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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공원으로 전락시킨 겨레의 성지 원래대로 회복해야
해방 이후에도 계속된 훼손의 역사 이제는 바로잡아야
 
육철희   기사입력  2010/09/08 [14:24]
2010년 올해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탄함으로써 우리나라가 국권을 잃은 치욕의 역사를 당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

이른바 국치 100주년 관련 행사가 넘쳐날 정도로 많이 열려 올바른 역사의 정립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 보다 높았다.

여러 가지 뜻 깊은 행사도 있었지만, 바른 역사정립과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노력은 별로 눈에 띄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외침속에서도 광화문 광장에는 친일반역자 김기창의 그림을 기본으로 만들어진 세종대왕 동상이 만들어져 서있고, 친일반민족자가 만든 동상이나 기념물, 영정들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으며, 친일반민족자가 만든 노래가 여전히 불리워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쉼터로 이용하고 있는 장충단공원, 사직공원, 남산공원, 효창공원에도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우리나라는 원래 공원의 역사가 없었다.

통일신라와 고구려시대에는 두터운 불교신앙으로 큰 절이 주로 도시 변두리의 산 기슭에 위치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대자연의 품에 안길 수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자연주의 사상에 의해 자연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사실상 산업혁명 이전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도시의 규모가 대단히 작았으며, 작은 도시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그 둘레가 모두 대자연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공원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제는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기 위해 원구단을 없앴고, 궁궐과 도성을 훼손하고,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민족의 성지를 조직적으로 훼손하여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장충단, 사직단, 남산 국사당, 효창원이었다.

 장충단의 역사적 훼손


남산의 동쪽 기슭에 을미사변을 중심으로 한 순국충절들의 제사를 위해서 광무 4년(1900)에  장충단을 조성하였다.

이곳에 모셔진 순국영현들은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가 일본 불량배들에게 시해를 당하자 이를 저지코자 나섰다가 죽임을 당한 당시 궁내대신 이경식, 부령 홍계훈, 진남영령관 염도회, 무남영령관 이경호, 통영대관 김홍제, 장위대관 이학승, 진난영대관 이종구 등과 함께 전사한 병졸들이었고, 광무5년에 임오군란․갑신정변 때 희생된 반일․배일(排日)의 인물들도 배향토록 하여,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 왔다. 고종 황제가 이 단을 장충이라고  명명하자 순종이 장충단이라 쓰고 민영환(閔泳煥)이 비문을 지어 세웠다. 아직 남아있는 비의 정면에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奬忠壇'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민영환이 지은 143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총면적이 54만 5925m²인 이 곳 일대를 1919년 6월부터 일제의 경성부가 관리하며 장충단공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 곳에 벚꽃 수천그루를 심었으며, 광장, 연못, 어린이놀이터, 산책로, 공중변소, 교량 등을 시설하였으며, 상해사변 때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3용사의 동상도 세웠다.

이어서 1929년부터 장충단공원 동편에 이등박문의 보리사인 박문사를 세우기 시작하여 공원의 동부 소나무 우거진 지역 41,882평의 땅을 나누어 총경비 27만 5천원을 들여 1931년 완공하였다. 이 박문사의 본전과 서원은 원래 경복궁내 선원전 및 부속건물을 옮겨 건축한 것이며, 입구의 문은 당시에 이미 경성중학교 자리가 되어 있던 경희궁 흥화문을 옮겨 세운 것이었다.

지금은 사명당 동상, 파리장서기념비, 이준열사 동상, 이한응 열사 동상, 외솔최현배기념탑 등이 세워져있지만 순국충절들에게 제례를 드리던 성역으로서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장충단 비만 외롭게 서있을 뿐 그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만 남아있다.

 사직단의 역사적 훼손

사직단은 태조3년(1394)에 고려의 예를 따라 백성의 복을 위해 제사하는 국토의 신을 제사하는 국사단을 동쪽에, 곡식의 신을 제사하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고 신좌를 북쪽에 모셔 만들어 1년에 세 번 제사를 지낸 곳이다.

백성은 땅과 곡식이 없으면 살 수 없으므로 사직은 풍흉과 국가의 운명을 관장한다고 믿어 나라를 창건한 자는 제일 먼저 왕가의 선조를 받드는 종묘와 더불어 사직단을 지어서 백성을 위하여 사직에게 복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 성역이었던 이 일대는 일제가 1921년 사직단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한다는 구실 아래 훼손하기 시작했는데 부지를 분할하여 학교를 신설하고 우회도로를 개설하였다. 사직단의 수난은 8 15광복 후에도 계속되어 1897년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태사’ ‘태직’이라고 높여 부르게 했던 사직단의 정문(보물 177, 건평 57.4 m2)이 1962년의 도로확장공사 때 본래의 위치에서 14 m 가량 뒤쪽으로 밀려나 문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기는 했지만 공원 내에는 종로도서관 시립아동병원을 비롯하여 몇몇 공공건물이 들어서 있고, 그 밖에 활터인 황학정과 단군성전 등이 있으며, 이이 신사임당의 동상 등이 있을 뿐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례를 드리는 신성한 성역으로 보존하거나 관리하지 않고 역시 주민들의 휴식터로서의 역할만 하고 있을 뿐이다.

