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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김대중의 서거와 MB, 반동의 도래
[벼리의 느긋하게 세상보기] 서거국면 이후 MB권력 분열증식 톺아보기
 
벼리
권력(potestas)은 자율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의 본질은 오히려 ‘기생성’이다. 역사적으로 자율성은 오직 다중(multitude)의 것이었다. 이 자율성으로부터만 권력의 대당(counterpart)인 권능(pouvoir)이 나온다. 권능의 활력은 적극적인 평화주의와 비폭력주의에서부터 폭력투쟁과 파괴의 열정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풍부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권능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운명’ 즉 일의성(univocity)의 평면에 도달할 뿐인데, 그것의 이름은 ‘삶’(Une Vie)(1)이다.
 
하지만 권력은 이 활력에 기생하면서, 운명(Moira)이 삶의 몫(moirai)으로 할당되는 것에 반대하고, 오직 죽은 결정체인 자신의 유기적 부분에 종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권력은 살아 있는 기관들(organs)이 아니라 죽은 조직화(organization)를 더 선호하며, 다종다양한 정치들(politic's')이 아니라 일괴암적인 정치(Politic)를 구축하고 그를 통해 숙주인 다중을 관리, 통제, 훈육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실패한 시도다. 왜냐하면 활력의 본래적 성격이란 죽음에 있지 않기 때문이며 숙주는 관리할 뿐, 관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활력이 과연 ‘살아 있는’(活) ‘권능’(力)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권력이 실패에 연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실행한다는 데 있다. 화석화된 ‘사회계약’(2)을 한 쪽 저울에 올리고, 다중의 혁명적 시도들을 거기에 따라 심판하면서 그것이 마치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인 양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도들은 끝내 과부하를 부르고, 폭력(3)의 상황과 배역들을 불러 모으는데 이것이 ‘공안’이며, 경찰과 검찰, 그리고 백색테러다. 주목해 볼 것은 이들이 펼치는 한 무더기의 드라마가 히스테리와 분열증을 산출한다는 것인데, 리비도 경제 차원이 아니라 이제 권력-기계 안에서 이 두 드라마는 각각의 국면을 특징짓는 죄임쇠와 밈쇠의 기능을 떠맡는다. 
 
▲ 지난해 촛불집회 모습.     ©대자보

이를테면 MB권력기계를 살펴보자. 촛불 초기에 이 권력은 자기자신 내부에 어떤 억압된 욕망이 있는지 분명히 했는데, 그것은 수구파시즘에 대한 동일시욕망이다. 특히 MB는 박정희 군부에 대한 공공연한 애착을 보이곤 했다. 군부파시즘의 특징상 이 욕망은 다중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통제하고 다중의 일상을 엿보면서(4) 그 생활상 ‘배후’에서 스스로의 거울상(5)을 대면하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이 동일시와 엿보기의 욕망은 번번히 실패하고 마는데, 왜냐하면 군부파쇼 모델은 이미 잃어버린 대상(lost object)며 다중의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정희는 죽은 아버지고, 촛불의 배후에는 ‘공포’만이 배회한다. 이 공포에 대처하는 MB권력의 반응, 즉 증상이 바로 candlephobia인 것이다.
 
이 공포는 하나의 질문 주위를 배회하는 데, 그것이 그 유명한 “초는 누가 사준 거야?”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애초에 잘못 제기되었기 때문에 그 해(解)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스개 소리가 아니라 최근에 MB가 유기농 흙을 갈쿠리로 헤집으며 “여기 미생물이 어디 있어? 안 보이네”라고 했던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중요한 것은 이 공포에서 비롯된 헛헛한 실언들이 결코 ‘농담’도 ‘풍자’도, 더욱이 ‘아이러니’도 아니라는 것이다. MB권력에게 이 ‘잘못 제기된 질문’은 그대로 ‘현실’을 구성하는 것이고, 이에 반해 다중-우리는 그것이 ‘가상’일 뿐임을 안다는 것이다. 이러니 ‘소통’은 꿈도 못 꾸는 것이며, MB는 이에 관해 저항하는 다중이 내내 이해 불가능한 것이다.
 
