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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겐지: 소설을 위해 세상과 단절한 작가
[최을영의 시사인물 포커스] 문학은 읽는 것이며 쓰는 것이라는 소설가
 
최을영   기사입력  2009/12/09 [15:55]
은둔작가?
 
흔히 마루야마 겐지를 은둔작가로 칭한다. 하긴 등단 이후에 오직 소설을 쓰기 위해, 또 소설로 밥 벌어 먹고 살기 위해 시골로 내려가 생활비를 줄여가며 창작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은둔작가란 말을 들을 만하다. 그를 소개하는 신문기사에도, 또 그의 책에 붙여진 소개말에도 그는 곧잘 은둔작가로 표현된다. 그러나 마루야마 겐지는 은둔작가란 표현이 정확하지 않다고 말한다.

"금욕적이라거나 은둔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다른 장르의 예술이나 학문, 스포츠에서 획기적인 작품이나 기록을 만들어내려는 사람과 똑같이 나도 철저한 소설가가 되고 싶을 따름이다. 세상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은 여기에 방해된다. 방해가 되는 조건을 모두 배제한 것이 이런 생활이다. 집필 이외에는 정원 가꾸기에 열중하고 있다. 소설과 정원 일, 이 두 가지뿐이다. 최근 수년 동안은 하루도 집필을 쉬지 않았다. 하루 정도 쉰다고 글이 나빠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그 하루가 중요하다."(박선희, 『동아일보』, 2009년 4월 30일자)

철저한 소설가가 되기 위해 방해되는 조건을 배제한 삶. 마루야마 겐지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규정한다. 등단작이자 『문학계』 신인작가상과 아쿠타가와상을 안겨준 「여름의 흐름」을 써 낸 이후, 갑작스레 주목받는 소설가가 된 그는 스스로 자청한 고독 속에서 고독을 이겨내며 소설을 쓰고 있다.  
 
되바라진 아이
 
▲ <소설가의 각오>     © '문학동네'
1945년 일본의 나가노현 이에야마시에서 태어난 마루야마 겐지는 "되바라진 아이"였다. 그는 "툭하면 어른들의 얘기에 끼어들었으며, 징글맞도록 붙임성이 좋았고, 너스레도 잘 떨었다. 그런 주제에 성미가 급해 한 번 성질을 부렸다 하면 부모님도 속수무책일 정도로 난동을 피웠다. 또 노력하기는 싫어하면서 폼 잡기는 좋아하였고, 무슨 일이든 끝마무리가 엉성했다. 그리고 주특기는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공상벽이 있어 나 스스로도 넌덜머리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마루야마 겐지, 김난주 역, 『소설가의 각오』, 문학동네, 1999, 139~140쪽. 이하 같은 책)

더구나 그는 가정이라는 것을 아주 싫어했고, "내내 이런 생활을 하다가는 썩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중학생 무렵 브라질 이주를 꿈꾼다. 당시 그는 "겨우 세상의 일부분밖에 이해하지 못했지만, 또 그 이유에 대해 구체적인 언어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은 틀림없이 무수하게 많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144쪽) 그 무렵 그는 허먼 멜빌의 『백경』을 읽고, 선원 생활을 동경하게 된다.

"브라질로 이주한다는 꿈이 부풀대로 부풀었을 때 멜빌의 『백경』과 조우하였다. 그 책은 아버지가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책 가운데 유일한 외국 문학이었고, 또 유일하게 제대로 된 책이었다. 당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아주 좋아하는 일본 문학은 내가 어른들의 세계에 대해서 잘 몰랐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한 시시한 것들뿐이었다. …… 감동을 느낄 만한 요소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백경』은 달랐다. 나는 정신없이 그 책을 읽었고, 그리고 감동했다. 문학의 위대함을 처음으로 알았다고 말해도 좋다. 피가 들끓었다. 사내자식이라면 에이헙 선장처럼 살아야 한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자신을 그런 삶에 근접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바다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원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146~147쪽)

선원이 되고자 했던 그는 바다로 나가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인 무선통신사가 되기 위해 국립 센다이 전파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낙제생이 되었다. 그렇다고 좌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뻔뻔스럽게도 마지막까지 남았다. 낙제생이라는 자의식은 거의 없었다. 그런 간판은 학교 측에서 붙여준 것이지 내가 자진하여 달고 다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학교 측이 기대하는 학생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자기 인생이 모두 엉망진창이 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자기 간판은 스스로 달면 되니까 말이다. 학교나 부모가 붙이는 간판에 승복하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 일류 대학을 나와 일류 회사에 취직하면, 그 다음은 반드시 광휘에 빛나는 인생이 도래할 것이라고 믿은 작자들의 머리가 오히려 이상하다. 그럴 정도로 이 세상이 만만하게 돌아가고 있다면 힘들 게 하나 없을 것이다."(150~151쪽)

