2002년의 한국사회에 더 희망이 있어 보인다.

지금은 10년 전처럼 소수 정치보스간의 밀실야합으로 권력을 창출할 수 없다. 거대 언론권력이 음습한 거래와 왜곡된 정보로써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92년과는 달리 2002년에는 인터넷으로 연결된 수백만의 네티즌들의 명랑하고 발랄하며 자발적인 단결과 연대가, 보다 민주적이고 공개적이며 투명한 방식으로,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을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방향으로 추동하고 있다.

지리멸렬 속에도 나름대로의 질서와 미학과 규범이 있다. 경수와 명숙과 선영의 삶은 비록 지리멸렬하기는 해도 10년 전 경마장으로 가는 길을 걷던 R처럼 위악적이거나, J처럼 위선적이지 않다. 그것은 장선우에 대한 홍상수의 상대적 진보성이 아니라, 지난 10년간 한국사회가 성취해된 변화와 발전의 성과를 표상한다.

정작 무질서하고 금도를 넘어선 지리멸렬의 극치는 반듯한 나라, 법과 원칙을 세우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인물들이 모인 어느 정당에서 발견되어진다. 그리고 참된 (정치적)인간은 되기 힘들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라는 충고를 경청해야 할 사람들은, 근거 없는 대세론을 부르짖다 여론의 역풍을 맞아 핀치에 몰리자 씨알도 안 먹히는 음모론을 들먹이며, 92년으로부터 2002년까지 한국사회가 달려온 변화의 거리를 기를 쓰고 거꾸로 달리려는 나무 목(木)자 성씨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얄팍한 정치적 번지점프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음을 발견하기를 당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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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3/24 [18:1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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