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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 강기훈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
[김주언의 언론레이더] 강기훈 사건은 정권의 유령찾기, 공식사과 있어야
 
김주언

 한국의 강기훈 사건과 100년 전 있었던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은 유사점이 많다. 그래서 강기훈 사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드레퓌스 사건은 유럽 지성사를 뒤흔든 역사적 사건으로 프랑스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반면 강기훈 사건은 아직 한국 지식인 사회의 관심에서 비껴나 있다. 그래선가. 프랑스에는 드레퓌스의 동상이 서 있지만, 강기훈은 아직도 어려운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드레퓌스는 12년 만에 무죄가 확정된 뒤 예전의 직장으로 돌아가 진급도 하고 훈장도 받았다. 그러나 강기훈은 18년 만에야 비로소 법원으로부터 재심개시 결정을 받았다. 게다가 검찰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즉시 항고를 제기했다. 강기훈의 앞에는 앞으로도 험난한 여정이 예정돼 있다. 강기훈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비교해보면, 100년전 프랑스와 현재의 한국 지성사회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강기훈 사건.

 1991년 5월 8일 엄혹한 독재정권 시절.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노태우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것에 항의해 김기설(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이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분신 자살했다. 김기설은 옥상에 2장의 유서를 남겼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전민련 총무부장이었던 강기훈에게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가 뒤집어 씌워졌다. 검찰은 강기훈을 자살방조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서울형사지방법원은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하여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1992년 7월 피고인의 상고를 기각했다. 그는 대전교도소에서 만기복역 후 1994년 8월 17일 출소했다. 

 이로부터 18년이 흐른 2009년 9월. 법원은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 재심개시 결정을 내렸다. 서울고법 형사10부는 고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수사와 재판 결과는 잘못됐다며 강기훈이 낸 재심청구를 받아들여 다시 심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1991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 결과에 근거해 업무일지, 전민련 수첩, 메모지를 강씨가 작성한 것으로 본 판결은 새로 발견된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 등 새로운 증거들과 모순돼 그대로 유지할 수 없다"며 "새로운 증거들은 형사소송법에서 말하는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재심개시 사유를 설명했다.
 

▲ 1991년 당시 고 김기설 씨가 남긴 유서와 강기훈 씨의 자술서     ©CBS노컷뉴스


 재판부는 강씨의 유죄 판결에 결정적 근거가 됐던 필적 감정 결과와 관련해 "분신한 김기설씨의 유서가 김씨의 필적과 일치한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감정기관의 감정 결과가 나왔다"며 "유죄의 확정판결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고도의 개연성이 인정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이어 “당시 지정 감정인이 전적으로 감정을 주관했음에도 공동심의란에 날인한 국과수 감정인들이 공동심의를 했다고 재판과정에서 허위로 증언한 사실이 밝혀졌다”며 “공소시효가 완성돼 위증죄에 대한 확정판결을 얻을 수는 없지만 진실규명 결정에 의해 그 사실이 증명됐으므로 형사소송법 제420조 2호의 재심사유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초기부터 조작의혹이 제기됐지만 검찰과 법원은 '유서의 필적은 숨진 김씨가 아닌 강씨의 것'이라는 국과수의 필적 감정 결과를 근거로 강기훈의 유죄를 인정했다. 이후에도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다행히 노무현 정부 들어 과거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진실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경찰청 과거사 위원회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국과수의 필적 감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경찰청 과거사 위원회는 김기설의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을 제출받아 조사활동을 벌인 뒤 2006년 12월 16일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청 과거사 위원회는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로 보아 이 사건의 유서는 김기설의 필체로 보이고, 국과수의 필적 감정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감정은 아니었다는 의문이 있다”며 “검찰은 미리 유서 대필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불리한 증거를 배제하는 등 무리한 수사를 한 것이라 의심되는 부분이 있으나 유서 원본에 대한 필적감정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고 판단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11월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신 쓰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진실·화해위는 김기설의 필적이 담긴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을 새로 발견해 국과수 및 7개 사설 감정기관에 필적 감정을 의뢰한 결과, 유서의 필적은 김기설 본인의 것이라는 감정결과를 통보받았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필적감정 결과 등을 기초로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작성한 것으로 볼 수 없고, 경험칙상 타인의 유서를 대필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임에 비추어 김기설이 자신의 유서를 작성하였다고 볼 수 있음에도 필적 감정 및 정황에 의거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한 것은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증명을 요구하는 증거재판주의의 원칙에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에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고, 국과수의 필적 감정, 기소 및 유죄판결에 대해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강기훈은 2008년 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검찰은 법원의 재심개시 결정에 불복해 대법원에 즉시 항고했다. 서울고등법원은 “재심 결정을 앞두고 법원에 ‘재심은 부당하다’는 의견을 제출한 바 있다”고 밝혔다. 앞으로 대법원의 판단에 따라 재심개시 여부가 결정될 전망이다. 그러나 재심이 열리더라도 무죄를 확정짓기까지는 아직도 험난한 길이 남아 있다. 재판부의 재심개시 결정문에는 ’무죄취지‘가 명백하게 들어 있지만.
 