학교를 '유원지'로 생각했던 그는 당시 영화에 심취했다. 훗날 소설가가 됐을 때 그는 이 당시 본 영화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특히 영화 <백경>을 보고 난 뒤 소설의 힘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무선통신사 학교에 다닐 적에 영화화된 <백경>을 보았다. 그 경험은 내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나는 영화와 문학, 영상과 활자의 대결을 인식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영화에 열중해 있었고, 영화가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믿었다. 영상의 강렬함에 비하면 활자의 힘 따위는 문제가 안 된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 <백경>은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카메라는 활자의 표면을 가볍게 스쳤을 뿐이었다. 단순히 예산 부족이라든가 시간 부족, 연기력의 부족 등으로 인한 실패가 아니었다. 영화 <백경>을 보고 나서 나는 오히려 밑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소설의 힘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107쪽)

그러나 아직 그는 소설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아 선원이 될 수 없었던 그는, "가까운 나라의 동족상잔을 이용하여" 솜을 판매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던 한 상사에 통신사로 취직한다. 
 
소설가가 되다
 
그러나 1964년 도쿄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마루야마 겐지가 다니던 회사는 도산 직전에 이른다. 회사 사람들 모두가 우왕좌왕하던 그때, 마루야마 겐지는 느닷없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 계기가 뭐였는지는 마루야마 겐지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소설을 쓰자고 작정한 그럴 법한 몇 가지 동기가 있다. 그러나 완전한 정답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결국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설명할밖에 없다. 다니던 회사가 도산 직전에 놓여 전업을 해야만 했다는 것도, 상금이 탐났다는 것도, 주위 사람들에게 나를 다시 보게끔 하고 싶었다는 것도, 혹은 그 모두가 뒤얽혀 있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일이라면 그밖에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문학과는 인연이 없는 통신사였던 내가 느닷없이 펜을 쥔 데는, 무언가 다른 요인이 작용하였을 텐데 납득할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63쪽)

글쓰기를 지독하게 싫어해 원고지 한 장을 메우는 일조차 쉽지 않았던, 또 '오늘은 잤습니다. 일어났습니다'란 말밖에 일기장에 쓰지 못했던 마루야마 겐지였지만, 곧 그는 반년 동안 회사 노트에 회사 볼펜으로 하루에 세장씩 소설을 써나갔고, 400자 원고지로 100매짜리 소설을 완성해 잡지 『문학계』의 신인상에 응모했다. 그리고 1966년 신인상을 공동수상했고, 같은 해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최연소(23세)로 수상했다.

스스로도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소설에 대해, 또 문단에 대해, 소설가란 사람에 대해 무지했던 마루야마 겐지는 『문학계』 신인상과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이후에 문학을 하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으며 자신과 달리 오로지 문학을 위해 끊임없이 정진해오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느닷없이 소설가가 된 자신에게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그러나 소설가입네, 예술가입네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행태를 보면서 소설을 써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쿄 주변에 몰려 살며, 가는 술집도 비슷하고, 기행을 일삼으며, 문학에 대해 장황한 말들을 주절거리는 소설가와 문학평론가들을 그는 "우스꽝스러운 작자들"이라 평한다.(225쪽) 그러면서 그는 소설로 인정받았으므로 소설에 집중하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에 소설을 써나가기 시작한다.

"당시 내가 가장 경계한 것은 주목받는 것이었다. 나는 겨우 한 편의 소설로 인정을 받았을 뿐, 나의 전부를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일본 젊은이들을 대표한다는 듯 떠들어대서도 안 되었다. 관심도 없는 주제에 정치적인 코멘트를 남발해서도 안 되었다. 여배우와의 대담 같은 일에 손을 대어서도 안 되었다. 그런데 어떤 평론가가 나의 태도를 젊은이답지 않다고 지적했다. 웃기는 소리다. 유치한 패거리들과 비교하면서, 젊은이답지 않다니 어디 말이나 될 법한가. 관계자들은 내가 매스컴이란 무대에서 바보춤이라도 추기를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소설로 인정을 받았으므로 오직 소설에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것이 도리라는 것이다."(189~190쪽쪽)

그가 소설에서 중시한 것은 이미지였다. 그의 소설을 가리켜 시소설이라 칭하는 것도 이 때문인데 그는 "데뷔한 이래 줄곧 영화에 대한 대항의식을 갖고 소설을 써왔"으며 "영화로는 절대로 표현하기 어려운 시각적 이미지를, 글자이기에 가능한 선연한 이미지를 창출해내고 싶었"다고 말한다.(103~104쪽) 그리고 실제로 그의 소설은 항상 선연한 이미지를 품고 있다.

소설가가 된 이후 마루야마 겐지는 시골로 내려간다. 소설 쓰는 일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또 무절제한 생활을 바로잡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일본 북부 산악지역의 오오마치에 거주하면서 지금까지 150여 편의 소설을 내놓는다. 그렇게 나온 작품이 『물의 가족』 『달에 울다』 『좁은 방의 영혼』 『밤의 기별』 『천년 동안에』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도망치는 자의 노래』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 『납장미』 『천일의 유리』 『해와 달과 칼』 등이다. 또 산문집으로 『소설가의 각오』와 『산자의 길』도 내놓았다. 
 
