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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만해 한용운의 삶의 철학을 다시 배운다
김광식 박사의 <우리가 만난 한용운>...만해의 민족독립 사상 엿보여
 
김철관
▲ 표지     © 참글세상
살아생전 만해 한용운 대선사의 삶의 철학과 행적을 기록한 책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 책은 민족운동가, 시인, 스님으로 잘 알려진 만해 용운 선사와 만난 스님, 문인, 친적, 까가웠던 지인 등의 대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우리 근대 역사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인 김광식 동국대 연구교수가 쓴 <우리가 만난 한용운>(참글세상, 2010년 3월)은 한용운과 인연이 있던 지인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책머리에 실린 만해의 실제 사진이 눈길을 끈다. 여기에는 3.1운동 민족대표로 감옥에 수감된 모습, 글과 함께 게재된 신문 사진, 환갑 사진, 초상화 등이 시대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됐다.

이 책 ‘인연으로 만난 한용운’ 편에서는 근대불교 개혁, 민족운동, 한국 전통 불교고수, 자존심의 몸부림을 위한 일제하의 고난의 가시밭길을 함께 걸었던 만공 스님 이야기도 나온다.

당시 만해는 일제 식민지 통제를 전면 부정하면서 민족불교를 개천한 반면, 만공은 식민지 현실을 일부 인정하면서 선불교 전통의 고수를 통한 민족불교를 개척한 스님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 기록된 만해와 만공의 거침없는 대화, 법거량, 차별성 속의 동질성은 두 사람의 고매함, 담박스런 패기 등이 엿보였다.

또 만해 한용운과 석전 박한영의 이야기 나온다. 일제 마수에 민족이 신음하던 공간에서 태어나 두 사람은 승려 신분으로 동고동락한 사이었다. 이들은 일제시대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였으며, 민족독립과 불교개혁을 위해 혼혈을 쏟았다. 한용운과 박한영의 첫 만남은 1910년 8월 29일 조선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며칠 후였다.

경술국치를 당한 그날 만해는 금강산 표훈사에 있었다. 당시 만해는 격분을 이기지 못하고 저녁 공양자리에서 발우를 던져버렸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스님들에게 “이 산중 중놈들아, 나라를 빼앗겼는데 밥 숫가락이 주둥이로 들어간단 말이냐?”하고 절을 떠나 석왕사로 가 박한영을 만났다. 하지만 석전 박한영의 인품, 푸근함을 통해 그 격정의 감정을 추스릴 수 있었다. 국망은 두 사람의 만남으로 이어졌고, 나라의 독립을 위한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사제이자 동지인 만해스님과 경봉 스님의 이야기는 눈여겨볼 만하다. 인연의 출발은 1913년 5월 19일 35세인 한용운이 통도사 강사로 부임했다. 김경봉은 통도사 강원의 학인으로 22세였다. 이렇게 선생과 제자로 만났다. 스승과 제자는 육친의 부모와 자식 못지않은 사이라고 했던가. 이날 만난 두 사람의 인연은 여타의 인연과 비교할 수 없는 각별한 인연으로 다가왔다.

“세월이 흘러 1930년대 중반 무렵, 만해는 50대 후반 나이의 노년이 됐고, 경봉은 40대 중반의 선객이 됐다. 이들이 다시 만난 곳은 만해의 칩거지인 성북동 심우장이었다.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만해는 이 땅을 떠났다. 그리고 망우리 묘지에 안장됐다. 만해가 이 땅을 떠난 얼마 후 나라는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됐다. 만해가 그토록 갈구한 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졌다. 만해가 입적한 이후 경봉은 민해 묘소 재정비의 주역이 된다. ...경봉의 주도로 1970년 3월 1일 3.1절을 기해 만해의 탑비가 파고다공원에 정식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본문 ‘사제이자 동지인 아름다운 인연’ 중에서-

여기에서 의문은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이 왜 국립묘지에 이장되지 않고 현재 그곳(망우리 묘소)에 있는 것일까라는 사실이다.