 드레퓌스 사건.

 강기훈 사건이 일어나기 거의 100년 전인 1894년 10월. 프랑스에서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 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파리의 독일 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편지봉투 안에 육군 기밀을 담고 있는 명세서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일치한다는 이유였다. 명세서 끝에 ‘D.' 라는 서명이 있다는 이유도 곁들여졌다. 드레퓌스는 유태인이었다.

 반유태계 신문 ‘자유언론’은 유태인을 매국노로 매도하고 군부의 우유부단을 격렬하게 성토하며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에 당황한 군부는 비공개 군법회의에서 뒤레퓌스에게 종신유형 판결을 내렸다. 드레퓌스는 남미의 프랑스령 기아나 앞바다 ‘악마의 섬’으로 유폐됐다.

 세상에서 점점 잊혀져가던 드레퓌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동창 피가르 중령이었다. 피가르는 2년 뒤인 1896년 드레퓌스가 범인이라는 물증이 없으며 명세서와 똑같은 필적을 가진 사람이 헝가리 태생의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그러나 권위실추를 두려워 한 군 수뇌부는 진상발표를 거부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재심을 요구해 오던 가족도 진상을 알아내고 1897년 11월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했다. 하지만 군부는 형식적인 신문과 재판을 거쳐 그를 무죄로 석방했다.

 무죄 석방 이틀 뒤인 1898년 1월 13일 당대 최고의 소설가인 에밀 졸라가 문학 전문지 ‘로로르’ (L'AURORE' 여명) 지에 ‘나는 고발한다’ (J'Accuse...!) 라는 제목의 논설을 발표했다. “대통령 각하, 저는 진실을 말하겠습니다”로 시작되는 이 논설은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드레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군부를 신랄하게 공박하는 격문이었다.
 

▲ <로로르>(L'AURORE' 여명) 지에 게재된‘나는 고발한다’(J'Accuse...!)  


 이를 계기로 사회여론이 비등하여 프랑스는 ‘정의 진실 인권옹호’를 부르짖는 드레퓌스파와 ‘군의 명예와 국가 질서’를 내세우는 반드레퓌스파로 나뉘어 커다란 소용돌이에 빠졌다. 전자는 자유주의적 지식인을 중심으로 사회당과 급진당이 가담하여 인권동맹을 조직했다. 후자는 국수주의파와 교회 군부가 결집하여 프랑스 조국동맹을 결성했다. 졸라의 양심선언은 전 유럽을 진실과 거짓의 싸움으로 들끓게 만들었고, ‘자유 민주주의 공화제’ 대 ‘우익 국수주의 군국주의’의 대결장이 되었다. 

 프랑스 군부는 1898년 8월 참모본부 앙리 중령이 새로운 증거를 찾아냈다며 드레퓌스의 유죄를 확언했다. 그러나 증거서류는 날조된 것으로 판명됐다. 앙리 중령은 면도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정부도 재심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참모본부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변호사는 법원에 가다가 총을 맞고 병원으로 직행했다.

