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초순, 나는 이 매체에서 민주노동당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논의를 '조건부 연정론'으로 받아치라고 주문하였다. 정당체계의 형성과 정당간의 기준에는 뚜렷하고 고정된 법칙이 없으므로 균열이든 연합이든 필연적이다. 정당은 꼭 집권을 하지 않아도 강력한 항의를 조직하는 이의집단으로 존재할 수 있고, 거꾸로 공동집권전략에 응하여 중단기적 강령을 실현할 수도 있다. 당시 나는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의 연정이, 사실상 불가능하겠지만, 그 가능성과 경로를 두고 논의하는 일만큼은 가치가 있다 여겼다. 물론 당시 정부여당의 꾸준한 우경화 덕택에 토론의 불씨는 저절로 꺼졌지만 말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또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새로운 정부여당이 폭주를 시작했고, 그럼에도 그 지지율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아마도 정권교체시부터 민주당과 진보 진영간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지론이 수면 아래서 꿈틀거렸을 것이다. 분열한 진보정당들도 타산이 복잡했을 것이다. 속마음 같아서는 상대를 꺾고 자신이 진보의 대표자로 올라서길 빌었겠으나, 자신 또는 양쪽 모두 찌그러지는 사태를 막고도 싶었을 것이다. 정당연합론의 대두는 필연적이었다. 그런데 전제와 방식이 글렀다. 가치의 합의가 아니라 선거공학에 경도되었다. 나는 그 흐름에 치어 결국 올 4월 진보신당을 탈당했다. 나는 가치연대를 빼놓은 선거단일화 시도에 반대했다 나는 민주당 후보라고 해서 손잡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한미FTA철회, 불안정노동 타파, 반전평화, 악법폐지, 선거제도개혁을 관철시키는 적극적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난 총선 덕양갑에서 진보신당 심상정 후보와 민주당 한평석 후보가 시도한 단일화는 그저 플레이오프에 지나지 않았다. 대운하반대나 지역 발전 등이 단일화의 명분으로 급조되었지만, 그렇게 친다면야 민주당과 진보신당은 전국적으로 단일화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덕양갑 단일화를 반대하는 도중 나는 상당수 당원들에게서 장강론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음을 알아차렸다. 장강론이란 한나라당과 김대중-노무현-민주당 틈에는 샛강이 흐르고, 이 두 세력과 진보정당과의 사이에는 장강이 흐른다는 용감한 이야기다. 자본주의 모순의 혁파와 한국사회의 이념지형을 모두 고려하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터져나올 기미도 보였던 장강론은, 이제 승리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뗏목을 타고 장강을 건널 수 있다는 태도로 뒤바뀌었다. 도리어 단일화 반대, 조건부 단일화를 내세운 내게 “골방운동권” “좌파 선비질”과 같은 딱지가 붙여졌다. 사회주의를 떠드는 당내 세력도 다를 바 없었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이왕 저질러진 일, 끝난 뒤에 제대로 평가하자”, “잘 모르겠다”고 넘어갔다. 그나마 덕양갑 단일화는 불발에 그쳐 불행중 다행으로 여기고 그럭저럭 넘어갔다. 그러나 올봄 울산북구 재보선에서 나는 또다시 단일화 반대에 나서야 했다. 진보신당의 후보는 조승수였고 민주노동당의 후보는 김창현이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간극은 결코 진보신당과 민주당 간의 거리보다 더 가깝지 않다. 민주노동당에서 북핵비판성명을 부결시키고 일심회 해당행위자들을 호위한 이들은 단순한 구좌파나 민주적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올해 또다시 북핵문제를 얼버무리며 넘어간 당론에서 알 수 있듯 민노당의 소위 NL파는 친핵 나아가 반평화론자들이다. 김창현은 다름아닌 그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실제로 민노당에서 조승수에게 극단적인 거부감을 표한 것처럼, 진보신당의 많은 당원들도 김창현에 대해 형언하기 힘든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준플레이오프는 가치연대로, 플레이오프는 선거공학으로? 하지만 양당과 두 후보는 물과 기름과 같은 상이함을 놔두고, 또 기세 좋게 꺼내들던 공격까지도 접어든 채 단일화에 들어섰다. 가치 논쟁은 역시 없었다. 덕양갑 단일화 당시처럼 여론조사의 룰을 놓고 공방을 벌일 뿐이었다. 민주노동당은 포기한 정당이라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진보신당이었다. 덕양갑과 울산북에서 덜컥 개시한 단일화는 오로지 ‘우리는 2등이니 3등이랑 단일화를 하여 1등을 이기겠다’는 계산을 따랐다. 