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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사회에선 '링컨 예찬'만 난무하나
[강준만의 세상이야기] 딜로렌조의 『링컨의 진실』, 다양한 시각 제공
 
강준만
미국에선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에 관한 책이 1만 6000권이나 된다고 한다. 이 책 중 상당수는 ‘링컨 신화’ 만들기 용이다. 가장 대표적인 신화 중의 하나가 링컨이 가난하게 자랐다는 것인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링컨의 아버지는 지역사회에서 납세자 순위 15% 안에 드는 부자였다는 것이다. 하기야 대통령을 가난뱅이 출신으로 만드는 건 미국의 오랜 전통이다. 그런 정도의 신화는 얼마든지 눈감아줄 수 있지만, 눈감아주기 어려운 것도 있다.

미국의 경제사학자 토머스 J. 딜로렌조(Thomas J. DiLorenzo)의 『링컨의 진실: 패권주의-위대한 해방자의 정치적 초상』(남경태 옮김, 사회평론, 2003)은 링컨 신화에 정면 도전하는 책이다. 원래 경제로 보는 역사는 다른 법. 그런데 딜로렌조는 그런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더 깊이 들어간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링컨은 노련한, 아니 영악한 일류 변호사였다. 1837년부터 1860년까지 수천 건의 사건을 처리해 1850년대 연평균소득이 당시 일리노이 주지사의 3배에 이르렀다. 그의 의뢰인 중에는 나중에 세계 최대의 철도회사로 성장한 일리노이 센트럴 철도회사도 있었다. 그는 주로 돈 되는 사건만 맡았고, 23년간의 변호사 생활에서 노예 소유주를 변호한 적은 있지만 도망친 노예를 변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링컨은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원했던 알렉산더 해밀턴의 정치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링컨이 대통령 재임 시 정치체제를 더욱 중앙집권화하고, 보호관세의 재원으로 기업 보조금을 지급하여 경제개발을 이루고, 중앙정부가 화폐를 발행할 계획을 세운 것 등은 바로 그 전통에 따른 것이다. 이 모두가 미국 탄생 후 70년간 못했던 일인데 링컨 집권 2년 동안에 이루어졌다. 그런 업적을 반기는 이들에게 링컨은 영웅이겠지만, 반기지 않는 이들에게 링컨은 악당인 셈이다. 물론 머릿수로만 보자면 전자의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링컨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두말할 필요 없이 노예 해방이다. 그러나 링컨 개인은 인종 차별주의자였다. 1858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 때 휘그당에서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긴 링컨의 상대는 민주당의 거물 스티븐 더글러스였다. 링컨은 더글러스와의 토론에서 “노예를 해방시켜 우리와 정치적․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만든다고요? 내 안의 감정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 우리는 그들과 동등해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링컨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거야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서 한 말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엔 그 빈도수가 너무 많았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미국의 유명 잡지 『에보니(Ebony)』 편집장 레렌 베넷 주니어는 2000년에 출간한 『꾸며진 영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854년에서 1860년까지 적어도 열네 차례나 링컨은 흑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혔다. 게일즈버그에서는 ‘열등한 인종’이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했다. 누가 ‘열등한 인종’인가? 이 물음에 대해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자신이 ‘잡종’이라고 부르는 멕시코인이라고 대답했는데, 아마도 유색인종 모두를 가리킨 듯하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 흑인 노예들을 미국 바깥으로 내보내는 이른바 ‘식민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에 노예제 폐지론자인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은 링컨이 이주를 통해 미국을 백인의 나라로 만들고자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링컨 대통령은 원한다면 차라리 그 자신이 이주해도 좋다. 그러나 그가 자기 못지않게 선량한 사람들을 제거하려는 행위는 정말 뻔뻔스러운 짓이다. …… 링컨의 핏줄 속에는 노예제를 반대하는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다.”
 
개리슨은 특히 링컨이 백악관에서 자유 흑인 지도자들을 만나 흑인의 국외 이주를 선도해달라고 부탁한 것에 대해 분노했다. 그는 링컨을 ‘아프리카 식민지의 대통령’이라고 부르면서 그 회의를 ‘수치스럽고 뻔뻔한 짓거리’라고 공격했다.

‘남북전쟁 시 북부는 노예제에 반대했고, 남부는 노예제에 찬성했다. 고로 북부 사람들이 남부 사람들보다 인종적 편견이 덜하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1831년 프랑스의 지식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미국을 여행하고 나서 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인종적 편견은 노예제가 계속 존재하는 주보다도 폐지된 주에서 더욱 강도가 심한 듯하다.
 