 1899년 9월 열린 재심 군법회의는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유지한 채 무기에서 10년으로 감형했다. 이에 대해 졸라의 공박 등으로 비난여론이 확산되자 대통령은 드레퓌스를 특별사면했다. 드레퓌스는 사면을 받아들여 석방됐다. 그러나 무죄 확인을 위한 법정 투쟁은 계속됐다. 드레퓌스는 1904년 재심을 청구했고 최고재판소는 1906년 무죄 판결을 내렸다. 드레퓌스는 사건 발생일로부터 12년 만에 무죄가 입증된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자유주의자의 승리로 낙착됐고 프랑스 제3공화정의 종말을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은 군법회의가 음모와 조작에 의해 드레퓌스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는 사실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건 발생 이후 100년 만인 1995년 프랑스군 역사학자가 유태인 중앙종교법원 연설에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공식 인정했다. 국가 차원의 공식 사과는 1998년 1월 13일에나 이뤄졌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발표 100주년을 맞아 졸라와 드레퓌스 가족에게 공식사과 서한을 전달함으로써 ‘역사 바로잡기’가 공식적으로 마무리됐다.
 
 유서와 명세서, 필적의 유사성

 강기훈과 드레퓌스는 종이 몇 장이 사건의 발단이었다는 점에서 형식상 비슷하다. 강기훈은 친구인 김기설의 유서, 드레퓌스는 군사기밀이 적혀 있다는 명세서가 발단이었다. 강기훈과 드레퓌스는 똑같이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유서와 명세서를 자신이 작성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필적이 같다는 것 외에는 다른 물증은 없었다. 필적 감정 결과는 이후 거짓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강기훈은 자살방조 혐의로, 드레퓌스는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강기훈은 여기에 이적표현물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가 추가됐다.

 강기훈과 드레퓌스가 당시 주류사회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는 점도 비슷하다. 강기훈은 젊은 청년으로 전민련 총무부장으로 일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매진했다. 당시 군사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 민주화운동 세력을 ‘좌파’로 몰아 탄압했다. 재야인사와 청년학생들은 감옥을 제 집처럼 드나들어야 했다. 당시 민주화운동 진영은 집권세력과 보수언론에 의해 ‘사회주의 혁명 세력’으로, 북한의 사주를 받는 ‘주사파’로 매도됐다.

 드레퓌스는 육군 대위로 성실하게 복무하고 있었으나 유태인이라는 점이 유죄 판결의 근본 이유였다. 프랑스는 유태인 차별 법률을 폐지했지만 오래된 편견은 프랑스인들 뇌리 속에 그대로 자리잡고 있었다. 군부는 노골적으로 유태인을 차별했고 사회전반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참모본부에서 드레퓌스를 용의자로 지목한 인물들은 악명높은 반유태주의자였다. 반유태주의자들은 유태계 프랑스인을 진정한 프랑스인으로 간주하려 들지 않고 잠재적 반역자로 간주했다. 
 
 검찰의 증거 조작 및 은폐  

 강기훈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한국 검찰과 프랑스 군의 태도는 크게 다를 바 없다. 강기훈 사건의 경우 ‘한겨레신문’과 재야단체, 변호인단이 검찰의 증거조작 의혹을 끊임없이 제기했으나 검찰은 철저하게 묵살했다. 드레퓌스 사건의 경우 프랑스 군은 진범이 확인됐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새로운 증거를 조작했다가 들통이 나기도 했다.

 한국 검찰은 강기훈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배후가 있다는 단정 하에 수사를 시작했다. 김기설이 분신하기 하루 전인 5월 7일 청와대 고위 당정회의와 분신 당일인 5월 8일 청와대의 치안관계 장관회의에서 분신 배후에 대해 철저히 수사를 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검찰은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김기설의 집과 동사무소, 김기설이 근무했던 군 부대에 찾아가 필적을 입수했다. 김기설의 유서가 대필되었다는 예단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김기설이 작성한 전민련 수첩 등은 조작됐다는 판단을 내리고 대부분의 필적들은 은폐했다.
 
