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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인은 자국의 경험을 배우지 않나?
[강준만의 세상이야기] 토크빌『미국의 민주주의』로 본 미국사와 한국사
 
강준만
‘미국사와 미국 정치 이론의 필독서’

1831년 5월 프랑스의 젊은 귀족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이 구스타브 보몽(Gustave Beaumont)이라는 친구와 함께 미국 뉴욕에 도착했다. 미국식 민주주의를 연구하기 위해 온 토크빌은 9개월에 걸쳐 미국 전역을 돌면서 앤드류 잭슨 대통령을 포함해 개척자, 인디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국인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토크빌이 프랑스로 돌아가 1835년 1월 출간한 『미국의 민주주의』는 “몽테스키외 이래의 명저”라는 칭송을 받았다.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도 장문의 서평에서 극찬했으며, 이 책은 곧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돼 널리 읽혔다. 파리에서는 1848년 2월경까지 12쇄나 출간되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840년 『미국의 민주주의』 제2권을 출간했는데, 이 책들은 오늘날까지도 민주주의에 관한 고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데이비스(Davis 2004)는 “이 책은 나온 지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사와 미국 정치 이론의 필독서가 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토크빌 역시, 미국의 특성을 예리하게 꿰뚫어보는 안목과 비범한 통찰력으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미국 정치와 민주주의 전반에 대한 중요한 논평가로 대접을 받고 있다.…토크빌의 논평과 관찰력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해서 1831년이 아니라 지금 적용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오류보다는 정곡을 찌르는 내용이 더 많았다.”

미국인의 물질주의와 순응주의

▲ <미국의 민주주의>     ©한길사
1831년에서 1832년까지 토크빌(Tocqueville 1997)의 눈에 미친 미국은 어떠했던가? 그는 미국에서 서부(西部)가 갖는 중요한 의미를 포착하였다. 그는 서부에서 ‘민주주의’를 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서부로 몰려가는 과정에서 신분(身分)과 경제력의 차이는 있을 수 없었다. 모두가 평등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건강한 정신과 태도가 서부 개척사에서 형성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토크빌은 또한 미국인들의 신앙심에서 그 어떤 희망을 보았다. 그는 미국의 경우를 들어서 그 당시 유럽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팽배했던 종교 무용론에 일격을 가했다. 김봉중(2001)의 해설에 따르면, “인간의 본능에 따라 생활수준이 향상되면 더 많은 물질적 안락을 요구하게 되는데,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채워지지 않고 인간은 혁명과 같은 과격한 돌파구를 찾게 된다. 이러한 역사의 필연적인 고리를 단절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종교이다. 격동의 프랑스 역사를 지켜보면서 토크빌은 가능한 한 처절한 혁명을 거치지 않고 민주주의로 비상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역사의 과정으로 보았다. 프랑스는 하지 못했지만 미국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토크빌은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지극히 격정적이어서 소수의 구성원이 충동적으로 일을 결정하고 집행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면서 미국 전체에 “직접으로 또는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대도시가 없다”는 사실이 미국의 행운이라고 주장했다.

토크빌은 미국의 사법제도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미국에서 귀족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법원의 판사석에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했다. 미국의 법관은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한 종신직이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미국 헌법 제3조 제1절은 “연방대법원 및 하급 법원의 판사는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한 그 직을 보유”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사법부의 독립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였지만 동시에 인재 확보의 목적도 있었다. 임기제로 하면 법관보다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변호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의 대법관과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정년은 65세이지만, 일반 법관은 63세이고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의 정년은 70세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사법부의 서열 위계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한국에서 법관 임기제의 중요한 정치적 의미는 사법부 통제다.(조지형, 2007)

토크빌이 미국을 좋게만 본 것은 아니다. 그는 미국인들이 철학보다는 실용에 치중한다면서 일편단심 부만 좇는 미국인들을 꼬집어 지적했다. 그는 “돈에 대한 숭배가 인간에 대한 애정을 압도하는 나라를 나는 미국 이외의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다”고 했으며, “나는 미국만큼 독립적 정신과 진정한 토론의 자유가 적은 나라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미국 특유의 물질주의와 순응주의를 지적한 것이다. 그가 미국 민주주의와 관련해 ‘다수의 독재’에 대한 공포를 표현한 건 당연한 귀결이다. 그는 순응주의와 물질주의가 미국의 특성이 되는 것만큼이나 개인주의와 이상주의도 두드러진 점이라고 보았다.