또한 가장 편견이 심한 곳은 노예제를 전혀 알지 못하는 주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토크빌은 흑인들이 사는 모든 지역에서 흑인을 차별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일반 대중의 편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이는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주장이지만, 북부의 흑인 차별 역시 심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무방할 것이다. 실제로 링컨의 고향인 일리노이주를 포함한 몇몇 북부 주들은 법을 고쳐 흑인이 자기 주에 들어와 살지 못하도록 금지하기까지 했다.

남북전쟁이 시작된 지 20개월 만인 1863년 1월 1일 링컨은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했다. ‘위대한 선언’으로 예찬받는 선언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영 수상쩍다. 이미 연방 통제하에 있는 지역(테네시, 웨스트버지니아, 남루이지애나)을 제외한 모든 남부연합 지역의 노예들에게만 적용되는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연방에서 탈퇴한 적이 없는, 그래서 대통령의 전쟁 권한이 행사될 수 없는 경계 지역 노예들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 선언은 즉각 북부 전역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정치적 속임수라는 비난을 받았다. 조지프 퓰리처의 『뉴욕월드』(1863년 1월 7일자 사설)는 “이 선언에서 말하는 자유란 현실적인 자유가 아니라 잠자고 있는 자유일 뿐”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통령은 우리가 군사적으로 장악하고 노예들을 이용할 수 있는 지역에서는 선언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선언을 작성했다. 선언을 실제로 집행할 힘이 없는 지역만을 대상으로 해방선언을 한 것이다. 루이지애나, 테네시, 버지니아에서도 점령한 지역들이 선언에서 누락된 것은 선언이 전혀 실효성 없고 터무니없는 것임을 말해주는 사실이다.”

잡지 『새터데이 리뷰(Saturday Review)』는 선언이 “링컨이 주창하는 대의를 완전히 파괴하는 범죄”라고 비난했다. 영국 『런던 스펙테이터(London Spectator)』지는 “선언의 원칙은 인간이 인간을 소유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미국에 충성하지 않으면 인간을 소유할 수 없다는 데 있다”고 비꼬았다. 심지어 링컨의 국무장관인 윌리엄 시워드조차 “우리는 우리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는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정작 우리의 관할 아래에 있는 노예들은 묶어둠으로써 노예제에 관한 동정심만을 과시했을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남북전쟁은 만 4년간에 걸쳐 62만 명의 전사자를 낳은 참혹한 전쟁이다. 전쟁은 불가피했던가? 딜로렌조는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들어 전쟁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영국에선 6년간에 걸쳐 1840년까지 모든 노예를 해방시켰다. 영국 정부는 노예 소유주들에게 노예 가격의 시가 40%에 해당하는 금액을 보상하는 방식을 취했다. 다른 나라들도 노예해방을 평화롭게 이뤘다. 아르헨티나(1813년), 콜롬비아(1814년), 칠레(1823년), 중앙아메리카(1824년), 멕시코(1829년), 볼리비아(1831년), 우루과이(1842년), 프랑스 및 덴마크령 식민지(1848년), 에콰도르(1851년), 페루(1854년), 베네수엘라(1854년) 등이 영국의 뒤를 따랐다. 남북전쟁 기간과 그 이후에도 네덜란드 식민지(1863년), 브라질(1871~1978년), 푸에르토리코(1873년), 쿠바(1886년) 등지에서도 노예해방은 평화롭게 이루어졌다. 딜로렌조는 “노예제는 얼마든지 평화롭게, 적은 희생과 땀으로 종식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막대한 전쟁 비용, 62만 명의 전사자, 수만 명의 남부 민간인 사망자, 수십만 명의 평생 장애인이 발생한데다 국가경제의 거의 40%가 파괴되고 전쟁 자체의 직접적인 피해도 만만치 않았음을 감안한다면, 대다수 미국인은 보상을 통한 해방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전면전에 비해 훨씬 적은 희생으로도 노예제가 종식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링컨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주지 않았다.”

물론 이 주장은 결과론의 소지가 있다. 링컨은 빠르면 몇 주, 늦어도 몇 개월 내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낙관했다는데, 전쟁의 그런 참혹한 결과를 예상했겠는가. 게다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노예 의존도가 워낙 높았던 미국의 특수성을 참작해야 하리라. 그러나 딜로렌조의 다음 말은 가슴에 와 닿는다.