 검찰은 강기훈이 학생운동 시절 구속되면서 작성한 진술서 등을 유서와 비교하여 감정하도록 국과수에 의뢰했다. 검찰이 의도를 가지고 유서와 비슷한 필적만을 감정대상으로 한 것이다. 국과수의 감정결과를 토대로 검찰은 "업무일지를 조작하기 위해 유서를 대필한 자가 급하게 써 내려갔다"며 강기훈을 추궁했다. 검찰은 잠 안 재우기 고문, 구타 등 가혹행위를 하면서 자백하라고 다그쳤다. 필적을 감정했던 국과수 김형영 문서분석실장이 1992년 2심 재판 진행 중 허위 감정혐의로 구속됐다. 그러나 검찰은 “돈을 받았지만, 허위감정은 없었다”며 수사를 마무리했다. 강기훈 사건으로 확대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신속한 수사였다. 검찰의 자의적 증거선택에 의한 고의적 증거조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검찰은 권력의 풍향계 역할에 충실했다. 검찰은 강기훈 사건을 민주화운동 진영의 도덕성을 파멸시키려는 의도로 활용했다. 검찰은 논고에서 피의자 강기훈에게 "목적을 위해서는 동료의 생명까지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좌경혁명 분자"로 규정했다. 민주화운동 진영을 유서까지 대신 써주며 죽음을 부추기고 이용하는 반인륜적, 비도덕적 집단으로 매도하려는 의도였다. 유서까지 조작의 도구로 이용하는 정치검찰의 상투적 수법이었다. 검찰은 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진 뒤에도 법원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고 즉시 항고했다.
 

▲     ©CBS노컷뉴스 (자료사진)


 드레퓌스를 반역죄로 몰아갔던 프랑스 군부도 증거를 조작하거나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가 입수한 명세서는 독일대사관 무관 슈바르츠코펜에게 보내는 편지로  육군의 기밀사항을 넘겨주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참모본부는 명세서를 만든 사람, 즉 스파이가 참모본부 안에서 일하거나, 가까이 있는 인물로 단정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참모본부는 드레퓌스 대위의 필체가 명세서의 글씨와 유사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군법회의에 고발했다.

 참모본부는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만들기 위해서 명세서의 글씨와 드레퓌스의 필체에 대해 실시한 여러 가지 필적감정 결과 중 유리한 감정결과만 취하고 나머지는 묵살했다. 또한 드레퓌스의 육군사관학교 시절 불리한 평가만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도덕성 조사도 허위로 작성했다. 드레퓌스와 전혀 상관없는 첩보문서들을 드레퓌스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조작했다. 재판과정에서는 드레퓌스에게 불리한 비밀자료를 판사들에게만 불법적으로 전달했다. 

 새로 정보부장에 취임한 드레퓌스의 동창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파란 엽서'라는 첩보사건을 조사하던 중 드레퓌스 사건 관련 서류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드레퓌스가 반역죄를 범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고, 명세서 글씨가 보병 대대장 에스테라지 소령의 필체와 똑같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피카르 중령은 에스테라지를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참모본부 장군들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그대로 묻어 버리려고 했다. 

 그러던 중 1896년 11월 10일 ‘르 마탱’ 지가 명세서 사본을 1면 기사로 실었다. 에스테라지는 신문에 실린 자신의 필체를 보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참모본부와 공모하여 새로운 음모를 꾸몄다. 참모본부도 군의 명예 실추를 방지하기 위한 음모를 조작했다. 마침 에스테라지와 교분이 있는 증권브로커가 드레퓌스의 형 마티외를 찾아가 명세서의 필적이 에스테라지의 것임을 알려주었다. 마티외는 에스테라지를 고발했다. 그러나 군은 그를 구속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눈 증거를 조작했다. 군사법원은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엉뚱하게도 군사기밀 누출죄로 피카르 중령을 체포했다.

 1898년 8월 31일 갑작스러운 사건이 일어나 판세를 뒤집어 놓았다. 참모본부에 근무하면서 에스테라지와 짜고 문서를 날조한 앙리 중령이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면도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허위문서들이 발견되고 에스테라지는 영국으로 도망갔다. 에스테라지는 영국에서 상부의 명령에 따라 독일의 기밀을 캐내기 위해 독일 무관에게 접근해 이중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내용의 책을 펴냈다. 이로써 드레퓌스는 재심을 받게 된다.
 
 검찰 기소 그대로 인정한 판결 

 재판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강기훈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의 재판부는 검찰의 기소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인정했다.

 한국의 1심, 2심, 대법원은 모두 강기훈의 자살방조 혐의를 인정해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했다. 당시 대법원의 담당 재판부는 박만호(주심), 김상원, 박우동, 윤영철 재판관이었다. 이중 윤영철 재판관은 나중에 헌법재판소장을 지냈다.