당시 대한불교청년회에서는 당연히 만해가 독립운동가이기에 국립묘지에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만해 유족으로 딸인 한영숙은 국립묘지로 이장을 반대했다. 현재 망우리 만해 묘소에는 두 번째 부인인 한영숙의 모친이 합장돼 있기 때문이다. 만해의 유해만 국립묘지로 이장하면 부인의 이장 장소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만해의 생활선과 계승을 구현한 스님은 이춘성이었다. 춘성 스님은 만해의 상좌(시봉)로서 1903년부터 만해가 입적했던 1944년까지 만해를 뒷바라지를 한 승려였다.

만해와 춘성 스님의 인연은 1910년이었다. 만해는 춘성에게 “마침 내가 이것을 마무리할 때 너는 나의 시봉이 됐다. 그러니 너는 내 정신을 이어 장차 이 땅이 산문을 새시대에 맞게 활짝 열어라.” 만해가 1910년 여름 무렵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던 원고를 마무리하면서 이춘성에게 했던 말이다. 또 만해는 이춘성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이것을 네가 잘 간수하되 그냥 두지 말고 밤마다 조금씩 읽어 보와라. 앞으로 새시대의 불법은 이 글 가운데에서 찾도록 하여라. 그렇다고 노스님이나 여러 큰 스님들이 가르치는 바를 업수히 여겨서는 지옥에 떨어진다.”

이후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의 원고 뭉치를 이춘성에게 맡기고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시키려는 친일승려 이회광의 조동종맹약을 분쇄하기 위해 전라도로 떠난다. 만해의 제자 춘성 대선사도 1977년 8월 22일 87세로 입적한다.

특히 만해와 효당의 인연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역사가 되고 있다. 효당이 만해에게 일정한 영향을 받게 된 것은 만해가 1930년대 초반 불교청년운동의 구도를 할 때였다. 효당이 만해를 만난 계기는 1930년 5월 불교계 항일 비밀결사체였던 만당(卍黨)이었다. 만당이전 불교청년운동은 동지연결의 부재, 통일정신박약 등 문제점이 많았다.

바로 이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강력한 결사체가 만당이었다. 이 때 만해가 만당의 영수로 추대됐다. 만당의 이념은 강령인 정교분리, 교정확립, 불교대중화였다. 당시 효당은 불교운동 책임자로 등장했고 불교청년을 보호하면서 만해를 후원하게 됐다. 효당은 그 암울한 일제치하에서 만해와 돈독하고 특별한 인연을 키워갔다. 만해가 8.15해방을 보지 못하고 44년 입적하자 입적직후 효당은 만해가 머물렀던 심우장으로 가 만해의 서가를 정리해 유품을 보관하게 됐다.

올 2010년은 만해 한용운의 대표시집인 <님의 침묵>이 발간된 지 84년의 되는 해이다. 1926년 5월 간행됐던 <님의 침묵>은 회동서관이란 출판사에 발간했다. 당시 그 책을 인수해 만해에게 준 인물이 열여덟 살의 선학원 행자인 강석주였다. 나중 범어사 출신 승려인 석주스님은 총무원장, 포교원장, 원로의원 등을 역임한 큰스님이었다. 석주 스님은 만해 입적이후 해방된 그날부터 만해정신을 조용히 실천한 스님이었다. 그도 만해의 정신을 올곧게 구현하다 2004년 11월 14일 96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3.1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동국대 총장, 문교부장관, 총무원장 등을 지낸 범산 김법린과 만해의 인연도 관심을 촉발한다. 만해와 범산은 어려운 불교 대중화, 민족불교 지향, 불교계 통일 사업 등을 진행했다. 시인 조지훈은 한용운을 여러 차례 만났다. 동탁이 만해와의 첫 만남은 1938년 봄 중앙불교전문학교 불교과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생전 동탁은 만해와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뵈온 것은 정축년(1937년) 여름인가 한다. 그 때 나는 성균관 뒤에 살았기 때문에 고개 하나 넘으면 성북동의 심우장이었다. 어느 날 가엄(家嚴)을 따라 심우장으로 가는 도중에서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됐다. 먹물 드린 고이 적삼에 헬메트를 쓰시고 무슨 보따리를 들고 고개를 넘어 오시던 그 고기(古奇) 청수(淸秀)한 모습은 매우 인상이 깊다." -본문 '지절시인의 표상' 중에서-