 효창원의 역사적 훼손 

효창공원은 원래 이름이 효창원이다. 조선 22대 정조의 맏아들로 다섯살 어린 나이에 죽은 문효세자와 생모 의빈 성씨, 순조의 후궁인 숙의박씨 및 영온공주의 무덤이 있었던 곳이다.

효창원이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서울로 진주, 효창원 남쪽 용마루재(만리창) 일대에 주둔하면서 부터 일본인들은 숲을 훼손하여 골프장을 조성하는가 하면, 철도관사와 철도 직원들의 숙소를 지었으며, 도원동과 도화동 일대에 유곽촌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1924년 일제 경성부는 조선 왕세자의 무덤(신성한 공간)인 효창원을 공원으로 바꿔 유락지로 전락시켰으며,규모도 대폭 축소시켰고, 1944년에는 아예 무덤까지 서오능으로 강제 이장하여 효창원은 흔적조차 사라질 운명에 처했었다. 

1945년 11월 중국에서 환국한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은 일본에서 순국(사형)하시거나 옥사하신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골 봉환을 추진하였다. 1946년 6월 16일 이 세 분의 유골을 일본에서 모셔와 태고사에 안치하였다가 7월 6일 국민장으로 안장하였는데 그 곳이 바로 문효세자가 묻혀 있던 자리다. 삼의사묘 우측 비석이 없는 빈무덤은 추후 안중근 의사 유골을 모시기 위해 마련해 놓은 자리이다. 

삼의사묘역 동남 쪽에는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을 비롯한 차이석 조성환 등 임시정부국무위원묘가 자리하게 되고, 서쪽에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의 묘가 자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독립선열 묘역이 된 것이다. 

 이렇게 다시 독립선열의 묘역으로 바뀐 효창원을 자유당정권에서는 노골적인 훼손을 하기 시작했다. 독립선열의 묘를 시외로 이장하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자 연못을 메우고 숲을 깎아 축구장을 만들었다.

60년대 이후에도 효창원 훼손은 계속됐다.반공위령탑을 비롯해서 어린이놀이터와 테니스장 등 체육․위락시설을 만들고 노인회관 등 건물을 세움으로써 묘역의 경건한 분위기를 해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행락객들이 공원 안에서 춤판․화투판을 벌이고, 밤이면 데이트족들이 묘역 안까지 들어가도 당국은 인력부족을 이유로 방관해 왔으며, 지금은 곳곳에 운동기구를 설치하여 독립선열 묘역 주변을 어지럽히고 있다. 

 남산의 역사적 훼손

 남산의 본래 이름은 인경산이었으나 조선조 태조(이성계)가 1394년 풍수지리에 의해 도읍지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겨 온 뒤에 남쪽에 있는 산이므로 "남산"으로 지칭 되었고 풍수지리상 안산으로 중요한 산이었다.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산신령을 모시는 신당을 북악산과 남산에 세웠으며 남산에 세운 신당에는 목멱대왕이란 산신을 모시고 있어 목멱신사라고 불렀고, 또한 나라에서 세운 신당이므로 국사당이라고도 했으며, 이때부터 인경산은 목멱산으로 불렸는데, 지금의 남산 정상 팔각광장에 국사당이 있었다.

일제는 1925년 국사당을 헐고, 조선신궁이라는 일본신사를 세워 놓고 우리민족에게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했다. 이때 헐린 국사당 건물은 현재 인왕산 서쪽 자락 선바위 아래에 옮겨져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과거 임진왜란때 일본군의 주둔지였으므로 주민들은 남산을 '왜장터'라 불렀고 일본인들은 남산을 자신들의 성역처럼 여겨 1897년 그 일대 3,000여평을 빌려 '왜성대공원'이라 이름짓고 도로개설과 함께 벚꽃 600그루를 심었으며 이듬해인 지금의 숭의학원 자리에 '대선궁'이라는 신사를 세웠다.

이어 회현동 일대 30만평을 무상임대해 1908년 한양공원 (현재 석재표석이 3호터널입구 위에 있음)으로 정하고, 이후에도 전안기부 자리에 통감부를, 현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헌병대 사령부를 설치하는가 하면 조선신궁, 동본원사등을 잇따라 지어 잠식을 계속하여 마침내 1940년 3월 12일 남산일대 10만5천평을 총독부고시 제118호로 남산을 '남산도로공원'으로 지정, 이때부터 '남산공원'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이처럼  일제는 민족정신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남산을 훼손, 우리 민족의 정신적 혼을 없애려 했다.

이렇게 민족의 성지 곳곳이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것에 대해 우리 민족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공분하겠지만 현재의 모습이라고 해서 별로 나아진 것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들을 할 것인가?

일제에 의해 민족의 성지가 일개 공원으로 전락한 것도 모자라 해방 이후에도 원래의 이름과 위상을 회복하지 못한 채 다시 독재정권의 탄압이나 무관심으로 훼손당하고 있는 겨레의 성지를 이제부터라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작업을 하거나 의미있는 장소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 첫번째로 우선 장충단공원은 장충단터로 사직공원을 사직단으로 효창공원을 효창원 또는 효창동 독립운동선열묘역으로 남산팔각정공원도 남산국사당터로 이름을 회복시켜 부르는 일부터 시작하여 주변도 원래대로 성역으로서의 위상에 걸맞게 정비해야 할 것이다.

해당 관청에서는 국민의 의견을 폭넓게 수용하여 적극 반영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일에 뜻있는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힘을 모아 원래대로 회복시켜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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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9/08 [14:2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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