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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파의 부재가 대중정당의 조건은 아니었다
[진단과 대응] 내가 겪은 정치의 생략, 생략의 정치 (1) 개혁국민정당 편
 
숨인씨
안티조선운동, 총선시민연대, 각종 촛불집회, 대통령 탄핵, 진보정당의 약진. 그리고 그에 이은  보수화의 돌풍과 반동의 시작,  여러가지 분화 양상. 필자도 2000년대식 정치적 격동 속에 있었던 한 시민이었다. 그렇게 해서 겪은 3개 정당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신을 민주당 지지자라고 밝히는 노사모 회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어느 여론조사에서 이인제가 민주당 후보로 나올 시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겠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광호(현 <레디앙> 편집장)가 노무현을 "상처받은 김대중주의자의 희망"이라고 규정한 것은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컸다. 강준만을 비롯한 몇몇 논객에게나 어울릴 진술이었다.
 
노사모는 인물을 매개로 맺어진 단체라 정치세력화에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는 개방경선으로 뽑은 후보를 민주당이 흔들기 시작했을 때 노사모가 항의시위 이외에 별다른 해법을 내놓지 못한 원인이다. 나는 당시 대학생 팬클럽 게시판에서 이왕 이렇게 틀어진 거 민주당으로 들어가보자는 제안까지 내놓고 거부와 질타를 받기도 했다. 개인적인 성향으로 치면 그들보다 내가 민주당에서 더 멀었다. 하지만 정치인을 지지해 청와대로까지 보낸다는 사람들이 정당행을 터부시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을 만든다는 게 생각보다 그렇게 쉬울 줄이야. 칼럼니스트를 그만둔 유시민이 정당을 만들자고 공언하자 금세 창당 에너지가 결집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정당이 개혁국민정당, 약칭 개혁당이었다.
 
생략된 질문과 토론은 곧 위험요인으로

개혁당은 아예 정당을 꾸린 만큼 노사모보다 정치적이었으며 탈정당적 경향을 꽤 씻어낸 집단이었다. 그러나 개혁당이 정당으로서 두드러지는 대목은 대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한다는 방침밖에는 없었다. '노무현의 눈물'로 유명해진 개혁당 발기인대회는 사실상 대선출정식이었다. 부담없이 참여할 만한 당이 생겼다며 발기인대회에 동석했던 내 친구는 "당행사인데 너무 광적"이라면서 혀를 내둘렀다. 
 
▲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좌)     ©CBS노컷뉴스 (자료사진)

개혁당은 부지런한 토론과 적당한 절차를 거쳐 당명과 정강을 확정했다. 유시민이 밀었던 '희망e열린당'이 탈락할 만큼 다수결의 원칙은 철저히 적용되었다. 마지막에 경합했던 당명 후보는 '개혁미래당', '개혁국민정당', '국민의 힘'이었다. 내가 세 번째 안을 강력히 비토했었던 기억이 난다. 무슨 우익 전위단체냐고 따져물었던 것이다. 결국 '국민의 힘'은 최종투표에서 탈락하고, 그 이름은 이듬해 친노 성향의 단체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기본적인 수순 속에서 생략된 질문과 토론들은 항상 개혁당의 위험요인으로 자리잡았다. 개혁당은 정몽준과의 후보단일화를 반대했다. 그러나 창당식 직전 노-정 후보단일화는 시작되었고, 당원들은 "후보단일화가 정말 짜증난다"와 "플레이오프에서의 승리를 위해 일단 노무현으로의 단일화에 애쓴다"는 양 의견에서 기우뚱거렸는데 전자는 거의 실종되고 후자로 몰입하는 형국이 되었다. 당론을 밀고 나가지 못한, 거꾸로 보자면 밀고 나갈 만한 당론을 정하지 못한 당내 현실을 드러낸 귀결이었다.
 
이와 관련해 나에게도 일화가 하나 있다. 연세대 당원모임의 대표를 맡은 어느 형이 내게 대변인을 하라며 논평발표에 관한 전권을 위임한 적이 있었다. 나는 부담없이 하루가 멀다하고 짧은 분량의 논평을 발표했다. 그러다 처음에 대변인 제도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그것보라'며 고개를 젓는 일이 벌어졌다. 단일화협상에서 연신 발빼기를 하던 정몽준을 겨냥해 내가 "정계에서 은퇴하라"고 쓴 것이 화근이었다. 지지 후보의 단일화상대에게 너무 자극적인 표현을 썼다는 비판에, "우리 당론은 어차피 단일화 반대"라며 버텼지만 소용없었다. 모두가 나를 욕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변호하는 이 역시 없었다. (궁지에 몰린 나를 구한 건? 아래에 나온다.) 
 