“링컨은 왜 노예제가 존재하는 지구상의 다른 나라들이 19세기에 취한 것과 같은 해방의 경로를 걷지 않았을까? 그 대답은 그 자신의 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는 노예 해방을 특별히 지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해방을 단지 자신의 실질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여겼다. 그 목표한 국가권력의 공고화, 즉 많은 미국인이 건국 시기부터 걱정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딜로렌조는 ‘전쟁유도론’을 편다. 왜? 무엇 때문에? “링컨은 통합적이고 집중화된 국가, 즉 제국을 창설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링컨이 전쟁을 유도했건 유도하지 않았건, 남부의 북부에 대한 구체적인 불만은 관세 문제였다. 당시 제조업의 기반이 약했던 남부는 공산품 대부분을 북부나 유럽으로부터 수입했는데, 연방 수입의 주요 원천은 관세 수입이었다. 1860년 무렵 남부의 주들은 총 관세의 80%를 담당했지만, 관세 수입의 대부분은 북부의 도시, 철도, 운하에 투입되었다. 자신들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느낀 남부인들은 1860년 대선기간에 링컨이 관세율 인상을 공약하자 연방에서의 탈퇴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또한 링컨이 집권하기 전 북부 주들은 의회를 움직여 조선업의 법적 독점권을 따냈는데, 그 때문에 외국에서 생산된 선박을 미국으로 수입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남부의 해운 운송비는 더욱 늘어났다. 외국 해운업자가 미국 내 해운업자보다 더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북부인들은 연방 덕택에 부를 증대할 수 있었으므로 그들이 연방을 소리 높여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남부인들에게 연방은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남부의 신문 『빅스버그 데일리 휘그』(1860년 1월 18일자)는 “북부는 남부를 희생시키면서 엄청나게 거대해지고 있다”며 “북부는 온갖 과세를 부담시켜 우리를 가급적 파멸시키지는 않으면서 최대한도로 착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북부의 신문들은 북부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데일리 시카고 뉴스』(1860년 12월 10일자)에 따르면, “남부는 전국 수출량의 4분의 3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남부의 수출량은 총 수출량의 72%였다. …… 우리의 관세는 우리 제조업자들의 30~50%를 보호해주며, 남부 면화의 대부분을 소비할 수 있게 해주고, 국내 시장에서 유럽의 숙련 노동자들과 경쟁할 수 있게 해준다. 그 결과 남부는 우리의 숙련 노동자들에게 매년 수백만 달러씩 간접적인 보조금을 주는 셈이다.” 이어 이 신문은 관세율을 낮추게 되면 일어날 일을 경고했다. “우리의 노동자들은 유럽 노동자들과 경쟁할 수 없다. …… 해운에서 우리가 거두는 이익은 대부분 남부인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며, 파산과 파멸이 매우 광범위하게 일어날 것이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남북전쟁은 본질적으로 ‘돈 놓고 돈 먹기 싸움’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노예 문제가 부수적으로 끼어들었다는 게 딜로렌조의 논지다. 링컨은 반대파를 탄압한 독재자였다는 주장도 그 논지의 보강을 위해 제시된다. 링컨 시대에 약 1만 3000여 명의 정치범이 군대 감옥에 갇혔다. 전쟁에 반대하는 신문들은 당시 신문배포의 주요수단이었던 우편배달이 거부되었으며, 연방군 병사들은 수십 군데의 신문사를 폐쇄하고 인쇄기를 파괴했다. 1962년 평론가인 에드먼드 윌슨은 독재권력을 행사하면서 고도로 집중화된 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링컨을 레닌이나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비유했다.

반면 고도로 집중화된 체제를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링컨에 대해 호의적이다. 링컨의 독재를 전시 중에 불가피했다고 보는 역사학자들은 링컨에게 ‘선량한 독재자’ ‘자비로운 독재자’ ‘위대한 독재자’ 등의 타이틀을 붙였다. 링컨 숭배자인 제임스 포드 로즈는 “독재권력이 그보다 더 안전하고 고결한 사람의 손에 쥐어진 경우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링컨이 인디언에게 무자비했다는 점도 노예해방에 관한 링컨의 진정성을 믿을 수 없는 증거로 제시된다. 1851년 미네소타의 샌티 수족 인디언은 2400만 에이커(1에이커는 약 4047㎡)의 땅을 141만 달러를 받고 연방정부에 팔았으나 정부의 부패가 워낙 심해 돈을 못 받았다. 1862년 8월 백인 수천 명이 이미 몰려와 살고 있는데다 채무 이행을 거절한 연방정부가 인디언과의 또 다른 조약마저 파기하자 수족은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10월에 진압되었고, 303명의 인디언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 선고자는 나중에 39명으로 줄었는데, 링컨은 1862년 12월 26일 이들의  처형을 지시했다. 링컨 정부의 인디언 탄압은 하워드 진의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궁리, 2008)에도 나오는데, 흥미로운 건 하워드 진이 링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남북전쟁 기간에 역사에 기록될 중요한 사실이 빠져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남북전쟁 기간에 미국 역사에서 그 어느 시기보다 많은 땅을 인디언들로부터 강탈했다는 사실입니다. 거의 모든 남북전쟁사가 북군이 남부에서 남부연방군과 싸우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 또 한 무리의 북군이 서부로 진출해 인디언들로부터 땅을 빼앗았다는 사실은 외면합니다. 1864년 목사이기도 했던 쉬핑턴 대령은 군대를 이끌고 콜로라도의 샌드 크리크로 진출하여 수백 명의 인디언을 학살했습니다. 이 같은 인디언 학살은 미국 역사에서 거듭 일어났습니다.”