 1992년 7월 24일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국과수의 감정결과를 신뢰하여 강기훈이 김기설 의 유서를 대필하였다고 인정하고, "자살방조죄는 사람의 자살행위를 용이하게 실행하도록 도와줌으로써 성립하는 것으로 그 방법에는 적극적, 소극적, 물질적, 정신적 방법이 모두 포함된다"며 "피고인(강기훈)의 경우 적극적 정신적 방법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자살의 동인과 명분을 주어 자살을 도운 것이 명백하므로 자살방조죄가 성립된다"고 밝혔다.

 법원은 "확실한 심증을 형성하지 못했다"며 판결의 한계를 시인하면서도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라는 증거재판주의의 기본원칙을 법원 스스로 파괴했다. 법원은 오히려 의심스러울 때 권력에 유리하게 판단하는 '어용 재판주의'를 선택했다.

 '정신적인 자살방조'를 처음 인정하였다는 대법원의 이 판결로 1년 1개월 동안 '공권력의 권위'와 '운동권의 도덕' 대결은 공권력의 승리로 끝났다. 변호인단은 상고이유서에서 "진실을 짓밟히는 우리의 고통은 한 순간일 것이나, 진실을 짓밟는 자들에 대한 양심의 역사적 심판은 영원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법원은 검찰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에 대해 당시 '유서사건' 강기훈씨 무죄석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성명을 내고 "1992년 7월 24일은 대한민국 법원이 스스로 범죄 집단임을 선포한 날로서 역사에 길이 기억될 것이다. 대한민국 법원은 정해진 각본에 따라 우리 사회의 양심과 진실을 세 번째로 짓밟았다. 강기훈에 대한 대법원의 의기양양한 유죄확정 선고는 우리가 믿고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이어야 할 법원 자신에 대한 사형선고에 다름 아니다. … 우리는 정권의 주구로 전락한 법원의 판결이 강기훈을 짓밟으면 짓밟을수록 소리 높여 외친다. 강기훈은 무죄이다!"라고 강조했다. 강기훈은 "계속 관심 가져 주십시오.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드레퓌스의 경우 비공개 재판은 물론이려니와 두 번째 재판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아야 했다. 프랑스 지식인들의 반발로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드레퓌스는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에 재심 청구를 해서 마침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1894년 12월. 비공개로 치러진 군법회의는 만장일치로 드레퓌스의 유죄를 선고하고 종신 유배형과 공개적인 군적 박탈형에 처했다. 재판장은 드레퓌스가 불법적 증거들에 대해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재판을 끝냈다.

 에스테라지에 대한 무죄선고 이후 열린 재심판결도 유죄였다. 드레퓌스는 무죄를 주장했으나 참모본부는 또다시 거짓증거들을 불법적으로 전달했다. 1899년 9월 9일 군사법정은 5 대 2로 드레퓌스의 유죄를 선고했다. "드레퓌스는 외국 또는 외국 첩보 요원과 내통하고 음모를 꾸몄으며, 그들로 하여금 프랑스에 대한 적대행위 또는 전쟁을 유발하도록 했거나, 명세서에 언급된 자료들을 넘겨줌으로써 그 방법을 제공했다"는 죄목은 변함이 없었다. 다만 형량이 10년형으로 줄었을 뿐이다. 이 판결 역시 여론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결국 대통령은 1899년 9월 19일 드레퓌스에게 특별사면을 내렸고, 드레퓌스는 받아들였다.

 이후 드레퓌스는 1904년 3월 재심을 청구했고 1906년 7월 12일에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비로소 막을 내렸다. 드레퓌스는 후에 육군 소령 계급장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 전투에 두 번 참가한 뒤 1935년 7월 11일 병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추측성 부풀리기식 언론보도

▲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과 관련한 당시의 언론보도     ©<미디어오늘>