소설가란 무엇인가
 
소설가가 되기 전, 마루야마 겐지에게 소설가는 문학만큼이나 낯선 존재였다. 그리고 소설가가 된 이후에는, 자신이 일반 사람들과 비교해 재능보다 결함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 마루야마 겐지    
 
"정직하게 말하면, 회사라는 차라리 인간적인 조직 속에서 계속 버틸 수 없었던 일에 대해 나는 지금도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주위 탓으로 돌리는 것은 간단하지만, 실은 나 자신에게 커다란 결함이 있었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었을 뿐더러 나 자신 또한 지칠 대로 지치고 말았다. …… 이런 식으로 쓰면 허세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정말 이런 나 자신을 인정하기란 유감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 수 없는 것이 분해서 견딜 수가 없다. 산기슭에 살면서 개나 기르고, 소설 따위나 쓰고, 양지바른 곳에 웅크리고 있다니, 이렇게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화가 치민다."(66쪽)

그래서일까. 그는 1970년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에 대해 쓴 글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무릇 소설가란 이름의 인종은, 학교 선생이나 중처럼 끊임없이 인간과 사회를 테마로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킬 수 있는 홀가분함 덕분에, 즉 무절제한 사고에 브레이크를 걸 실질적인 체험이 뒷받침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중요한 테마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나머지 전혀 실태를 모르는 구석이 있다. 특히 오랜 세월 작가생활을 하거나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예술가라고 믿는 자들 중에 많은 것 같다. 이 점은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느닷없이 작가라는 명함을 내밀게 되었을 때 느낀 일이다. 그러나 그런 자들(그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은 유독 작품의 전면으로 나서서, 거짓세계를 잘 꾸며내는 유일한 재능을 인정받았을 뿐인데, 때로는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보다 뒤지는 다른 능력까지 과시하며 세기의 대천재, 대영웅이 되고 싶어 한다. 그들에게서 소설가라는 간판을 떼어내면 나머지는 어느 것 하나 인정해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미미한 재능이지 않을까. 게 중에 그런 대로 쓸 만한 자가 있다 해도 그들의 소설은 도저히 읽어줄 수 없는 엉터리가 태반이다. 소설가의 재능은 다른 세계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 이런 정도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세상을 위해서라는 둥, 인간을 위해서라는 둥 떠드는 소설가는……."(34~35쪽)

마루야마 겐지는 소설로만 세상과 호흡하려고 한다. 그래서 철저한 소설가가 되기 위해 방해되는 조건을 배제한 삶을 살고 있다. 결함을 갖고 있는 소설가가, 거짓세계를 잘 꾸며내는 유일한 재능을 인정받은 소설가가 소설 이외의 것으로 대중에게 다가서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대신 그는 새로운 문체를 발굴하기 위해, 문학의 광맥을 찾기 위해 하루하루 펜을 벼리고 있다. 그런 그의 앞에는 산더미처럼 많은 문학의 광맥이 기다리고 있다. 
 
문학의 광맥
 
산문집 『소설가의 각오』 중 한국 독자에게 전하는 글에서 마루야마 겐지는 이렇게 말한다.

"문학이 쇠퇴하였다는 말들을 많이 하지만, 기존의 문학이 쇠퇴했을 뿐 문학 자체가 쇠퇴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기존의 작가들이 쇠퇴한 것이지 문학의 광맥이 고갈된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문학에 도전하겠다는 각오만 확고하다면, 문학의 광맥은 얼마든지 우리들에게 가능성을 열어줄 것입니다."(7~8쪽)

또 2009년 4월 장편 『해와 달과 칼』을 한국에서 출간하면서 가진 인터뷰에서 아직 구상만 하고 있는 작품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한다.

"많다. 백 살까지 쓴다고 해도 다 쓰지 못할 정도다. 그 미답의 봉우리 중에는 등산길의 입구조차 아직 찾아내지 못한 것도 있어 숲에 다가가는 것도 불가능한 형편이다. 우선 오를 수 있는 산부터 등반해보려 한다. 그것을 반복해가는 동안 고봉의 정상에 설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14(박선희, 『동아일보』, 2009년 4월 30일자)

소설 쓰기에 이처럼 몰두하는 작가를, 또 이토록 고집스럽고, 괴팍하면서도, 삶과 자신의 일에 솔직한 작가를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일 터이다. 이것이 다음과 같은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까닭이다.

"문학은 읽는 것이며 쓰는 것이지, 논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소설쓰기를 목표로 하는 자는, 문학론 따위와는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해야 한다. 그리고 홀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 세상에 대해, 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에서 튕겨 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 가장 위태로운 입장에 서서 불안정한 발밑을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아슬아슬한 선상에서 몸으로 부딪치는 그 반복이 순수문학을 하는 사람의 자세인 것이다."(마루야마 겐지, 김난주 역, 『소설가의 각오』, 문학동네, 1999, 207쪽.)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09년 12월 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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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12/09 [15:5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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