미국인의 ‘역사 콤플렉스’

“아메리카여, 너는 우리 오래된 대륙에 비하면 운이 좋구나. 파괴된 성도 없고 원시시대부터 존재하던 돌도 없구나. 너의 영혼, 너의 내면의 삶은 쓸데없는 기억들로 인해 고통받지 않는구나.” 괴테가 1812년에 쓴 시(詩)다. 그러나 미국엔 전혀 다른 종류의 ‘고통’이 있었다. 토크빌은 그것도 날카롭게 포착하였다.

“처음으로 뉴욕에 도착하여 이스트 리버(the East River)라고 불리는 대서양 연안에 다다랐을 때, 나는 그 도시에서 멀지 않은 해변을 따라 고전 건축술로 된 것도 포함된 수많은 흰 대리석으로 된 소궁전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 나의 시선을 특별히 끌었던 것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그곳에 가본즉, 그 벽은 흰 벽돌로 되어 있었고, 그 기둥은 채색된 나무로 되어 있었다. 내가 전날 밤 찬탄해 마지않았던 모든 건축물이 다 마찬가지였다.”

미국판 키치(kitsch)라고나 할까? 도대체 미국인들은 왜 그랬던 걸까? 그건 바로 ‘역사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토크빌은 계속 그걸 아프게 지적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재 아메리카합중국 주민들은 문학이란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내가 아는 한 아메리카인으로 작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저널리스트들이다. 그들은 사실상 훌륭한 작가는 되지 못하고 그들 나라의 말을 하면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미 1820년 영국의 만담가인 시드니 스미스(Sydney Smith)는 “지구상에서 누가 미국 책을 읽거나 미국 연극을 보러 가겠는가? 혹은 누가 미국 그림이나 조각을 보겠는가?”라고 비웃었다. 미국인들은 유럽의 이런 비아냥거림에 콤플렉스를 느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대적인 시도를 하게 된다.

독특한 미국문학을 창조하려는 노력은 19세기 초에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 1783~1859)을 비롯한 문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미국인들은 어빙을 그런 시도를 한 인물로 평가하지만 영국인들은 달리 본다. 영국인 존슨(Johnson 1999)은 이렇게 말한다.

“워싱턴 어빙을 비롯한 건국 직후의 미국 지식인들은 유럽을 자주 왕래하면서 유럽인의 어조와 태도, 그리고 문체와 그 내용을 흉내 냈다. 말하자면 그들은 문화적 식민주의의 산물이다. 어빙 식의 떳떳하지 못한 자세에 대한 반동으로 독립국가 아메리카니즘이 태어났다. 이러한 사상의 최초의 대표적 완성자이며 19세기 미국 지식인의 원형이 된 인물은 랄프 왈도 에머슨(1803~1882)이다.”

에머슨은 나중에 미국의 ‘지적 독립선언’을 하게 되지만, 적어도 1820년대부터 미국적 색깔을 강조한 문학작품들이 선을 보이기 시작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예컨대, 1820년대 소설가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1789~1851)는 1826년 『모히간족의 최후(The Last of the Mohicans)』, 1841년 『사슴 사냥꾼(The Deerslayer)』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미국 예외주의

토크빌이 날카롭게 지적한 미국인들의 ‘역사 콤플렉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어느 나라 사람이건 ‘역사 콤플렉스’가 전혀 없진 않겠지만,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상호 대비되는 콤플렉스의 두 주인공이 있으니 바로 한국인과 미국인이다. 미국인부터 살펴보자. 미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로웬덜(David Lowenthal)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2006)는 그 점을 실감 나게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지만, 다른 나라엔 다 있는 게 하나 없으니 그게 바로 ‘오랜 역사’다.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그들이 그 땅에 살았던 인디언의 역사를 껴안을 리는 만무했으니, 이는 두고두고 미국인들의 정신세계를 괴롭혔다. 미국인들은 처음엔 ‘역사 조롱하기’로 대응했다. 유럽은 늙고 썩은 반면, 미국은 젊고 신선하다는 논리였다. 그렇지만 미국인들이 이 점을 공격적으로 강조하면 할수록 그들의 그 어떤 결핍을 폭로해줄 뿐이었다.