 강기훈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언론보도는 유사한 특성을 지녔다. 일부 언론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사실보도를 통해 여론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문은 추측보도를 남발했고 검찰과 군의 발표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했을 뿐이다.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나자 프랑스 신문들은 온갖 추측보도를 남발했다. 신문들은 정확한 증거를 찾기는 커녕 드레퓌스를 헐뜯는 기사로 도배했다. 말도 안 되는 뜬 소문이 버젓이 신문지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유태인이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니 반유태주의자들의 항의는 거셌다. ‘유태인이니 당연하다’든지 ‘사형에 처해야 한다’ 는 등의 기사가 잇따라 신문에  게재되기도 했다.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판결이 열리기 직전 대부분의 신문들은 참모본부를 싸고 돌았다. "드레퓌스 재판을 다시 하라는 것은 군부, 나아가 프랑스를 파멸시키려는 유태인 국제조직이 꾸민 음모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군의 위신과 사기를 꺾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군대와 관청에서 일하는 유태인을 모조리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드레퓌스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너무나 가냘팠다. 드레퓌스는 ‘국민의 적’이 되어 버렸다.

 강기훈 사건과 관련된 한국 언론의 보도태도도 비슷하다. 보수언론들은 “민주화운동 세력은 ‘유서까지 대신 써주며 죽음을 부추긴 세력’이라는 검찰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언론들은 "김기설의 분신 장소에 하얀 점퍼를 입은 사람 등 2~3명이 더 있는 것을 본 목격자가 나타났다", "시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운동권에서 내부적으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자살을 기도한다는 소문이 있다"는 검찰의 발표를 거르지 않고 그대로 보도했다.

 한 술 더 떠서 "재야에 자살 특공대가 있다는 풍설이 오래 전부터 나돌았다", "분신에 협력자가 있었을까?", "분신자살조, 사실일까?" 등 선동적인 기사를 써 댔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김기설의 유서가 누군가에 의해 대필되었으며, 그런 자살의 배후세력에 대해서 단죄해야 한다는 논조가 이어졌다. 다만 한겨레신문 등이 재야단체와 변호사의 증거조작 주장을 상세하게 보도했을 뿐이다.

 1994년 박홍 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 발언 이후 일부 신문의 논조는 더욱 가관이었다. ‘조선일보’는 그를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칭송했다. 이 신문은 한 면을 털어 사회가 그의 용기를 보호해야 한다며 각계 ‘지식인’들의 동조발언을 실었다. 그러나 ‘용기 있는’ 신부님의 말에는 근거가 없었다. “증거가 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박홍은 “공산주의 이론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면 다 아는…” “북한을 방문한 학생운동권 핵심으로부터 전해들은…” 하는 정도로 답할 뿐이었다. 조선일보는 “일부 인사는 증거를 대라고 추궁”하는데 “증거 요구는 망발”이며 “천치가 아닌 한 누구도 물증을 고스란히 모두 남겨놓으면서 혁명운동을 꾸미지는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근 서울고등법원의 재심개시 결정이 내려진 뒤에도 보수언론은 간략하고 눈에 잘 띄지 않게 보도하는 데 그쳤다. 그만큼 강기훈 사건의 의미를 폄하하고 있는 셈이다. 한겨레신문만 1면 톱기사로 사실을 보도하고 상세한 해설기사로 앞으로의 과정을 전망하고 강기훈의 인터뷰도 실었다. 
 
 에밀 졸라, 박홍, 그리고 김지하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지식인 사회가 성취한 양심의 승리이자, 진실의 승리였다. 특히 당대 최고의 작가였던 에밀 졸라의 눈부신 활약과 정치인 조르주 클레망소 등의 헌신적인 활동은 온갖 위협 속에서도 끈질기게 이어졌다.

 스파이 에스테라지에 대한 군사법원의 무죄판결 이후 유럽의 여러 신문들이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프랑스는 재심 요구파와 재심 반대파로 분열됐다. 재심 요구파의 힘은 초라했고 드레퓌스의 앞날은 깜깜했다. 에스테라지의 무죄석방 이틀 후인 1898년 1월 13일 수요일. 언론사상 가장 유명한 양심선언인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라는 논설이 ‘로로르’지에 게재됐다.

 에밀 졸라는 이 격문을 발표하기 전에는 보수신문 ‘르 피가로’를 통해 드레퓌스 관련 글을 발표했다. 그러나 독자들이 구독해지 운동을 펼치며 압력을 가해 신문사 편집진은 졸라의 글을 싣지 못했다. 졸라는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프랑스에 보내는 편지’ 등을 팸플릿으로 제작해 판매해야만 했다.