다중의 ‘아침이슬’ 소리가 쟁쟁하게 퍼지던 그 날 청와대 뒷산에서 MB는 그 실재의 노래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계속 “초는 누가 사준 것일까?”라는 가상의 질문에 대뇌가 짓눌린 채 있었던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에 기무사도 동원되었다. 따라서 지금도 그 질문은 해결 불가능한 채로 MB권력기계의 폐쇄회로를 떠돌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래서 히스테리는 상실된 대상이나 해가 없는 질문을 욕망하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실패한다. 이는 권력이 다중을 떠나 감히 ‘자율성’을 표명할 때 극에 달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상태에서 이 상황은 매우 주기적으로 도래한다. 각각의 부르주아 권력기계들은 선거 전과 후에 한 번은 완전한 노예로서의 타율성에 기대어 표를 구걸하고, 또 한 번은 완전히 주인이 되어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MB권력은 이 주기적인 주인-노예 변증법을 극단에 이르기까지 밀어 붙인다.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가상의 권위’ 즉 재현된 권위(represented authority)에서 나온다. 이 권위는 스스로의 대의성을 은폐하고 그것을 자율성으로 왜곡하는데, 이 과정을 더 멀리까지 추동하기 위해, 공권력을 동원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공권력은 억압(repression)을, 거짓말은 왜곡(distortion)을 담당한다. 이것의 표면효과는 분명하다. 포화된 왜곡과 억압 때문에 실재의 표면에 경련이 발생하고 주기적인 발작에 휩싸인다. ‘대운하’는 4대강으로, 광우병 소고기는 원산지 추적제로, 참여정부 권력에 대한 복수는 법치주의로 ... 말이다. 이 계열은 앞으로도 계속 가면을 바꿔 써 가며 반복될 것이다. 왜냐하면 히스테리 상태에 놓인 MB권력의 신체는 이와 같은 거짓승화(pseudo-sublimation)를 통해 전 사회체에 경련을 운반하지 않고서는 스스로의 증상 때문에 내파(implosion)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운반된 증상의 충격을 견디는 것은 오로지 숙주-다중일 뿐이다(6). 그러나 충격의 자기정화 능력, 즉 다중의 감수성(perceptibility)도 임계점이 존재한다. 반격이 준비되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은 이것을 간파한다.
 
▲ 지난 5월30일 덕수궁 대한문 앞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에서 서울시청 광장으로 이어지는 횡단보도를 경찰이 통제에 나선 모습.      ©대자보

그러나 문제는 이 다중의 반격을 간파하는 속도가 반격이 시작되는 그 속도보다 열에 아홉은 더 빠르다는 것이다. 성공한 반격은 사회체 전체의 기능을 리셋하고 기생-숙주 관계를 올바르게 복원하면서, 빠르게 공동체화하지만, 그렇지 못한 반격은 곧장 권력의 반혁명을 부르고, 더 거센 억압과 탄압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도 다중은 반격이 임박했고, 그 임박한 사실이 이번 한 번만으로 끝나지 않으며, 줄줄이 반격의 계열이 늘어서 있다는 것을 분명히 자각한다. ‘인민은 왕이 행차할 때 엎드려 방귀를 뀌지’만 행차가 끝난 뒤에도 그 쪽으로 엉덩이를 까 보이는 법이다. 

어쨌든 반혁명의 시기에, 또는 지금과 같은 반촛불의 시기에 권력은 다중의 감수성이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특히 반촛불 상황은 권력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으로 새로운 국면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노무현 서거는 권력의 직접적 표적이었던 전직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MB권력의 히스테리가 어디로 운반되는지 알게 해 주었는데, 그것은 노무현으로 상징되었던 다중들 전체다. 이 사건은 집단적 트라우마(collective trauma)가 되었으며, 다중의 신체에 심각한 자상을 입혔고, 하나의 잠재적 공분상태를 MB 집권기 내내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전에 발생한 용산 참사의 파급력은 이 사건을 통해 보다 광범위해지고, 더 긴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상 노무현 노제에는 용산의 희생자들 넋이 뒤따랐던 것이고, 용산 현장에는 노무현의 영정이 어딘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뒤이어 발생한 평택 쌍용차 투쟁은 77일간의 옥쇄파업 일정이 영웅적으로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일련의 잠재적 공분에 미미한 힘만을 보탰을 뿐으로 보인다. 그것이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이념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고립’은 쌍차 투쟁 전 기간에 걸쳐 현장을 배회하는 유령과 같았다. 이 고립은 민주노총 집행부와 금속노조가 자초한 측면이 많지만 이것을 더 멀리까지 밀고 나가 그 효력의 수혜자가 된 것은 MB권력이다. 결국 구조조정 후 매각의 수순을 밟을 것이고,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도 그렇게 ‘고립’을 통과하게 할 것이고, 항복을 받아낼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MB권력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다중-노동계급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쌍용차 투쟁을 대면하면서 MB권력은 반격의 시간보다 한 발 앞서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이전의 소고기 사태부터 노무현 서거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학습된 것이기도 하다. 학습의 내용은 ‘전염’하기 전에 ‘고립’시키라는 것이다. 쌍용차 싸움에서 권력은 종횡으로 두 개의 선분(노자와 노노)을 현장에 배치함으로써 쌍용차 노동자들 투쟁의 고립을 가속화했으며, 관료화된 노총이 미필적인 방식으로 거들었다. 그러니까 한 발 앞서 고립시키면, 그 뒤는 자동으로 그 고립이 누승화된다는 것. 이 전술은 미디어법 공방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제 보겠지만 이 공방에서 원외로 나가 투쟁력을 놓이려고 했던 민주당은 완전히 고립될 것이다.
 