노사모 내에서도 분분하던 민주당과의 관계설정에 관한 의견들도 개혁당에 그대로 옮겨 붙었다. 강준만, 양신규, 조원봉 등은 당연히 민주당과 합당하리라고 예상하고 입당했다. 반대편에는 '백년가는 정당'을 내걸며 민주당과의 통합은 없다는 입장이 또렷하게 형성돼 있었다. 허나 민주당이 쪼개지는 시나리오를 대비하면서 이를 공론화한 당원들은 드물었다.
 
개혁당 게시판에서는 의외로 이념논쟁도 시끄러웠다. 나는 이 중심에 있었다. 민족주의 논쟁에서도 그랬지만, 몇몇 당원들이 사민주의를 이야기했을 때 나는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 사민주의는 사회주의이지 수정자본주의가 아니라고. 개혁당 당원들은 자신의 포지션보다 더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관념과 수사를 쓰는 경향이 있었다. 심지어 "양심적 병역거부 허용"이 아니라 "양심적 병역거부"를 학생위원회 사업으로 끌고 가겠다는 그룹도 있었다.  
 
흔히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를 "평상시에는 좌파, 선거에서는 자유주의"라 비판하고는 한다. 개혁당도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한데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사상을 오해한 무식의 소치가 아니었다. 노무현이라는 기성 정치인을 응원했으나 정치사회 구도에서 제가 있는, 혹은 제가 있어야 할 위치를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방증이었다. 멋있게 보이는 건 다하고 싶은 욕망은 정치를 생략시켰다. 단일화에 반대한다면서 막상 일이 닥치자 플레이오프를 운운하고, 자유주의 중도파인 노무현 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처지에 독일 녹색당을 들먹이는 이중성이 다 정치의 생략에서 비롯되었고 또 그것을 초래하였다. 
 
노무현으로의 단일화가 확정된 직후, 개혁당은 선거 뒤 야당의 역할을 하겠다는 결심이 강했다. 나는 이에 반대했다. 정체성에 맞는 후보를 지지했기 때문에 권력의 분담을 당당하게 요구해 정권의 일각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몽준의 단일화 철회와 대선 승리 이후에도 여러 당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거나, 혹은 별 생각 없이 다가오는 정국에 임했다. 그리하여 정치의 생략은, 필연적으로 생략의 정치로 치닫게 되었다. 
 
▲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청와대 (자료사진)

한국정치 아이러니가 당시 유시민의 힘

창당 준비 과정에서 유시민은 '삐끼'를 자임했다. 우리들은 그의 분투를 환영하면서도 상황이 비정상적이라고 느꼈다. 그에게 칼럼니스트로서의 자리와 자유가 다시 주어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덕양 재보선에도 처음에는 문성근 출마설이 나왔다. 문성근이 "정치하면 내가 개새끼다"라고 사양하면서는 유기홍 출마설이 나왔다. 하지만 유시민이 집행위원(최고위원격)에 출마했을 때는 다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 책임은 응당 져야 하므로. 그런데 개혁당 창당대회 당일 유시민은 '대표 집행위원'으로 쨘하고 나타났다. 어떻게 된 일일까?
 
개혁당 집행위원은 당원들이 직접 1인 3표를 행사함으로써 선출되었다. 나는 우선 김재규 후보를 찍었다. 부산 민주공원 단장을 역임한 그가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에 기여했음을 인정하는 취지에서. 나머지 두 표는? 후보자 대다수의 이름이 익숙하지 않았으니, 자연스레 한 표는 유시민 후보에게 돌아갔다. 남은 한표는 대학생 출마자인 윤선희 후보에게 던졌다. 이런 식으로 유시민, 윤선희 후보를 찍은 당원들은 꽤 많았다. 그 둘 모두 당선되었고, 김재규 후보는 떨어졌다.
 