인디언 학살의 이면엔 철도자본과의 결탁이 있었다. 전쟁 중임에도 상원과 하원은 1862년 6월 태평양철도법을 통과시켰다. 예정된 철도 노선이 남부를 지나가지 않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남부가 강력히 반대했던 법이었다. 의회는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고 통제하면서 진행은 유니언퍼시픽과 센트럴퍼시픽의 두 철도회사가 맡는 형식으로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하는 데 수백만 달러의 지출을 비준했다. 한 달 후 링컨은 소득세 법안에 서명했다. 1만 달러 이상의 소득에 대해 10%를 과세한다는 내용으로, 이것 역시 남부가 강력하게 반대한 것이었다. 이 법은 1872년에 폐지되었으나 선례로서 소득세가 뿌리를 내리는 데 기여했으며, 법 제정 무렵 재무부 내에 국세청이 창설되는 근거가 되었다. 소득세 법안 통과에 반대한 어느 상원의원은 “정부는 모든 것이다. 이제 정부는 목적 자체이고, 국민의 재산, 노동, 노력, 소득은 정부가 계속 존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더욱이 정부의 힘은 계속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1865년 4월 남북전쟁이 끝난 후엔 북군의 인디언 사냥이 본격화되었다. 딜로렌조는 “남군의 리 장군이 항복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평원 인디언을 상대로 한 전쟁이 개시되었다는 사실은, 남부의 인종차별 때문에 북부인들이 그렇듯 길고 파괴적인 전쟁을 벌였다는 주장을 또다시 의심스럽게 만든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군과 인디언은 둘 다 대륙횡단철도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은행 제도를 국유화하고, 보호관세를 유지함으로써 북아메리카 경제제국을 건설하려는 휘그당/공화당의 꿈을 방해하는 걸림돌이었다. 따라서 그 두 집단은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정복되고 진압되어야 했다. 미국 국가의 성격은 순식간에 크게 바뀌었다. 건국자들이 수립한 국가는 시민의 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주요 책무로 삼았지만, 이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를 짓밟고 헌법을 무시하는 짓도 서슴지 않는 팽창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열강이 된 것이다. 집중화된 권력에 대해 주들이 제동을 걸 수 있는 권리가 폐기되자 그 과정은 탄탄대로에 올랐다.”

딜로렌조의 결론은 “링컨과 공화당은 분명히 대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집중화된 정부와 제국의 추구라는 대의였다”는 것이다. 링컨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의 세계적 영광을 부르짖는 국가주의자들에게 링컨은 영웅이다. 그러나 그런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이들, 그리고 역사적 왜곡을 뒤집어쓴 채 한(恨)을 이어받은 일부 남부인들에게 링컨은 고약하거나 혐오스러운 인물로 여겨질 수밖에 없으리라.

딜로렌조의 주장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일 건 아니다. 남부적 관점의 색깔이 강하다. 남부적 관점은 패배자이자 약자의 관점이라는 점에서 존중은 받아야겠지만, 조심스럽게 대할 필요는 있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남부나 북부가 거기서 거기라고 하더라도 노예제를 유지하겠다는 남부의 작태를 곱게 보아주긴 어렵지 않겠는가. 다만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딜로렌조의 주장이 일반적인 ‘링컨 예찬론’보다는 진실에 더 가깝다는 점이리라. 특히 한국에서 난무하는 ‘링컨 예찬론’은 보기에 민망한 점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시각을 골고루 섭취하는 게 좋을 것 같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09년 11월 호에 실렸습니다.


기사입력: 2009/10/26 [17:11]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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