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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一世紀映畵讀本] 이재수의 亂
 
박수철   기사입력  2002/03/19 [17:00]
{IMAGE1_LEFT}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를 원작으로 하는 박광수 감독의 영화 '이재수의 난'은 감독 자신의 6번째 영화이다. '칠수와 만수', '그들도 우리처럼', '베를린 리포트', '그 섬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거쳐 나온 '이재수의 난'은 그 전 영화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또한 지금까지 박광수 감독 영화의 한 획을 긋는다. '칠수와 만수'에서의 옥상,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섬, '그들도 우리처럼'의 탄광촌처럼 '이재수의 난'의 제주도는 여전히 갇혀 있는 곳이고,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의 공간이다. 그 속에서 영화는 그러한 갇힌 영화적 공간에서 리듬을 타듯 그곳의 사람들과 힘겨운 춤을 춘다. 박광수 감독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감독 자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전태일을 바라보는 지식인 영수를 찾을 수 있었듯이, '이재수의 난'에서는 이재수를 바라보는 채군수(명계남 役)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유사성을 갖고 영화는 외딴 제주에서 힘겨운 사람들과 함께 지금 현실을 조용히 이야기한다.

{IMAGE2_RIGHT}박광수 감독의 리얼리즘은 이상하다. 분명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면서도 원작에 무게를 두지 않고, 감독 자신의 상상력에 의해 현실과 상상을 오간다. 철저한 사실주의인 듯 하면서도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완전한 사실주의는 아니다. 중요한 장면에서는 감독의 의도와 영화가 춤을 추듯 현실을 벗어나며 또 어느 새인가 현실에 다가와 있다. 이렇게 영화는 역사적 사실과 환상, 그리고 지금의 현실을 자유롭게 오간다.

'이재수의 난'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극중에 나오는 까마귀와 지식인 채 군수이다. 까마귀는 영화 중간중간 때로는 감독의 눈이 되었다가 때로는 관객이 눈이 되었다가 때로는 전지적 시점이 되었다가, 때론 영화에서 관찰자 노릇을 하는 채군수와 겹치기도 한다. 그러면서 영화를 관찰하며 정말 삶이란 무엇인가, 때로는 우리는 지금 그때의 제주도에서의 삶들과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가 조용히 물어본다. 지금 이곳 1999년의 한국에서 우리는 1901년의 제주와 얼마나 다르게 살고 있는가. 이러한 점은 '이재수의 난'의 내러티브의 중첩성에서도 잘 나타난다. 교당과 민당 측의 대립에서 초반부의 교당 측과 후반부의 민당 측은 어딘가 닮아 있다. 이 영화에서 좋고 나쁨, 선악의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현실의 무게이고, 또 다시 그 무게감이 우리에게 안겨 주고 있는 암담함이다. 조용히 물어본다. 역사는 과연 진보하고 있는가. 아니 스스로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겠지.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의 진보에 어떠한 노릇을 하고 있을까. '이재수의 난'의 내러티브는 흔히 빠지기 쉬운 민족주의와 외세 배격, 그리고 민중이라는 달콤한 틀의 대립을 과감히 취하지 않고 있다. 그러기에 영화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얼마나 내러티브를 관객이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얼마나 관객이 극중 인물
들과 같은 호흡을 느낄 수 있는 가 하는 점이다.'

이재수의 난'의 배경이 된 제주도는 여전히 아름답다. 박광수 감독의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카메라의 움직임과 롱 테이크는 마치 미클라우 얀초['붉은 시편'의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박광수 감독의 그전 영화와 달리 군데군데 들어가 있는 클로즈업은 생경함과 함께 또 다른 힘을 묘하게 알 수 있다. '이재수의 난'은 이렇게 박광수 감독의 예전 영화들과 함께 느끼는 영화이다. 그리고 1901년의 제주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동시에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아쉬운 점은 배우들의 연기가 조금 더 무르익었으면 관객들에게 조금은 더 이해하기 쉽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자. 그리고 어색하게 쓰는 제주도 사투리는 계속해서 귀를 어지럽힌다.

한편 이 영화를 평가하는 각 언론들의 문화부 기자들과 몇몇 영화 평론가들에게 아쉬운 점은 이 영화보다 몇 배 더하다. 평소에도 그들이 별 몇 개를 가지고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이 영화를 평가하는 기자들의 노력하지 않음은 정말 뭐라 설명하기 힘들다. 조금만 더 영화에 대해 신경을 쓰고, 현기영의 원작 소설도 읽어보고, 박광수 감독의 예전 영화도 리뷰했더라면 좀 더 나은 영화 소개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한국에서 '쉬리'같이 흥미로운 영화만 있으면 評하기 좋겠지만 그런 영화들만 있는 한국 영화계는 또 얼마나 진부할 것인가. 한국 몇몇 언론들의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무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또 한번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 본 글은 대자보 16호(1999.7.12)에 발표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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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3/19 [17:0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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