 졸라는 이 논설에서 에스테라지가 진범인 이유를 밝힌 다음, 드레퓌스를 죄인으로 만들어 참모본부의 잘못을 감추려 한 장군들과 엉터리 증언을 한 필적감정 전문가,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한 첫 번째 군사재판과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한 군사재판을 꾸짖었다.

 "크나큰 고통을 겪어 이제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는 인류의 이름으로 진실의 빛을 밝히는 것, 그것이 단 하나뿐인 나의 정열입니다. 불타오르는 나의 항변은 내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나를 중죄 재판소에 고발한다 해도, 백일하에 나를 심판한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 논설은 유태인에 대한 반감이 퍼져 있던 프랑스 사회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드레퓌스파는 환호했고, 반대파는 대경실색했다. 드레퓌스파 지식인들은 재심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두 패로 갈라진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내팽겨친 채 싸우기 시작했다. "졸라를 죽여라!" "유태인을 죽여라!" 따위의 구호를 외치면서 폭동을 일으키는 재심 반대파의 시위는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이에 따라 프랑스 의회는 서둘러 졸라를 기소했다. 베르사이유 중죄 재판소는 1898년 7월 졸라에게 징역 1년에 벌금 3,000프랑을 선고했다. 선고 당일 졸라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다. 선고 며칠 후 프랑스 정부는 레지옹 도뇌르 수훈자 자격도 박탈했다. 졸라는 1899년 6월 돌아왔으나, 불과 3년 뒤인 1902년 9월 29일 가스중독 사고로 사망했다. 계획된 살인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았지만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진실’을 쓰기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했다.

 졸라의 장례식에서 작가이자 비평가인 아나톨 프랑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를 부러워합니다. 방대한 저작과 위대한 참여를 통해 조국을 명예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를 부러워합니다. 그의 걸출한 생애와 뜨거운 가슴은 그에게 가장 위대한 운명을 선사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은 인류 양심의 한순간이었습니다."

 반면 강기훈 사건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졸라처럼 자신에게 닥쳐올 온갖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양심선언을 한 지식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변호사와 재야인사들은 끈질기게 검찰의 조작을 주장했지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독재권력의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이라는 극한적 투쟁을 택한 젊은 청년들을 매도하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당시 서강대 총장이었던 박홍은 김기설의 분신자살이 있던 날 기자들에게 자살경위와 유서를 공개하며 “우리사회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반생명적 선동세력의 정체를 폭로하고 없애버리기 위한 선포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홍은 “김씨 등의 잇따른 분신을 보며 우리사회에는 젊은이들에게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는 음흉한 세력들이 분명히 있다”며 “이 모든 세력을 없애는 데 함께 일어나야 한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박홍은 구체적인 실례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발언 앞뒤를 보면 조직적으로 분신을 추진하는 세력이 있으며, 이들의 정체를 밝혀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같은 날 내무장관이나 검찰총장의 분신자살 배후조사 방침 천명도 배후세력의 ‘어떤 역할’을 강하게 의심하는 데서 나온 발언이었다. 재야는 시위사태의 본질을 왜곡시키려는 매카시적인 뒤집어 씌우기라고 반발했다.

 박홍의 근거 없는 선동에 맞춰 검찰은 "분신자살은 2~3일 간격으로 연쇄 발생할 뿐만 아니라 한적한 곳에서 하는 등 방법이 유사하고, 지역적으로는 호남, 영남, 경기, 서울 등 분포를 이루고 있는 점으로 보아 배후에서 조직적으로 이를 부추기는 세력이 있을 것"이라며  수사에 착수했다. 당시 정구영 검찰총장은 전재기 서울지검장, 강신욱 강력부 부장검사 등 6명으로 전담 조사반을 편성하여 김기설의 분신 사건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노태우 정권은 당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민주화운동 세력의 도덕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정권차원에서 마련한 기획이었다. 민주화운동을 요구하는 분신이 이어지자 보수세력들 사이에서는 ‘운동권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분신자를 선택한다느니’, ‘배후가 있다느니’ 하는 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대학총장이자 성직자인 박홍이 정권의 의도에 동조함으로써 민주화운동 세력의 도덕성에 흠집을 가하려 한 것이다.