나는 이것이 혹 ‘예전 대선이나 총선에서 단일화를 하지 않은 건 우리가 3등 이하였기 때문’, '우리가 질 것 같은 단일화는 절대 안한다'는 소리는 아닌가 싶어 실소가 멎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설득을 포기하고 정당을 떠났다. 선거용 정당연합의 한 축, 반한나라당 진보 분국으로서나 기능하는 정당은, 선거에서 상대평가에 따라 지지할 수는 있어도 당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원할 수는 없었다. 안산 상록을에서 또다시 단일화가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올발랐다. 나는 진보신당의 임종인 지지에 찬성하였다. 어차피 진보신당은 안산상록을에 독자 후보를 내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양보하거나 또는 단일화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임종인 의원은 열린우리당 재직 시기에도 마치 진보정당의 대표자처럼 움직였기에 덕양갑, 울산북 단일화와는 차원이 다른 가치연대를 실현할 수 있었다. 진보신당은 이번에는 정책 조건을 걸었는데, 역시나 임종인은 합의했다. 여기에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이 후보를 내지 않고 선거를 거들겠다고 나섬으로써 사실상의 연합공천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이 4자연대는 민주당과의 플레이오프를 대비한 준플레이오프였을까. 임종인은 무턱대고 민주당 김영환 후보와의 단일화에 들어갔다. 이념과 정책에서 임종인과 친화적인 윤석규 예비후보가 공천을 받았다면 그렇게 해도 무방했을 것이다. 물론 김영환측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예전에 사과했으며 한나라당을 기웃거린 적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의 정책노선은 제대로 확인된 적이 없다. 그와 함께 덜컥 단일화에 돌입한 순간 진보 후보로서 임종인의 정체성은 트릿해진다. 큰 승부에서 참패하는 정확한 길로 가고 있다 가치연대와 정책연합은 제쳐두고 덕양갑, 울산북에서처럼 임종인과 김영환은 단일화 여론조사의 룰을 갖고 공방을 시작했다. 한국 진보정치의 대표 주자임에도 무원칙한 단일화에 응하거나 나선 심상정, 조승수, 임종인, 노회찬, 강기갑. 진보정치는 개점휴업에 들어간 것일까? 다음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정권을 잃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보다 더 서민과 복지에 가까운 정부가 출범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민주당의 진보화와 진보정당의 이슈 파이팅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연합이다. 하지만 지난 총선부터 이번 재보선까지, 이를 공식화하여 박아두고 실질적으로 이뤄내는 사업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다음 대선에서 민주당은 그 모양 그 꼴로 뉴민주당플랜에 빠진 채 대충 통합대오나 형성해 참패할 것이며, 진보정당은 ‘이번에는 3등 이하니까’라는 심정으로 장강론을 편들 그동안 단일화를 벌이며 가담한 반MB연대에 제 밑천을 홀라당 바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 이번 안산 상록을 선거를 앞두고 분명히 일러둔다. 임종인 후보는 여론조사 이전에 김영환 후보와 정책연합을 주제로 뜨거운 논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민주당이 변화하지 못한다면 그 일부 인사들이라도 진보적으로 견인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단호히 선을 그어야 한다. 군소3개 정당에도 고한다. 3당연합공천을 해놓고 삼자구도에서 기껏 들러리를 서며 민주당과의 단일화에 휘말려든다면, 다음 대선은 셋 모두 3%이하다. 이른바 3.3.3법칙이다. 그리고 민주당, 부끄러운 줄 알라.
추신: 필자는 노무현 정부의 보수화와 개혁 후퇴에 사죄하면서 이 지면을 떠난 바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에 이어 진보신당 활동을 시작했지만 위에서 밝혔듯 끝내 탈당하고 말았으며, 수구세력의 지향과 요구를 집권기간 대거 들어준 결과답지 않은 노대통령의 죽음으로 어쩌면 상처가 더 크게 남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진보정치의 긴 싸움에 나선다는 각오로 다시 작은 한걸음을 뗍니다. 당적 같은 것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을 것입니다. 예전처럼 자주 기고하지는 못하겠지만 일단 조금씩 힘나는대로 '아마추어 평론가'로서 독자들을 만날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글쓰기가 숱한 동료 시민 필자의 등장에 이바지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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