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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기독교의 과제, 보수의 숙주에서 벗어나라
[종교시평] 진보적 기독인이여, 약간만 용기를 내면 세상이 아름다워져
 
류상태   기사입력  2010/06/10 [14:43]
기독교 ‘진보들’이 용기를 내기로 했다. 6월 19일(토) 오후 2시에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토론회를 갖고 성명서도 내기로 했다. “이천 년 기독교를 새롭게 다시 디자인한다!”는 제목으로 내로라하는 학자와 목사들이 모여 ‘새로운 대안 기독교를 모색하는 대토론회’를 개최한단다. 토론회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인터넷으로 들어가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의 안내를 받으시면 되겠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 일을 기점으로 기독교 진보의 새로운 활동이 시작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글 내용의 대부분은 약간 수정하기는 했지만 주로 과거에 여기저기 올렸던 것들이다. 물론 새 글도 섞여 있다. 아마도 이 원고는 당일 자료집에 포함되어 배포될 것이지만, 자신을 기독교 진보라고 생각하는 분들과 이 내용을 앞서 나누고 싶다.

1. 가문의 영광

가훈이 ‘가문의 영광’인 어느 명문가가 있었다. 이 가문에 속한 사람들은 대대로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제 몸 희생하기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때로는 기꺼이 불쌍한 이웃을 돕는데 헌신했지만, 자기 가문의 영광에 방해가 되는 이웃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약탈과 살인, 파괴를 감행하였다.

세월이 흘러 노골적인 약탈과 살인은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이 명문가에, 자식 열 명을 둔 집안이 있었다. 아홉은 가문의 옛 영광을 그리워하며, 어떻게 하면 과거의 영화를 재현할 것인지 고심하였고, 가문에 대한 긍지로 가득 차 이웃들의 삶의 방식은 여전히 무시하였다. 그러나 막내는 자기 가문의 진정한 정신이 ‘이웃에 대한 봉사와 사랑’이라고 믿고 있었다.

막내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독재를 일삼는 정치인에게 저항하고, 경제정의실현을 위해 행동하며,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의 편에 서서 싸웠다. 지구마을을 깨끗이 보존하기 위해 환경운동에도 힘썼다. 여성인권해방을 위한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막내는 사회의 안녕을 무시하고 오직 ‘가문의 영광’을 외쳐대는 형들의 안하무인식 행태가 심히 부끄럽기는 했지만, 그동안 가문이 사회에 저질러왔던 무리수에 대해 비판하거나 형들에게 더 이상 마을 사람들과 갈등을 유발하지 말라고 당차게 요구하지는 못했다. 가해자 집안에 태어난 막내의 입장에서 피해자가 느끼는 절절한 아픔을 느끼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무엇보다 막내는 자기가 하는 ‘의미있는’ 일들을 기필코 실현하기 위해 형들에게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명문가의 눈에 벗어난 죄로 피해를 당한 이웃들은 매우 많다. 그들은 단지 명문가의 숭고한(?) 이념에 따르지 않았다는 죄로 거리에서 돌에 맞아 비명횡사한 부모를 둔 사람도 있었고, 그들이 하는 일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전 재산을 빼앗긴 사람도 있었다.

다시는 이런 만행이 마을에서 재현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그들의 죄악상을 고발하려는 마을 주민들에게 막내의 존재와 활동은 매우 난감한 일이 되었다. 막내 때문에 가문이 저지른 죄악이 감춰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들이 막내가 하는 일에 돈을 대주는데도 이유가 있었다. 어쨌든 어려운 이웃을 돌보아주는 것(가문에 대들지 않는다는 전제조건 하에서)은 가문의 자랑스러운 전통 중 하나였다. 게다가 막내가 하는 일은 가문이 저지른 부끄러운 일을 충분히 가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진보, 이대로 좋은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혹 내가 비유로 설명한 기독교 진보의 문제점에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 또는 지나친 비유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조찬선의 <기독교 죄악사>와 미국 인디언 멸망사를 다룬 디 브라운의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를 읽어주시기 바란다.)

2. 진보기독교의 문제 - 연대책임의식이 없다 

기독교 진보는 기독교가 역사상 저질렀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반사회적, 문화파괴적 죄악으로부터 자유로운가? 1960~70년대 독재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섰던 개신교의 개혁 세력들은 왜 이런 교회내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가?

기독교 교리에 세뇌되어 이웃종교를 부정하고 심지어 불상이나 단군상을 파괴하는 무지몽매한 기독교인들의 ‘진정성’은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옳은 것이요 절대가치라고 배웠기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그들에게 내가 물을 수 있는 죄목은 ‘무지의 죄’ 밖에 없다.

그러나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하는 깨어있는 진보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 재정비리, 목회자 세습 문제 등, 산재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독재자의 폭정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고, 같은 개신교 내에서 벌어지는 독재와 폭정은 용서할 수 있는 것인가? 평화와 통일 문제는 양식있는 종교인으로서 외면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 사회의 안녕과 평화를 위협하는 교회의 무례한 행태와 재정비리는 눈감아도 되는 문제인가? 환경문제, 인권문제는 우리 사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지만, 개신교가 저지르는 문화적 폭력과 사회갈등은 참을만한 것인가?

교회내 개혁에는 별 관심이 없거나 둔감하고, 사회개혁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개신교 진보인들을 보면, 마치 과거 일본제국의 죄악상에 대해 연대책임을 느끼지 못한 채 평화와 환경을 논하는 일본의 진보지식층을 보는 것 같다.