만해의 '아난'이라고 불린 김관호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석가모니의 경우 '아난' 이라는 제자가 여사아문을 통해 불경을 결집시킨 것을 비유한 표현이다. 그는 한용운의 지근거리에서 만해의 제반 정황을 지켜보고 증언, 회고, 후일담 등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책은 충청남도 광천에 사는 한용운의 손자 한수만을 최근 만나 구전으로 들은 한용운과 그 가족사에 대한 비사도 밝히고 있다.

친일행적이 있는 지인들과의 일화도 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당시 문학의 재능과 천재성을 지녔고, 한국 근대문학을 빛낸 충원 이광수가 창씨개명을 하고 심우장에 있는 만해를 찾아 인사를 하자 “네 이놈! 보기 싫다.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말라.” 벽력같이 쏟아지는 만해의 호통에 놀라 춘원은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돌아갔다.

근대 한국학에 기여한 육당 최남선도 우연히 길을 가다 만해를 만났다. 육당 왈 “만해 선생 오랜만입니다”라고 하자, 만해는 “당신 누구요”라고 했고, “나 육당 입니다”라고 하자, 만해는 “육당이 누구시오”라고 하면서 걸어가자, 다시 육당이 나서 “육당 최남선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만해는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어서 장사 치루었소”라고 하면서 자리를 떴다. 그날 만해는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지인들에게 비분강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남겼다.

“이제부터 왜인에게 종노릇을 자청해서 조선의 의기로부터 떠나서 죽은 고 최남선의 장례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 <조선일보> 사장 계초 방응모와도 두터운 관계였다. 현재 친일행적으로 도마에 오르고 있는 계초 방응모를 볼 때,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지난 1944년 6월 29일 입적한 만해가 죽음에 이르게 된 요인은 궁핍으로 인한 신경통, 각기증, 영양실조 등이었다. 살아생전 만해는 고구마를 주로 먹었고 곡차로 막걸리를 자주 마셨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만해 문학에서 논란이 적지 않은 것은 <님의 침묵>에 대한 ‘님’의 정체성이다. 민족인지, 조국인지, 사랑인지, 부처님인지, 절대자인지 등 다양한 주장과 해석이 난무하다. 님이 연인을 모델로 했다는 주장에는 청신녀 여연화 보살이라는 설도 있다.

만해는 입산, 출가하기 전 결혼을 했다. 그가 스님이 되기 위해 집을 나설 때 그의 부인이 임신을 했는데 ‘한보국’라고 알려진 아들이다. 이후 한보국은 서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했고 9.28 수복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전 가족을 이끌고 북한으로 피신했다. 그는 북에서 1976년 사망했다. 다섯 명의 딸들에게 유언으로 “통일이 되면 이 아들 대신 너희 조부님(만해)을 찾아 성묘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책은 당시 만해와 만난 사람들이 전한 내용을 고스란히 담았다. 스님에서 지인까지, 만해의 일대기를 쉽게 잘 풀어 적고 있다.

<우리가 만난 한용운>의 저자 김광식의 법명은 만암이고 호는 지허이다. 건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 조계종 불교사연구위원, 부천대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 근대불교사 연구>, <한국 현대불교사 연구>,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 <만해 한용운 평전>, <그리운 스승 한암 스님>, <춘성> 등 근현대불교 관련분야의 저서 20여권이 있다.
기사입력: 2010/04/09 [19:27]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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