나는 집행위원 후보로서 유시민을 골랐지만 그가 대표직을 맡기를 바라거나 권하지는 않았다. 집행위원 최다 득표자가 대표가 되는 제도였다면, 나는 유시민을 찍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개혁당 당대표를 뽑는 방법은 집행위원의 호선이었다. 이 제도의 명분은 직선 단일대표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었다. 유시민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집행위원의 호선으로 어쨌든 그가 대표직에 선출되었다. 또 선거기간을 눈앞에 두고 한나라당을 탈당해 건너온 김원웅 의원에게 곧바로 '공동대표' 명의가 주어졌다. 권력집중 방지는 이뤄지지 않았다.
 
후보단일화에 대한 방침도 전적으로 지도자들의 결단에 달려 있었다. 개혁당이 단일화에 반대한 맥락은 간단하다. 그것이 노무현으로 단일화, 정몽준으로 단일화, 단일화 무산 등 세 경우 모두에 있어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단일화과정을 돌이킬 수 없더라도 정몽준을 자유롭게 타격하려면 단일화반대로 정리해두는 게 편리했다. 내가 쓴 문제의 논평 '정몽준은 정계를 은퇴하라'는 결국 개혁당 홈페이지 메인에 걸렸다. 중앙당이 이 논평을 반겼으면 반겼지 경거망동이라고 규정하지는 않으리라는 예측이 맞았다. 무례하고 공격적이었다고 비판했던 이들은 중앙당의 행위에 비판하지 않았다. 단순무식하게 요약하자면, 내가 하면 문제가 되고 당중앙 또는 유시민이 하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선 직후 개혁당의 향방은 유시민의 움직임에 좌우되었다. 386 후배들이 의원 뱃지를 달았을 무렵에도 장외 칼럼니스트로 존재하던 그는 원내정당의 공동대표라는 직함과 직설화법으로 대표되는 특유의 스타일로 정국의 한 주도권을 잡았다. 민주당에 연일 매서운 칼날을 날리던 그의 앞에서, 당내에서 막아서던 '통합파'들은 이미 힘을 잃었고, '독자파'들도 그를 견제할 필요가 없었다. 민주당을 깨겠다고 덤비는 유시민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유시민이 정치를 하지 않으리라는 관측이 그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이점이야말로 한국정치의 전형적 아이러니에 해당한다.
 
내가 군입대하기 직전인가에, 유시민 대표가 윤선희 집행위원을 회의 중간 쉬는 시간에 불러내 혼을 내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내에서 벌어진 성추행 사건에 윤선희가 주목하고 문제제기하면서 불거진 일이었다.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를 줍고 있을 여유가 없다"는 저 유명한 발언도 그후에 나왔다. 얼마 뒤 2003년 4월 덕양갑 재보선에서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맺으면서 비로소 유시민은 당내의 논쟁에 휩싸였다. 그때 한 학생당원은 '개시민'이라며 욕설을 퍼붓다 끝내 탈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다시 유시민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유시민 대표는 재보선 승리 이후 최고로 입김이 센 초선의원이 되었고, 민주당 구주류와 한나라당의 미움을 '빽빠지'로 역이용하면서 삽시간에 스타의원의 반열에 올랐다. 곧 본업으로 복귀할 것만 같은 '이 시대의 칼럼니스트'였던 그는, 어느 틈엔가 개혁당원들을 비롯한 노무현 지지자들에게 있어 '제2의 노무현'으로 자리잡았다. 개혁당내의 어떤 논란과 균열도 그를 통제하지 못했다. 
 
▲ 개혁국민정당 당헌    

개혁당 패인은 바깥보다 '약한 당원'에서 찾아야
 
세칭 '독수리 오형제'의 한나라당 탈당과 민주당 신구파의 분당을 거쳐 원내에 구성된 '통합신당'측은, 개혁당을 "이념색"이 강하다며 멀리하였다. 열린우리당 창당과정도 민주적이지 못했다. 특히 당명 결정 작업은 개혁당의 사례와 대조되었다. 나는 개혁당원들의 상한 자존심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나는 군복무 도중 휴가를 나왔을 적이었던가, 메신저 채팅을 통해 옛 동료 당원들에게 열린우리당과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들은 한 지인은 "쇼킹하다", "당신이 그런 이야길 했다고 전하면 다들 믿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나의 대답은 이랬다: "개혁당이 열린우리당과 섞이지 못할 만큼의 진보성을 가진 집단인가? 스캔들에 연루된 인사나 후단협 참여자들까지 섞여든 상황이 개운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정당내에서 해결할 일이라고 본다. 이미 민주당까지 깨졌는데, 기반은 차치하고 독자적인 사상과 노선도 없는 개혁당이 잘난체할 터인가? 소꿉장난하듯이 백년정당을 만들 것인가? 만일 자기 자신의 진보성이 열린우리당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민주노동당에 들어가 사민주의적인 시민정당의 요소를 부여하시라."
 