그들은 세계평화와 깨끗한 환경에 관심이 많다. 인류화합을 외친다. 그러나 과거 일본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는 별로 마음아파 하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은 제국주의자들의 그런 만행을 혐오하며 그 일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어쩌다 그런 문제가 논의되면 그건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기는 한다. 그러나 자신들 역시 일본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그 문제에 연계되어 있고, 적극적으로 과거 역사를 청산하여 그 끔찍한 만행이 역사에 되풀이되지 않도록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연대책임의식을 갖고 있는 정치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일부 (아니 대다수?) 일본 진보지식인들의 이런 의식은 과거 일본제국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국가나 국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보수우익의 논리를 대변하는 사람들 못지않게 무책임하고 비겁해 보일 뿐 아니라, 사태를 해결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 평화와 환경을 위해 일하는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수록 과거 일본이 저지른 죄악상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보수우익은 그렇게 해서 개선된 일본의 이미지를 등에 업고 과거에로의 화려한(?) 복귀를 노린다. 그런 점에서, 과거 일본의 만행에 연대책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일본의 진보지식인들이 ‘보수의 방패, 혹은 숙주’ 역할을 한다고 보면 지나친 비약일까?

3. 기독교 진보는 보수의 숙주인가? 

과거 독재에 격렬히 항거했던, 또한 일본의 역사적 만행에 분개하는 진보기독교인들에게 묻고 싶다. 과거 일본제국의 만행에 분개하는 그만큼, 또한 아직도 사죄할 줄 모르는 오늘의 일본에 분개하는 그만큼, 1960년대 우리가 미국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 베트남인들에게 가했던 무모하고 악랄한 침탈 행위에 대해 가슴아파하며, 진실로 베트남국가와 국민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가? 

일본의 만행은 결코 잊을 수 없지만, 우리가 베트남에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중 잣대를 갖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인류 사회에 저지른 무서운 폭력과 죄악에 대하여 깊은 책임의식을 느끼며 진정으로 이웃종교와 우리사회에 사죄하는 마음이 없이 평화와 통일, 환경을 논하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이 아닐까?

진보기독교인들은 수구기독교인들이 갖는 교리적 독선, 그들이 일으키는 사회갈등현상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혀를 차는 것만으로 책임을 다하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평화와 통일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대형교회와 보수교단의 자금을 지원받아도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금을 지원받으면서 지원 주체가 저지르는 죄악상에 대해 통렬히 비판을 가하기는 어렵다. 만일 진보기독교인들이 자기공동체에 대한 성찰 내지는 교회내 개혁에 둔감한 이유가 대형교회와 보수교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기 때문이라면, 개신교 진보는 이미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개신교 진보 단체가 하는 일은 매우 다양하고 폭이 넓으며 그만큼 사회의 존경을 받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평화와 통일, 인류사회의 보편적 행복, 인권의 함양, 환경개선을 위해 일하는 개신교 진보단체들의 선행이, 우리 사회에 독을 내뿜는 한국 주류개신교의 독선과 배타, 사회갈등, 문화적 폭력행위 등에 거름을 주거나, 그들의 방패 내지는 숙주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지 깊이 돌아보아야 한다.

개신교 진보단체는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주류 개신교회가 저지르는 반사회적 행태에 대한 연대책임의식을 느끼고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일부터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4. 약간만 용기를 내면 세상이 아름다워진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떠벌렸다. 하지만 위의 말을 하는 건, “나는 옳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비겁한 선택이 어린 이웃들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처절하게 깨달았기에 동지들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얼마 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기독교재단 사학의 선교의 자유도 존중되어야 하지만, 개인의 종교 자유를 침해한 건 위법이라며 강군의 손을 들어주었다. 강군 사건이 발생한 지 6년, 소송을 제기한 지 5년 만에 이루어진 최종 판결이다. 자신이 품을 수 없는 큰 아이를 제자로 둔 것이 죄이던가? 나는 그 아이,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지난 6년 동안 웃고 울었다.

나에게 강의석은 한 명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수많은 강의석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들을 모두 설득하는데 성공(?)했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종교 강요가 아니라 서구 문화, 이제는 세계 문화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문화를 배운다는 마음으로 참여해 달라”는 간곡한 설득을 외면하는 아이는 없었다. 그들의 고통스런 참음의 대가로 나는 비교적 안정된 직장에서 그런대로 괜찮은 수입을 올리며 살아왔다.

하지만 설득되지 않는 유일한 아이가 있었다. 그가 강의석이었고, 나는 결국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라. 그에서 지나는 것으로 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성서 속 주님의 말씀에 끌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 사건이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 지금도 안정된 직장에서 기득권을 누리며 살고 있을 것이다. 가끔은 스스로를 탓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때로 예전의 안정된 삶의 자리가 그리워질 때도 있다. 어쩌면 “옛날 그만한 자리로 회복시켜 줄테니 앞으로는 적당히 입을 다물고 지내라”고 하면 또 다시 고민에 싸일 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금도 여전히 비겁하다. 그런 주제에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아파하는 동지들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으니 어찌 보면 참 파렴치한 짓이다.

그렇다고 너나 나나 다 한계가 있으니 서로 입을 다물어야 할까? 언제까지, 도대체 언제까지, 제 목구멍을 위해, 현실의 벽 때문에, 가려서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합리화하는 우리들 못난(?) 진보들에 의해 진실이 가려지고, 소위 보수정통 기독교의 독선과 배타에 의해 우리 사회가 휘둘리는 현실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표현이 과격해서 죄송하다. 일반적으로 개인은 약하다. 개인은 유혹을 이기기 어렵고 타협하기 쉽다. 하지만 연대된 약자들이 무소불위의 권력과 체제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약간만 비겁하면 인생이 행복해진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약간만 용기를 내면 세상이 아름다워진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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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6/10 [14:4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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