미국인들은 역사에 대해 이중적이었다. 저주하는 동시에 흠모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 먹을 수 없는 걸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싫어한다고 강조함으로써 보상을 찾으려는 심리라고나 할까. 그 결과는 무엇인가.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들의 경험에서 무언가 배우려 하지 않는다. 철저한 자국 중심주의에 푹 빠져 있다. 이는 ‘독선과 오만’ 이전에 거의 후천적 유전자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세계 여론을 무시했던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마이웨이’도 상당 부분 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반면 한국인은 정반대다. 늘 ‘반만년’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훈련은 받았지만, 한국인들은 그 역사에 ‘승리와 정복’이 없는 건 물론 당하고만 살아온 기록이 넘쳐나는 것에 대해 지긋지긋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일부는 고구려와 그 이전의 역사에만 심취하고 일부는 서양과 중국의 역사 쪽으로 달려간다. 웬 ‘로마인 이야기’와 ‘삼국지’는 그리도 좋아하는지! 특히 수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는 우울하다는 이유로 적극 외면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한국인은 자국의 경험에서 무언가 배우려 하지 않는다. 늘 밖만 쳐다본다. 미국으로 갔다가 프랑스로 달려가고 네덜란드로 갔다가 스웨덴도 기웃거린다. 웬 모델은 그리도 많이 수입하는지 어지러울 정도다.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나라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자기보다 좀 못하다 싶으면 노골적으로 얕잡아 본다.

한국인은 자주 자신들의 과거를 타도와 극복의 대상으로 삼는다. 명암(明暗)의 양면을 다 보면 좋으련만 각자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과거를 찬양과 계승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도 오늘의 당파적 이해관계 연장선상에서 그러는 것인 경우가 많다.

미국인은 오랜 역사를 얕잡아보면서 뭐든 새롭게 창조하겠다는 야망과 열의로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인은 자기비하를 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나라들의 것을 무작정 들여와 그대로 해보겠다는 집념과 열의로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두 나라 모두 그에 따른 비용과 희생을 치렀지만, ‘성공’이라 말해도 무방할 정도의 진보를 이룩했다. ‘콤플렉스는 나의 힘’이라는 말을 입증해준 대표적 사례라 해도 좋겠다.

그러나 늘 행운이 따를 수는 없는 일이며,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도 있다. 이는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원동력으로 삼아 성공을 거둔 입지전적인 인물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멈출 때를 아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국인들의 ‘역사 콤플렉스’가 괴테의 예찬처럼 180도 변신을 했다는 점이다. 즉, 미국은 때 묻지 않은 새로운 사람들이며, 그래서 미국인들은 특별하다는 이른바 ‘미국 예외주의(exceptionalism)’ 또는 ‘미국 특별의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미국 예외주의는 미국인들의 삶을 지탱시키는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미국의 대의가 곧 모든 인류의 대의인 것이다”라는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의 말은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 (사진출처 : Malaspina Great Books)  
‘토크빌을 찾게 되는 시대 상황’


토크빌이 미국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프랑스에서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논쟁이었다. 그는 정부의 중앙집중화는 국가의 존립과 번영에 필수적인 반면, 행정의 중앙집중화는 국민의 지방적 정신, 곧 자치력과 자발적 협력심을 박탈함으로써 그들의 생존력을 저하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행정의 중앙집중화는 지방자치, 곧 민주주의의 토대와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이향순(1996)은 「민주주의와 도덕 사회: 또끄빌과 뒤르케임의 비교」라는 글에서 “문제는 민주주의에 배치되는 행정적 중앙집중화가 일어나기 쉬운 사회는 평등화가 가장 진전된 민주적인 사회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당치 않게도 행정의 중앙집중화는 민주주의와 강력한 친화력을 가진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선, 평등화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통치는 법치주의인데, 법치주의란 어떠한 특권이나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법률을 비롯해서 행정과 통치를 적용하는 획일주의를 의미한다.…결과적으로 평등이 진전되면 자연적으로 평등한 개인들에게 차별 없이 획일적인 정책과 행정을 펴는 유일의 강력한 정부가 등장한다. 말하자면 ‘하나의 주인 밑에서 모두가 평등한 하인으로 사는’ 것을 선택하는 민주사회 성원들의 자연스런 속성의 결과가 행정의 중앙집중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평등한 사회에서 개인은 고립되어 있으며 개별화된 개인으로서는 무력하기 때문에 공적인 일보다는 사적인 일에 관심을 갖게 되며 공적인 일은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유일하고 내구적인 기구, 곧 국가에 맡겨버린다. 더욱이 평등한 사회의 성원들은 공적인 일에 대한 자연적인 취향이 결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실 사적인 일에 너무나 몰두해 있고 바빠서 공무에 관심을 가질 만한 시간적인 여유나 정열이 남아 있지 않다.”