 박홍은 이어 1994년 7월18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학총장 초청 오찬에서 주사파가 “생각보다 깊이 침투”되어 있다면서 “북한은 학원 안에 테러조직 등 무서운 조직을 만들어놓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사로청, 사로청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는 놀라운 발언을 했다. 그는 또 얼마 뒤 “북한에 초청되어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남한의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발언을 했고, 몇몇 교수들은 공안당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5월 5일 ‘오적’으로 유명한 저항 시인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이 파문을 일으켰다.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 환상을 갖고 누굴 선동하려나”는  제하의 글을 통해 명지대생 강경대의 타살에 항의한 학생들의 분신행위가 ‘시체 선호증’ ‘싹쓸이 충동’ ‘자살 특공대’ ‘테러리즘과 파시즘의 시작’이라며 인민사원의 집단학살에 비유해 물의를 빚었다. 김지하는 이 글로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제명당했다. 

 이처럼 강기훈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을 대하는 양국 지식인들의 대응은 달랐다. 강기훈 사건의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진 뒤에도 한국 지식인 사회의 반응은 아직 크지 않다. 앞으로 재심이 시작된다면 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
 
 국가의 공식 사과 있어야

 강기훈 사건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강기훈은 복역 후 출소한 뒤에도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를 돌본 사람은 주변의 선배 동료들을 제외하곤 얼마 되지 않는다. 민주화 이후 MBC TV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유서대필 사건의 조작의혹을 다뤘으나 크게 이슈가 되지는 못했다. 참여정부 들어 과거사 정리를 하면서 정면으로 조작의혹이 제기되고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증거가 조작됐다며 재심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재심을 권고하면서 “국가는 확정판결에 대하여 피해자와 그 가족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종전 국과수의 필적감정, 기소 및 유죄판결에 대하여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재심 개시조차 확정되지 않은 시점에서 국가의 사과를 논의하는 것은 너무 사치스럽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공식 사과는 사건 발생 이후 100여년이 지난 최근에야 이뤄졌다. 프랑스군 역사학자 장 루이 무뤼 장군은 1995년 8월 프랑스 유태인 중앙 종교법원에서 행한 연설에서 드레퓌스 사건이 반유태주의 정서에 편승하여 무고한 사람을 조작된 서류에 입각하여 추방한 군사적 음모임을 인정했다.

 3년 뒤인 1998년 1월 13일에는 에밀 졸라의 양심선언 ‘나는 고발한다’ 발표 100주년을 맞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졸라와 드레퓌스 가족에게 공식 사과 서한을 전달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공개서한에서 “우리 조국과 역사에 부끄럽고 어두운 오점”이라며 프랑스의 이름으로 사과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서한에서 “드레퓌스 대위의 비극은 여전히 우리들 마음에 강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우리는 어둠의 세력과 불관용, 부정의가 국가 최고위층을 미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진리가 힘을 얻고 단결해 감시의 눈을 번득이는 순간에 프랑스는 보다 나은 선을 향해 나갈 수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고 밝혔다.
 
 유서대필 사건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분신의 배후를 찾으려던 노태우 정권의 유령 찾기가 빚어낸 마녀사냥이었다. 이로 인해 강기훈은 정신적 고통은 물론이려니와 생활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아직도 그에게는 떠나지 않는 그림자가 있다. 그러나 그림자의 실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자. 국가가 자행한 참혹한 인권유린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앞으로 강기훈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국가로부터 금전적 보상을 받더라도 20여년 동안 그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국가폭력은 정당화할 수 없다.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난다 해도 저와 제 주변 사람들이 감당해야 했던 상처가 치유될까요. 이제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네요." 강기훈이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제 대법원이 검찰의 즉시 항고를 어떻게 처리할 지, 그리고 재심이 시작되면 어떤 판결이 내려질 지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용기있는 양심적 지식인들이 어떤 활동을 벌일 지 기대해 본다. 드레퓌스 사건이 결국엔 진실과 정의가 승리하게 된 데에는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굴하지 않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언론광장 감사, <시민사회신문>(http://www.ingopress.com) 편집인
 
기사입력: 2009/09/27 [21:52]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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