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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당신을 살인자로 고발합니다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아이티 지진을 일으킨 또는 방관한 책임을 물으며
 
류상태   기사입력  2010/01/19 [15:59]
제가 일하는 예수동아리교회(http://cafe.daum.net/jsclubch)에서 한 교우님이 아이티 지진과 관련하여 질문을 주셨습니다. 질문의 내용이 그 교우님 뿐 아니라 기독교 신관에 대해 의문을 가진 모든 분들과 공유할만한 것이라 생각되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질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류상태 목사님께 묻겠습니다. 

요며칠 아이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지요?
80프로 이상이 천주교고 16프로정도가 개신교인 국민이랍니다.
너무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진으로 죽었고 약도 물도 식품도 없어 산사람마저 죽어가고 있는 모습이 세계로 생중계되고 있는데요. 
초딩 수준의 질문이라고 비웃으시겠지만,
초딩 때부터 지금까지도 안 풀리는 수수께끼는...
왜 위에선 팔짱끼고 바라만 보고 있느냐는 겁니다.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못 이루실 게 없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무언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렇게 ...이런 일이...생기지 않게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도대체 위에서 하는 일이 뭡니까?
살아있기는 하신 겁니까? 
아니. 이정도로 인간에게 무심한 하나님을 계속 믿고 산다는 게 맞는 일인 것입니까?
신의 존재유무를 다시금 생각합니다.
흔한 말로 시험듭니다.
하나님은 인류전체를 사랑하신다는 그 사실을 신념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기엔 너무나 좌절입니다.
많이 아픕니다. 
명쾌한 답 주시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나름의 생각만이라도 이야기해 주십시오" 

W님의 진솔한 고민, 잘 들었습니다. ‘의심하는 자에 대한 경고’가 성서에는 많이 기록되어 있고, 목사들도 의심하는 신앙에 대해 수없이 비판하며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질 것을 강조해왔기에, 전통적인 신관에 대해 의문을 품을 뿐 아니라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 어렵고 두려운 일일 수도 있는데 용기를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랫동안 배우고 지켜왔던 기독교 신관의 흔들림으로 인하여 받는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며, 제가 이해하는 신관에 대해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명쾌한 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어야 하느냐?”는 명제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은 확고히 있지만, 제 생각이 옳다고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으며, 제가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싶은 것은 “신을 이렇게 믿어야 한다”는 또 하나의 신관보다 “적어도 신을 그렇게 이해하고 믿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라는, 기독교의 전통신관에 대한 재해석입니다. 
 
▲ 아이티 강진 현장 (사진=월드비전 제공)     © CBS노컷뉴스

1. 기독교의 하느님은 ‘전능자’이며 ‘사랑의 하느님’인가? 

기독교의 전통신관은 매우 중요한 두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의 기둥은 그 분의 능력에 대한 것으로, 하느님은 전지전능(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하시기에, 우주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셨고,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섭리(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전통신관의 또 하나의 기둥은 그 분의 성품에 대한 것으로,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전제이며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그 분의 속성인 사랑의 발로이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이 사랑이라는 신의 근본속성과 충돌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제의 의하면, 우리 눈에는 악하게 또는 모순되게 보이는 모든 일도 결국은 신의 깊은 의도에서 나타나는 사랑의 발로이며, 전능자의 선한 의지와 섭리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기에 전적으로 옳고 선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 분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 분의 뜻을 의심하거나 감히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불신앙이며 신성을 모독하는 발칙한 짓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가진 현대인이 전통신관을 그대로 긍정하기에는 너무나 아프고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이번 아이티 지진도 그렇고, 몇 해 전에 동남아시아를 집어삼킨 쓰나미, 미국 뉴올리언즈를 강타한 허리케인도 신의 섭리에 의한 것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수십 만에 달하는 생명이 너무나 아깝고 허무하고 슬픕니다. 

그런데 더욱 슬픈 것은, ‘신의 전능성과 그 분의 선한 섭리’를 의심해서는 안된다고 확신하는, 또는 신도들로 하여금 그렇게 확신하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몇몇 목회자들에 의해 그 희생자들이 ‘신의 뜻을 거스린 악한 사람’으로 쉽게 매도된다는 점입니다. 

실례로, 수만 신도가 모인다는 G교회의 K목사는, 2004년 발생한 쓰나미 사건에 대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 대한 심판”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는 몇 달 후 발생한 미국의 허리케인 희생자들도 “그 지방에 동성애자가 많았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 것”이라고 설교했습니다. (저도 그의 설교동영상을 보았습니다. 그의 설교도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저에게 아픔을 넘어 거의 절망감을 심어준 것은 그의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수많은 교인들의 합창소리였습니다.) 

만약 그의 설교가 옳다면, 우리의 하느님은 이방인을 심판하기 위해 철없는 어린아이들까지 가리지 않고 살육한 셈이며, 미국 뉴올리언즈에 사는 동성애자를 심판하기 위해 동성애 ‘동’자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무고한 시민을 모두 죽인 셈이 됩니다. 그 수십만의 희생자들 중에 독실한 기독교인이 단 1%만 있었다고 가정해도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기독교인이 수천명은 될텐데 그들에게도 하나님은 (성경에는 재난을 미리 경고해주는 내용이 많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재난이 곧 닥칠 터이니 피하라”는 경고조차 주시지 않고 모두 죽이고 말았습니다. (재난에 대한 경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주인공은 신이 아니라 지각변동과 기류의 변화를 읽은 과학자들이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폭력적인 신에 대한 의심에 쌓여있으면서도 교회를 떠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의심이 발전하여 신앙을 잃게 될 경우 가야 할 곳은 꺼지지 않는 불이 기다리는 지옥뿐이며, 어떻게 해서든 그곳에는 가지 말아야한다는 ‘무서운 설교’가 지금도 교회에서 계속 선포되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의문을 안고 목사님을 찾아가 그 괴로움을 토해내지만 대개의 경우는 ‘시험에 빠진 자’로 낙인이 찍혀 엄중 경고를 받게 됩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2000년 동안 계속 믿어온 신관에 감히 도전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두렵고 어려운 일이 되며, 많은 신앙인들이 의문과 불만을 묻어둔 채 결국 자신의 이성과 판단력을 교회에 갖다 바치고 더욱 교리에 세뇌되어 ‘안전한 신앙생활’, 아니 ‘안전한 보험’으로 도피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2. 기독교의 전통신관은 2000년 전 원시신앙인들의 어린 인식의 반영일 뿐이다 

