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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이 ‘양’이면 목회자는 ‘개’인가?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목자와 양은 ‘목사와 교인’아닌 ‘예수와 그의 백성’
 
류상태   기사입력  2009/10/05 [17:15]
3년 전 쯤으로 기억합니다. 서른 전후의 젊은 전도사와 짧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느 직장선교회 예배모임에서 젊은이는 찬양인도를, 저는 설교를 맡고 있었지요.

모임이 시작되기 조금 전, 젊은이가 자신이 겪은 불쾌한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인을 ‘양’이라 부르고 자신을 ‘목자’라고 칭하는 그는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는 교인들의 무례한 태도에 대해 성토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무례한 양들’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오고 있었지요. 

하지만 저는 젊은이의 말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모진 말로 그를 힐난하고 말았습니다. 성서 구절을 인용하며 교인을 양이라 부르는 그의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다음 본문은 그 때 젊은이에게 인용했던 요한의 복음서 21장 15~17절입니다.

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예수께서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예수께서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셨다.  
 
▲ (자료사진)     © CBS노컷뉴스

‘양과 목자’의 비유는 히브리성서(구약성서)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는 이런 익숙한 구도를 사용하여 지도자의 책무가 중요함을 제자 베드로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서를 읽는 독자도 예수께서 ‘양과 목자’의 구도를 사용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오래도록 가르쳐 온대로 양은 교인을, 목자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목회자를 지칭한다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의 메시지는 명료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양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는 ‘네 양’이 아니라 ‘내 양’이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 너의 양을 돌보아라.”가 아니라 “나의 양을 돌보아라.”입니다. 

이 본문에서 견고하게 접목된 목자와 양의 관계는 ‘예수와 그의 백성’입니다. 베드로는 이 견고한 연대의 바깥에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굳이 베드로의 자리를 찾는다면, 그는 두 주인공인 ‘예수’와 ‘그의 양’ 사이에서 그들의 돈독한 관계유지를 위해 일하는 조연일 뿐입니다. 좀 더 사실적으로 묘사하면, 베드로의 역할은 이 목장의 드라마에서 목자와 양의 사이에 위치하여 양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돕는 개에 비견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본문의 예수가 사용한 ‘나와 내 백성’ 구도의 원형은 히브리성서에 너무나도 익숙하게 자주 사용되는 ‘하느님과 그의 백성’의 구도입니다. 하느님과 그의 백성은 성서의 두 축이며 주인공입니다. 물론 성서에는 그들의 돈독하고 바른 관계를 위해 일하는 중계자가 있습니다. 왕과 사제, 그리고 예언자입니다. 

권력과 명예, 그리고 백성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 기자들은 그들을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는 사람, 주인이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 주인들(하느님과 그의 백성)을 섬기고 또 섬겨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면 ‘종’의 자리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종의 정체성을 찾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찾기는 찾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종’이라는 말을 곧잘 쓰니까요.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자리에 있음을 뜻하는 ‘종’이라는 말이 존칭어가 되어 ‘종님’이 되었습니다. ‘종님’이라는 말에서는 진정한 종의 사명, 종의 자세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요? 요즘은 ‘종님’이라는 억지스런 호칭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대신 목회자들이 스스로 부담스런 ‘종’의 자리를 떠나 ‘목자’의 자리로 이동하면서 교인들을 ‘양’으로 만들고 목자에 대한 순종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성서가 ‘목자와 양’의 구도를 ‘하느님과 그의 백성’에만 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구도를 ‘지도자와 백성’에게 부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도는 주로 지도자에게 책임을 물을 때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목자’에서 찾으려면 그 호칭을 권위를 내세우는데 사용하지 말고 책임을 지는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위의 본문에서 베드로에게 그런 책임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의 물음이 우리말 성서에는 똑같은 단어로 나오지만, 원문에는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 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묻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물음에 대해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필레아합니다.”라고 반복해서 대답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는 세 번째 물음을 “네가 나를 필레아하느냐?”로 바꾸었고,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필레아하는 건 아시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합니다. 

‘아가페’는 신이 그의 백성에게, 또는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무조건적 사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필레아’는 친구나 학문, 예술 등을 사랑한다고 할 때 사용하는 ‘조건적 사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무조건적 사랑을 요구하는 예수의 질문에 베드로는 “아가페적 사랑은 자신이 없지만, 조건적이고 제한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라고 답을 한 셈입니다. 

▲ (자료사진)     © CBS노컷뉴스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했기에 신중해진 것일까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정직한 베드로의 대답에 예수는 자신의 원래 요구를 철회하고 “네가 할 수 있는 조건적 사랑이라도 열심히 실천하여 내 양을 돌보아라”라고 말씀해 준 셈입니다. 

본문에는 ‘목회관’에 대한 주님과 베드로의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자기 백성에 대한 돌봄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제자의 한계를 인정해주고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당신의 백성을 돌볼 것을 당부합니다. 그러나 돌봄의 대상이 ‘너의 양’이 아니라 ‘나의 양’이라는 점은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을 양으로 비유하는 것이 허용되려면 목자는 예수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교인을 양으로, 목회자를 목자로 설정하고 나면 예수의 자리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로 고백됩니다. 그런 예수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정통신앙에서 얼마나 큰 죄로 간주되는지는 누구보다도 ‘보수정통’ 목회자들이 잘 알 것입니다. 

성서는 이삼천년 전의 시대상황에서 쓰여진 책이기에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한계가 고스란히 담겨있지만, 우리나라 교회 강단에서는 여전히 성서의 권위와 절대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보수 목회자들이 ‘예수와 그의 백성’의 구도로 설정된 ‘양과 목자’의 비유를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종속적 구도로 왜곡하는 것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성서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교인들을 ‘양’이라고 부르고 싶은 목회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목자라 부르지 말고 ‘개’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 이 칼럼은 격월간지 <공동선> 2009년 9+10월호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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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10/05 [17:1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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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 밑에 2009/10/14 [04:50] 수정 | 삭제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허투로 읽고 내려가기 쉬운 부분이었는데 다시 되짚게 해 주셨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