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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一世紀映畵讀本] 스크림 2 (Scream 2)
 
박수철   기사입력  2002/03/19 [16:36]
'전편보다 나은 속편 없다'는 영화계의 속설은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물론 몇몇 영화에 있어 개인의 기호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작년에 개봉했던 '스크림(Scream)'의 신선한 충격이 가시기 전에 이번에는 그 속편인 '스크림 2'가 개봉했다.

{IMAGE1_LEFT}작년에 개봉전 심의 문제로 문제가 되었지만 이번에는 아무 문제없이 개봉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스크림'의 잔혹함의 수준이 일반 관객에게 충격이 아니었다기보다는 고교생이던 주인공들이 부쩍 커버려서 살인을 저지르는 살인마들이 성인이 되었기 때문일거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한국의 심의 수준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고교생과 대학생의 연령과 지적, 문화적 수준이 얼마나 차이가 나길래...... 그리고 고교생은 살인을 하면 안되고, 대학생이 살인을 하면 괜찮은가......)

'스크림 2'는 한마디로 재미있는 영화이다. 이 재미들의 근간에는 그간 속편들이 저질렀던 오류들을 깡그리 무시한 케빈 윌리암스(Kevin Williams)의 훌륭한 시나리오가 있다. 지난 여름 케빈 윌리암스의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Know What You Did Last Summer)'의 흥행 성공 후 개봉한 속편 '나는 아직도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I Still Know What You Did Last Summer)'의 엉성함은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전편은 케빈 윌리엄스가 속편은 트레이 칼라웨이(Trey Callaway)가 시나리오를 썼다.)

'스크림 2'의 이야기 구성의 특징은 이야기의 구성과 캐릭터에 있어 전편의 방식에 그대로 의지하면서도 2편만의 독특함을 만들어 냈다는 데 있다. 흔히들 속편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이라 볼 수 있는 두 가지 경향 -전편과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들어 내겠다며 깡그리 전편을 뒤엎고 가는 경우, 그리고 전편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를 전면에서 부정하고, 그것들을 오히려 하나의 영화 안에서 섞어가며 전편을 패러디하거나 전편과 전혀 다른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스크림'에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영화 도입부의 잔혹한 살인 장면은 '스크림 2'에서 영화의 중간부에 거의 같은 방식으로 삽입되어 전편의 연결고리 역할과 속편의 이야기의 재미를 더한다. 가장 주목할 장면은 전편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도입부이다. 전편의 도입부에서의 충격은 속편에서는 그 정도와 재미를 훨씬 더한다. 시사회장에서 벌어지는 살인 장면들은 사실 그간 다른 공포 영화에서 많이 써먹었던 방법이지만. '스크림 2'에서는 훨씬 강렬한 촬영과 조명 그리고 편집기법으로 예전의 공포 영화들을 패러디 하면서도 더욱 더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흑인 연인들이 극장에 들어가면서 나오는 공포 영화에 대한 흑백 인종의 소외에 대한 이야기와 그에 반하는 흑인 연인의 죽음은 케빈 윌리암스의 이상한 악취미를 재미있게 보여준다.

{IMAGE2_RIGHT} 감독인 웨스 크레이븐(Wes Craven)은 사실 이 영화에서는 전편보다 더 나은 연출을 보여주었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공포 영화라는 장르적 관습에서 자유로울 수 는 없겠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무언가 다른 연출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기대감은 그리 충족되지 못한다. 또 하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범인들의 너무나 급작스러운 등장과 죽은 줄 알았던 前 보안관 듀이의 회생은 보는 이를 허탈하게 만든다.  물론 여기서 살아남은 자들은 다시금 '스크림 3(Scream 3)'에서 죽도록 고생하겠지만. '스크림 2'를 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은 전편에서 보여주었던 미국 젊은이들의 모습이나 문화 양태들을 전혀 볼 수 없었던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 속에서 드러나는 기성 세대와 지금의 젊은 세대의 대립 양상도 많이 죽어버린 점이다. 물론 마지막에 엄마와 자식 그리고 그들의 사랑의 비정상적인 발현으로서 가족주의의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 본 글은 대자보 14호(1999.6.21)에 발표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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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3/19 [16:3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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