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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에서 17세기 사대부를 만나다
산행 후 수락산 서계 박세당 유적지 보며 정제된 삶의 철학 배워
 
김철관   기사입력  2010/04/14 [19:17]
▲ 석림사     ©
우연히 떠난 산행에서 우리 선조들의 유적지를 조망하게 됐다. 하산 길에 수락산 석림사, 고강서원 그리고 실학자 서계 박세당 선생과 그의 2자 정재 박태보 선생의 자취와 삶의 철학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됐다.
 
경기도 의정부 장암동 수락산 입구에 있으면 산행을 하고 내려온 등산객들이 붐빈다. 석림사 쪽으로 하산한 등산객들이다. 석림사는 1671년인 조선 현종 12년 석현과 그의 제자 치흠이 창건해 창건 당시는 석림암으로 불렀다. 숙종때 문신 박태보가 <금오신화>의 주역 김시습의 명복을 빌기 위해 중창했고, 1950년 6.25로 불에 탄 석림사는 1960년대부터 보각 스님이 중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1일(일요일) 오후 수락산 길목 석림사 입구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만개했다. 조금 지나자 많은 식당이 즐비해 있었다. 황기백숙, 옻닭, 메기매운탕, 개고기 등의 냄새에 군침이 절로 나기도 한 곳이다. 산행으로 저린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십중팔구는 냄새에 동화돼 식당을 찾는다. 푸짐한 안주에 술을 한잔 걸치면 세상 부러울 게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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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으로 흠뻑 젖은 산행을 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이곳 식당을 지나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에도 있다. 살을 빼거나 건강을 위해 산행을 한 사람 중 극히 일부는 허기를 참고 견디면서 이곳을 지나치기도 한다. 이날 만큼 나도 이 부류에 속한다고나 할까.
 
석림사를 조금 지나자 식당 주변에 옛 기와집처럼 지어진 고택이 나왔다. 절 입구를 연상케 하는 정문 현판에는 노강서원(鷺江書院)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곳을 잠시 들렀다.  할아버지가 안내를 했다. 조선 숙종 때 문신인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 서계 박세당 선생의 둘째 아들)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었다. 정재는 이조좌랑, 호남 암행어사, 파주목사 등을 역임했고,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한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가는 도중 노량진에서 순절했던 인물이다.
 
사후 숙종이 영의정에 임명했던 것을 보니 올곧고 강직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MBC 월화 역사드라마 ‘동이’에서 숙종과 인현왕후가 나온다. 그 시대쯤으로 보인다. 노강서원은 숙종 21년(1695)에 세웠고 숙종 23년(1697)에 국가에서 인정하는 사액서원으로 노강이라는 편액을 받았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였다.

▲ 서계 유적지 안내도     ©

어쨌든 지난 11일 오후 후배와 함께 3시간에 걸친 수락산 산행을 했기 때문에 허기졌다. 이곳으로 내려오니, 식당에서 물씬 풍기는 고소한 냄새가 유혹을 했다. 산 중턱에서 마신 막걸리로 끝내자고 굳게 마음을 먹은 터였다. 그래서이지 참고 견뎠다. 볼록 나온 뱃살을 빼야 하기 때문에  먹고 싶어도 꾹 참았다. 물론 식당 냄새에 유혹을 뿌리치고 내려온 등산객들도 엿보였다.
 
순간 부부처럼 보인 등산객들이 뭔가 손짓을 하면서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을 보니 고택과 고목나무가 보였다. ‘노강서원’처럼 궁금해 그곳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옆 푯말에 ‘서계문화재단’이라는 글귀가 보였다. 표지판을 보니 조선시대 실학자 서계 박세당 선생의 고택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서너 마리의 개들이 뛰어오면서 둘러싸고 멍멍거렸다. 하지만 은행나무 고목(古木)과 고택(古宅)이 있는 쪽에서 70대로 보이는 한 할아버지가 개들을 쫒으면서 친절히 안내를 했다.

▲ 서계 종택     ©

그는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선생에 대한 삶의 궤적을 자세히 설명해 줬다. 실학자로서 그의 치적과 농사서적 <색경>, 사문난적으로 몰린 <사변록> 등의 저서에 대해서도 일러줬다. 그는 이곳에서 주변 십리까지 세당의 부친 박정에게 임금이 내린 사패지로, 석천동(현재 의정부 장암동) 대부분의 땅이 반남 박씨 가문의 토지였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후손들이 땅을 팔아서인지 점차 땅이 축소가 돼 왔다고 전했다.
 