▲ 경찰은 지난5일 쌍용차 노조원들에 대한 강제진압을 시작했다. 이과정에서 다수의 노조원들이 부상당했다.     ©민주노총 (노동과세계)

문제는 이제 이 고립이 전체 다중에 대한 억압과 폭력만으로는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대의 권력의 중추적 강점이자 약점은 앞서도 말했듯이 주기적으로 주인-노예 변증법의 무대(선거)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그 무대가 마련될 시기가 되면 히스테리는 잠잠해진다. 이때 비로소 권력은 주인의 가면을 수치심 없이 벗어 던질 수 있다. 왜냐하면 강제로 노예의 가면을 썼던 다중이 비로소 주인이 되고, 반격의 상황은 유예되기 때문이다. 다중의 취약점은 이런 것이다. 일종의 조삼모사에 대해 무방비상태로 놓여 있다는 것 말이다. 권력은 이 취약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읍소하고, 아양 떨며, 매수하고, 약속하며, 간간히 사전에 세금감면이나 복지혜택을 베풀어 줌으로써 이 무대에서 무사히 내려와 다시 주인의 연기를 계속하려고 시도한다. 이 시도는 대체로 성공해 왔다. 

MB권력이 김대중 서거 이후 발빠르게 움직인 것은 이 때문이다. 단순히 노무현과 김대중의 죽음이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항일 뿐이다. 이 겉으로 드러나는 ‘죽음의 차별성’조차 오히려 MB권력에게 귀중한 자산이다. 노무현의 죽음이 김대중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건 노무현 세력을 고립시키고, 김대중 세력을 차후에 끌어안을 수 있는 매우 경제적인 분할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방식은 그래서 매우 성공적이다(7). 어쨌든 촛불 정국 이후 심각한 타격을 받았던 다중의 감수성을 조삼모사식으로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거리가 생겼으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노무현과 용산의 트라우마는 차라리 훌륭한 수단이 된다. 그 트라우마가 없었다면 이 정국에서 이 정도의 시혜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일리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시간차’고 ‘속도’가 문제다. 그 둘을 장악하는 자가 전략과 전술에서 앞선다. 

따라서 MB권력은 김대중 서거 이후 선거를 통한 반격이 시작되기 전에 이 시간차와 속도를 장악했다. 분자적으로 다중을 앞선 것이다. 다중보다 더 빨리 자신의 전투대형을 풀어헤쳐 버렸으며(서울광장을 내 주었고), 민주당이나 민노당, 진보신당보다 먼저 무주공산의 고지(선거국면과 김대중 서거)를 점령해 버렸다. 셈을 해 보면 이 짧은 시기(노무현 서거에서 김대중 서거, 그 중간에 미디어법 공방) 동안 다중의 감수력이 임계점을 넘어섰고, 이를 먼저 간파한 MB권력이 그 임계점의 천정을 치면서 급속하게 ‘화해’(8) 모드로 돌아선 것인데, 이로써 열 중에 여덟을 MB가 가져갔다는 결과가 나온다. 해결되지 않은 분노로 지친 다중에게 던져진 조삼모사의 사탕은 바로 ‘화해’며, ‘세금감면-복지혜택’이다. 전자가 이념이라면 후자는 실물이다. 전자가 집단지성의 취약지점을 공략한다면, 후자는 자본주의 사회체의 취약지점을 공략하는 것이다.