주변 당원들은 내가 단순히 군문제로 탈당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나는 자신이 앞으로 더 진보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있든 없든, 개혁당은 노무현 정권 및 민주당 신주류와 함께하는 것이 옳다고 봤다. 개혁당은 중도 자유주의 정당이었다. 일견 녹색당처럼 비쳐졌던 모습들은 당의 한 문화적 편린일 뿐이다. 사민당이든 녹색당이든 그걸 하려면 통합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에서 하는 게 더 옳았다.
 
다만 문제는 개혁당 정신이 열린우리당의 창당에 제대로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그에 걸맞은 절차와 형식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유시민 등 당주류는 이 측면에서 성의가, 나아가서는 염치가 없었다. '통합파'와 '독자파'의 대결은 통합파가 등을 돌리고 사라진 후 독자파와 신당참여파의 논쟁으로, 그 다음은 '개혁당 해산 및 열린우리당 합류론'과 '당대당 통합론'의 대립으로 전환되었다. 마지막으로 당해산 찬반 투표가 실시되었고, 그때 나는 사제에 없었던 터라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77대 23으로 당 해산이 결정되었다. 유시민 등 지도부는 야반도주하듯 재빨리 열린우리당에 들어갔고 그러면서 당의 집기도구까지 가져갔다.
 
열린우리당에 합류한 개혁당원들은 주로 기간당원제를 수립하고 사수하는 대열에 섰던 것 같다. 내부 사정을 궤뚫고 있지 않은 외부 관객의 입장에서, 그것밖에는 없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라크파병 등에 대해 정권과 당지도부에 반기를 드는 등의 '여당 속의 야당' 노선은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한편 남은 사람들은 유시민을 규탄하면서 선관위에게 '당해산결정 무효' 판정을 얻어냈지만, 그들의 독자적 행보는 여의치 않았다. 녹색평화당, 한국사민당과의 합당설까지 제기되었으나 총선에서는 후보를 낼 수 없었고 대신 민주노동당 지지선언을 했다. 
 
나와 가까이 지냈던 학생당원들은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별도의 모임을 구성해 정치참여를 모색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후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나는 잘 모른다. 당시의 개혁당 동지들과 한동안 연락하지 못했고 근래 3년동안 만난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 개혁당 동료들을 모아 함께 민노당에 입당하리라는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던 연유도 거기에 있다. 

개혁당은 단숨에 1만명 이상의 발기인을 모으며 기세등등하게 출현했으며, 명사정당인 민주당, 한나라당은 물론 운동정파연합당인 민주노동당과도 금세 문화적인 차별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당은 원내교섭단체도, 노조도, 생협이나 문화센터도 아니다. 개혁당은 지지 정치인을 대통령직에 앉힌 다중(多衆)의 집단임에도 대중정당으로서 실패했다. 원래 대중정당이었지만 정치권의 격량에 휘말려 좌초했다는 분석은 타당하지 않다. 당원들은 정당에 걸맞은 정치기획을 가지고 꾸리지 못했다. 그런 이상 어떤 정당도 명망가정당의 위험을 빠져나갈 수 없다. 흔히 정파가 없거나 당내 분열구도가 희미하며, 당원의 수가 많고 면면이 다양하면 대중정당으로서의 더없는 조건을 갖췄다는 오해를 한다. 아둔한 내가 그 오해로부터 일찍 빠져나올 수 있었건 건 개혁당의 경험, 그리고 그에 관한 회고와 반성 덕택이었다.  
* 글쓴이는 경북 구미시 시의회 의원(무소속)입니다.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영남지역 최연소(27세) 기초의원에 당선돼 현재 시의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2002년 <대자보> 필진으로 참여한 이래 다년간 정치칼럼 등을 연재해 왔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대자보> 독자들과 만납니다.
기초의원으로서 풀뿌리 정치 현장에서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블로그 : http://kimsoomin.tistory.com/
 
기사입력: 2009/12/11 [17:12]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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