행정의 중앙집중화가 평등주의·민주주의와 강력한 친화력을 갖는다는 게 흥미롭지 않은가. 한국의 자랑할 만한 강력한 평등주의가 초강력 중앙집중화의 원인일 수도 있다는 점은 지방분권이 앞으로도 말처럼 쉽지 않으리라는 걸 예감케 한다. 게다가 우리는 ‘정부’와 ‘행정’을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둘이 뒤엉켜 있다고 보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토크빌은 ‘마음의 습속(mores)’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음의 습속’은 ‘삶의 가치관’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해 이야기만 했다 하면 주로 제도와 법만 물고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 제도와 법만 제대로 만들면 민주주의와 정치가 선진화되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정치인이 달라져야 정치가 달라진다고 생각하지만, 유권자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이와 관련, 진덕규(1996)는 「알렉시스 드 또끄빌을 찾게 되는 시대 상황」이라는 글에서 “지배층의 권력구조 재편만이 주기적으로 일어날 수 있고 그것을 위한 국민의 투표가 행해질 수 있다면 그만이라는 식의 민주주의적 인식은 사실상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자유와 평등의 인간화 실현과는 배치되는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배층에게 민주주의는 책임과 헌신 그리고 지도성의 능력에 대한 국민적 검증이 필요하지만 민주주의는 피지배층에 대해서도 똑같은 요구를 하게 된다. 그것은 자율성과 책임성에 입각한 시민의식과 질서와 안전을 이룩하기 위한 절제와 협동이 실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민주주의적 공동체와 지방자치제도는 서로 구분되는 것이다. 지방자치제도는 또 다른 의미에서 중앙집권제도의 복사판일 뿐이다. 선거에 의해서 대표를 뽑고 그 대표가 그 지역의 행정을 책임지므로 어느 의미에서는 피지배층으로 하여금 지역사회에까지 새로운 지배자를 억지로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적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질 수 있는 참여적 정치 제도를 의미한다.”

역설 같지만, 한심한 정치에 대해 ‘정치인 탓’을 하는 것만큼 정치를 망치게 하는 것도 없다. ‘정치인 탓’은 “모든 걸 정치인들에게 맡겼으니 정치인들이 잘해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그렇게 해선 안 되더라는 걸 반세기 이상 경험해왔으면 이젠 발상의 전환을 해볼 때도 되지 않았나. 우선 언론부터 ‘정치인 탓’을 하는 선전·선동을 중단하고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질 수 있는 참여적 정치 제도’의 건설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국내자건 국외자건 누가 썼건 토크빌의 저서를 능가할 수 있는 수준의 『한국의 민주주의』라는 책은 나와 있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한 번쯤 던져볼 만한 질문이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09년 12월 호에 실렸습니다.


<참고문헌>
김봉중, 『미국은 과연 특별한 나라인가?: 미국의 정체성을 읽는 네 가지 역사적 코드』, 소나무, 2001.
박홍규,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 한국 인문학의 왜곡된 추상주의 비판』, 글항아리, 2008.
이향순, 「2. 민주주의와 도덕 사회: 또끄빌과 뒤르케임의 비교」, 김성건 외, 『알렉시스 또끄빌을 찾아서: 민주주의와 ‘마음의 습속’에 대한 사상』, 학문과사상사, 1996.
조지형, 『헌법에 비친 역사: 미국 헌법의 역사에서 우리 헌법의 미래를 찾다』, 푸른역사, 2007.
진덕규, 「1. 알렉시스 드 또끄빌을 찾게 되는 시대 상황」, 김성건 외, 『알렉시스 또끄빌을 찾아서: 민주주의와 ‘마음의 습속’에 대한 사상』, 학문과사상사, 1996.
앨런 브링클리(Alan Brinkley), 황혜성 외 공역, 『미국인의 역사』 (전3권), 비봉출판사, 1998.
케네스 데이비스(Kenneth C. Davis), 이순호 옮김,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 책과함께, 2004.
폴 존슨(Paul Johnson), 김욱 옮김, 『위대한 지식인들에 관한 끔찍한 보고서』, 한·언, 1999.
로버트 케이건(Robert Kagan), 홍수원 옮김, 『미국 vs 유럽 갈등에 관한 보고서』, 세종연구원, 2003.
데이비드 로웬덜(David Lowenthal), 김종원·한명숙 옮김, 『과거는 낯선 나라다』, 개마고원, 2006.
루터 S. 루드케(Luther S. Luedtke), 「미국 국민성의 탐색」, 루터 S. 루드케(Luther S. Luedtke) 편, 고대 영미문학연구소 옮김, 『미국의 사회와 문화』, 탐구당, 1989, 13~45쪽.
디트리히 뤼시마이어(Dietrich Rueschmeyer) 외, 박명림·조찬수·권혁용 옮김,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비교역사 연구』, 나남출판, 1997.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임효선·박지동 옮김, 『미국의 민주주의』 (전2권), 한길사, 1997.

기사입력: 2009/11/23 [18:32]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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