기독교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에서는 (발흥지는 근동지방이었지만) 르네상스 이후 이런 의심과 두려움에 적극적으로 맞서 합리적인 답을 시도해왔습니다. 그 결과 전통적인 신관이 객관적이고 실재적인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천 년 전 원시신앙인(여기서 말하는 ‘원시’의 의미는 ‘미개한’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앞선’이라는 뜻입니다)들의 어린 인식의 반영이었다는 점을 발견하였습니다. 

오늘날 지구마을의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원시신관을 그대로 정통교리로 수호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전통신관에 의한 교리기독교를 떠받드는 신앙인도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지금은 유럽에서 교리기독교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리기독교’란 기독교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원시 교리를 절대진리로 떠받드는 근본주의적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며, 기독교의 교리 전체를 부정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닙니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에서는 여전히 교리기독교가 기승을 부리며 마치 교리기독교가 기독교의 전부인양 인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리기독교는 이미 사멸되고 있는 기독교의 잔재일 뿐 역사의 선택은 이미 배타와 독선에서 벗어나 지구마을의 이웃종교, 이웃문화와 상생발전하는 새로운 기독교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 (자료사진)     © CBS노컷뉴스

이러한 새로운 기독교운동이 바로 적극적인 사회참여로 세상의 존경을 받고 있는 해방신학, 민중신학 등의 실천신학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이웃종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상생의 길을 찾는 다원주의운동으로도 발전하고 있으나, 미국과 한국의 근본주의 교회들은 여전히 이같은 운동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3. 이제는 “하느님은 누구인가?(Who is God?)”라고만 묻지 말고, “하느님은 무엇인가?(What is God?)”라고도 묻자. 

어느 신학자는, 우리가 이제는 "'하느님은 누구인가?(Who is God?)'라고만 묻지 말고, '하느님은 무엇인가?(What is God?)'라고도 묻자."고 제안했습니다. 

인간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하느님, 말을 안들으면 화를 내기도 하고 진노를 퍼붓기도 하며, 자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이방민족을 가차없이 죽이는 하느님, 때로는 자기 백성이라도 말을 듣지 않는다 하여 수천명씩 몰살시키는 신은 ‘사랑의 하느님’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아니 이제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확신, 그러니까 ‘하느님은 우리와 같이 감정(그것이 사랑의 감정이라 하더라도)을 갖고 계신 인격체’라는 확신도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존재로써의 격이 있다면 인격이 아니라 신격이어야 할 것이며, 그 신격이 초인격적일 수는 있겠으나 ‘사람과 같은 인격 안에 갇힌 존재’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천년 전의 원신신앙에서, 또한 원시신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저는 여전히 하느님을 믿고 있으나 제가 경외하고 믿는 하느님은 ‘우주와 자연의 법칙과 질서’이지 ‘인격을 가진 존재’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든 기독교인이 저와 같은 신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마다 자기가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신관이 있듯이 저 역시 제 신관을 당당히 밝히고 싶고 존중받고 싶을 뿐입니다. 

만약 제가 갖고 있는 신관을 많은 기독교인이 공유하게 된다면, 인류는 오래된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독한 종교갈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며, 아이티 지진이나 쓰나미 사건에 대해 하느님께 책임을 묻거나 괴로워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단지 신의 뜻(자연의 질서, 또는 순리)을 ‘구하고’(연구하고) ‘찾고’(이성과 합리로 해결점을 찾아내고) ‘두드리면’(실제 해결을 위해 행동하고 참여하는 것)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많은 기독교인이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구하지도 않을뿐더러 찾거나 두드리는 일은 아예 포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구하고 구하고 또 구하지만, 즉 열심히 기도하지만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연구하고 대처하며 실천하는 데는 미숙합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여, 이제는 이런 이기심과 두려움에 기반한 무모한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이티 지진에 대해 신의 전능성과 사랑의 속성을 생각하며 하느님께 “어찌 된 것이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묻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을뿐더러 적절하지도 못한 물음입니다. 지난 이천년 아니 삼천년 동안 신의 사람들이 계속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했지만 신은 한번도 “이래서 그렇다”고 시원하게 대답해 준 적이 없습니다. 잘못된(또는 어린) 신관에 의한 잘못된 물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우리가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물음에만 매달리지 말고 “하느님, 당신은 무엇입니까?”라고도 묻는다면, 신은 우리의 마음 가운데, 깨달음을 통해, 이렇게 응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네 벗(이웃종교인)들과 대화하고 배워라.
그들은 나를 여러 이름으로 불러왔다.
때로는 법(法)으로, 또는 공(公)으로, 이(理)로, 자연법칙으로, 우주정신(cosmic mind)으로.. 
너희들(기독교인)은 오래 동안 “나(기독교)만 옳다”는 생각에 갇혀왔기에
벗들과 대화하지 못했고 배우지도 못했다.
그러나 진리를 탐구하는 자는 모두 길벗으로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가까운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는 나를 사랑할 수 없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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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1/19 [15:5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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