히스테리는 어디 갔는가? 이 지점에서 MB권력기계의 히스테리는 사회체 전반의 표면에 증상을 운반하기를 그치고, 그 표면에 분열증적인 욕망을 분배한다. 휴식에의 욕구, 똥(화폐)에 대한 집착, 투쟁에 대한 혐오증, 그와 함께 정치혐오, 나아가 소수자(배제된 자들, the excluded: Slavoy Zizek)(9)혐오에 이르기까지, 반정치의 입자들이 사회체의 표면에 서식하면서 분자운동을 규율하고, 법을 확정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이 권력기계는 죄임쇠를 쓰지 않고, 밈쇠를 활용한다. 점점 더 많은 국면에서 시간과 속도를 장악한다면 밈쇠는 죄임쇠보다 훨씬 더 유용하고, 시의적절하며, 경제적이다. 왜냐하면 죄임쇠는 다중의 반발력에 맞서 기생권력의 운동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하지만(10), 밈쇠는 이미 임계점을 치고 내려오는 다중의 운동에 편승하면서 간간이 ‘조절’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    ©청와대 (자료사진)

이 분열증은 그래서 다중에게 최면과 같다. 가상의 최면, 마치 MB권력의 공권력과 부르주아 법치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끼는 그 최면상태는 실로 파시즘으로 가는 샛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분열증에서 비롯되는 망상(delusion)은 배제된 자들에게까지 미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권력의 가상은 듬성듬성해서 곳곳에 빈자리가 있으며, 그 빈자리에 창궐하는 것이 바로 이 배제된 자들이고, 프롤레타리아며, 시뮬라크르이기 때문이다. 

히스테리 이후 분열증에 도달하는 것은 이렇게 순간적이다. 그리고 다중이 다시 권력이 쥐고 있는 밈쇠의 조종관을 재전유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계기, 즉 이념(the ideal) 층위와 감각적인 것(the sensible)의 층위에서 이 분열증을 앞서 가야 한다. 다시 말해 분열증의 평면에서 권력보다 더 빨리 나아가는 것 말이다. 그래서 법치화와 규율화의 홈을 교란하고 다시 분자운동을 재개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운동의 주체는 누구일까? 이는 반드시 배제된 자들 가운데서 나올 것이다. 권력이 미처 감각하지 못하는 클리나멘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개체화의 발명, 조직들(organs), 정치들(politic's')의 발명이다. 차이(difference)와 미/분화(differen/ciation: Deleuze)(11)에서 앞서가는 것, 곧 “전술과 전략에서 적들을 앞서는 것”(Guattari). - REDBRIGADE

[각주]

1) 들뢰즈는 본래 피히테의 것인 이 개념에 니체적인 운명애(amor fati)의 함축을 불어 넣어 일종의 생명철학을 추구했다. ‘일의성’이란 이런 생명과 삶에 대한 절대적 긍정을 의미하는 형이상학적 지평이다. 

2) 루소의 것이라기보다 부르주아지의 것, 즉 계약이 아니라 양도에 무게 중심을 두는 것. 

3) 다중의 순수폭력, 즉 ‘혁명’과 구분되는 퇴행성, 나르시시즘적 폭력

4) 이 방면에서 도청과 사찰은 매우 일상적인 것이다. 

5) 그와 유사한 일괴암적인 ‘조직’을 말한다. 이렇게 권력은 어디에서나 자신의 ‘모습’만을 본다. 나르시시즘인 것이다. 

6) 일부 기생충 내부 기관의 손질, 요직의 교체나 경질 등이 있지만 이것은 기생권력에 어떤 본질적 ‘개편’도 가져오지 못한다. 

7) 이 두 죽음의 실제적 ‘차별성’이라는 측면과 반MB라는 ‘동질성’이 진보그룹들의 난감함이다. 둘 중 어느 것을 택해도 딜레마에 봉착한다. 전자를 택하면 ‘연대’가 사라지고, 후자를 택하면 ‘설명력’이 떨어진다.

8) 이는 김대중의 업적으로 MB가 칭송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상황에서 김대중이 MB권력을 ‘독재’라고 규정한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묻힌다. 

9) Slavoy Zizek, 'How to Begin from the Beginning', New Left Review No. 57 참조. 

10) 그래서 숙주의 건강을 위협하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기생권력의 한계는 권력을 발휘하면 할수록 자신의 근거인 숙주의 건강을 위협한다는 그 사실이다. 이것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와 유비적이다. 

11) 질 들뢰즈 지음, 김상환 옮김, 『차이와 반복』, 5부 5절 참조. “이는 이념 안의 미분비들의 상태나 잠재적 다양체를 가리키는 동시에 질적이고 외연적인 계열들의 상태 -미분비들이 분화되면서 현실화되는 상태-를 가리키기 위함이었다” 이 맥락에서 들뢰즈의 이 개념을 변주하면, 이념적인 차원에서 ‘화해’의 전술을 앞서가고, 외연적인(감각적인) 차원에서 ‘화폐’의 흐름을 앞서가는 공동체(Commune)를 발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유너머N에서 공부합니다.
 
기사입력: 2009/08/23 [21:30]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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