▲ 서계 종택 앞 400여년이 지난 은행나무     ©
서계가 살던 본가는 공터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식당 쪽에서 목격한 고택은 서계의 사랑채인 종택(宗宅)이었다. 반남 박씨인 박세당 선생의 종택으로 당시의 건물은 아니었고, 5세손 박종길 선생이 1800연대 초 중건했다고. 종택 뒷쪽에는 수락산이, 앞쪽에는 도봉산의 웅장한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 이곳은 서계 선생이 학문을 연마하면서 쉬었던 궤산정(簣山亭), 자연과 교감하면서 휴식의 무대였던 취승대(聚勝臺), 종택 앞마당 400여년 된 은행나무(수고 27미터, 둘레 5.26미터), 서계 부친인 하석 박정 영정, 서계와 두 자녀인 태유, 태보 선생의 묘가 자리를 하고 있다.
 
 관람을 하고 나니 17세기 사대부의 생활과 문화를 느끼게 했다. 특히 서계 선생의 올곧음과 기개에 감탄하면서 비치된 방명록에 서명을 하고 나왔다. 서계 선생의 학문과 사상, 철학을 지금 시대정신으로 승화시켜 보다 건강하고 풍요로운 세상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머릿속을 스쳤다.
 
바로 2004년 문을 연 ‘서계문화재단(의정부시 장암동 197번지)’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날 오후 서계 선생과 그의 자 정재 선생을 기리면서, 지하철을 타고 의정부 장암에서 노원으로 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꾹 참았던 곡차를 결국 마시고 말았다. 식당 장어 맛은 일품이었고 장어를 안주 삼아 마신 술(복분자) 또한 마음을 평온하게 했다.
 
▲ 서계 본가터     ©
참고로 서계 박세당(朴世堂, 1629∼1703) 선생은 조선후기 문신으로 실학자이다.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博物學)의 학풍을 이룩했으며, <색경>이라는 농사서적을 저술하기도 했다. 유교경전 중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서경에 대한 주해서를 집필한 <사변록>을 저술해 주자 사상(우암 송시열 등)과 대립했고, 결국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낙인찍혀 유배를 가가도 했다. 저서로는 <사변록(思辨錄)>, <색경(穡經)>, <서계집(西溪集)> 등이 있다.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서계(西溪)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좌참찬 동선(東善)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 정(炡)이다. 관찰사 윤안국(尹安國)의 딸인 양주 윤씨(楊州 尹氏)와 결혼했다.

1660년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제수돼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병조정랑·지평·홍문관교리·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함경북도병마평사 등의 내외 관직을 역임했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일시 다녀왔지만 당쟁을 혐오하며 관직을 그만두고 양주 석천동(지금 의정부 장암)으로 물러났다. 한때 통진 현감으로 나가 백성들의 구휼에 힘쓰기도 했으나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두 아들을 잃자 일체의 출사 권유를 물리치고 석천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몰두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사서(四書)는 물론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장자(莊子)의 연구를 통해 주자학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했다. 또한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훼손된 공맹(孔孟)의 본뜻을 밝힌다는 입장에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했다. 이러한 학문 태도로 인해 그는 주자학에 경도된 당시의 지배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비난을 받았다.
 
1702년에는 백현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에 송시열(宋時烈)을 낮추었다고 해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탄받기도 했다. 송시열에 대한 비판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의 학문은 당시 통치이념이었던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의 학문 태도에서도 비껴 서있었다. 결국 백현신도비명과 <사변록> 필화로 유배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는 당시의 학자들이 꺼려했던 도가사상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노장서(老莊書)에 심취하는 자유로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서계의 학문은 당대 빛을 보지 못했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지성과 실천에 바탕을 한 애민사상은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채 소중한 정신 문화유산으로 면면히 전해오고 있다.
 
▲ 서계 영전을 모신 사당     ©
또 서계의 둘째 아들인 정재 박태보(1654~1689) 선생은 1675년(숙종 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생원으로 1677년 알성문과에 장원해 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이 됐다. 이 때 사관으로 출제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남인의 탄핵을 받아 선천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이후 풀러나 1680년 교리가 됐다. 이 때 문묘 송출에 관한 문제와 이조판서 이단하를 질책한 상소로 또 파직됐다. 이후 환수돼 이천현감, 이조좌랑, 호남 암행어사 등을 역임했다. 파주목사로 부임 시절 조정에서 성혼과 이이 위패를 문묘에서 빼었는데 그가 부임한 파주에서는 조정정책에 따르지 않고 이를 존속시켰다해 면직됐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인현왕후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는 소를 올리는데 주동적 구실을 했다고 해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도중 옥독으로 노량진에서 순절했다.
 
타고난 성품으로 지기가 고상하고 견식이 투철해 여러 차례 상소를 통해 시비를 가리기도 했다. 조리가 정연해 조금이라도 비리를 보면 과감히 의리를 위해 죽음도 서슴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가 죽은 후 숙종은 곧 후회 하면서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려가 세워졌다. 영의정에 추종되고 풍계사에 배향됐다. 숙종 23년 조윤벽 등의 간청으로 노강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저서로 <시문집> 20권 7책이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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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4/14 [19:1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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