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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레터에 접근하는 법
 
박수철   기사입력  2002/03/19 [15:58]


지난호에 '마타하리는 영화를 뭘로 보는가'라는 기사가 올라온 후 독자게시판의 반응이 뜨거웠다. 영화를 감상하는 법에 대해 박수철 기자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한다.



{IMAGE1_LEFT}대자보가 생긴 이래 문화 기사에 대한 논란이 이렇게 심화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일단 놀랐다. 하지만 이것은 '러브 레터'라는 영화 하나만의 문제를 떠나서 왜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인가, 또는 우리가 영화를 대하는 수용 자세에 관한 문제인 것 같다.

항상 영화는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반대급부인 영화를 보고 수용하는 관객의 문제이기도 하기에. 또한 영화와 영화를 보는 관객 사이의 소통이 원활해야만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고 보고 즐기는 문화가 건전히 육성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수용문제는 영화를 잘 만드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영화의 관람 자체가 어둠 속에서 영화를 보는 스크린과 나와의 1 : 1 문제이기에, 그러한 정적이고 아주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마치 정답이 있듯이 답을 내린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1.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를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즐거운 여가 활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영화를 보기 전에 미리 사전 준비(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 그리고 감독의 예전 영화를 미리 본다든지 하는)를 해서 영화를 공부하듯 볼 수도 있고, 또한 특별히 특정한 목적으로 영화를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특정한 목적 때문에 영화를 본다면 영화를 대하는 태도는 매우 틀려질 것이며 그 영화에 대한 개개인의 생각이 천차만별로 나타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기에 사람에 따라서 영화는 달콤한 솜사탕이 될 수도 있고, 영화 교과서가 될 수도 있고, 6,000원과 시간이 아까울 수도 있고, 또 그냥 그런 영화가 될 수도 있다. 논란이 되는 '러브 레터'도 마찬가지다.

2. 영화평 아니 영화 안내

二十一世紀映畵讀本은 영화평이라고 하기 힘들다. 차라리 영화 안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 스스로 글을 쓰면서도 이러한 영화들을 사람들이 봐 주었으면 그리고 이러한 영화들을 볼 때 이러한 것은 좀 알고 보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글을 쓴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자료를 최대한 찾고, 그 영화를 보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글쓰기는 그 영화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없이는 잘 안된다는 것은 매번 글을 쓰면서 느끼는 일이다.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보고 그것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영화 관람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영화를 대할 때 좀 더 애정을 가져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지나친 요구일까.

3. 어려운 영화, 이해하기 힘든 영화

보기 힘들고 어려운 영화들은 많이 있다. 그 유명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을 일반인들이 제대로 보아내기는 엄청 힘이 든다. 그리고 그것은 한 영화 한다는 영화 전문가들도 사실 힘들기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처음에 '희생'을 보았을 때 엄청 졸면서 봤고, 나와서도 줄거리도 정확히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 '노스탤지어'의 개봉이 적잖이 부담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노스탤지아'를 보기 전에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이라는 책도 보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적 공간에 분명 영향을 주었을 법한 유럽 미술사의 흐름도 살펴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후에 '노스탤지어'란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는 분명 '희생'보다는 훨씬 재미있게 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들 그렇게 어렵게 공부를 해 가면서까지 볼 필요는 없다. 그런 영화 교과서 같은 영화들은 그런 공부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공부하면서 볼 영화이고, 또한 서구의 미술사의 흐름을 아는 사람들이 그의 공간에 대해 필요한 부분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심지어 주변에 있는 한 촬영감독은 그 영화의 한 프레임에 경도 되어 그 스틸사진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러기에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일반인에게 소개할 때는 이러한 점의 상세한 설명과 더불어 유럽 영화의 역사적 배경까지 설명해 주는 것이 정말 올바른 영화 안내가 될 것이다. 자기도 모르면서 명작이라고 떠들 것이 아니라.  

4. 일본 영화

이런 점에서는 일본 영화도 마찬가지다. 사실 일본 영화는 우리 영화보다 외국에 많이 알려져 있고, 영향력도 크다.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찌 겐지, 구로사와 아끼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은 무시할 수 없으며, 그들의 영화에서 미국과 다른 국가들도 수없이 영화적 이미지들을 차용해서 사용해 왔다.

이러한 일본 영화는 거품이 아니라 분명 실체가 있으며 그 실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필름으로 영화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반길만한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예술 영화라고 소개되었던 다른 영화들의 경우와도 마찬가지다. 영화 교과서에만 나와 있는 영화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되어 지고 있는 '러브 레터'도 마찬가지다. '러브 레터'가 일본 영화라고 흥분할 일도 아니며, 그것을 거품이라고 평가 절하할 필요도 없다. 일본 영화도 다른 영화들과 동일 선상에 놓고 보고, 스스로 평가하면 될 일이다. 물론 이 영화가 일본에서 그리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점은 사실이다. (영화 교과서에 나오는 예술(?)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한국에서 흥행하는 것이 일본 영화의 거품이라고 단정 내릴 수도 없다. 먼저 개봉되었던 일본 영화가 흥행에서 실패했던 점을 보면 '러브 레터'는 분명 한국 관객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러브 레터'만의 특이한 감수성이 어디서 나온 것이며 우리 영화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영화를 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5. 영화 보기, 영화 읽기, 영화 즐기기

지금까지 다시 한번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결국 이야기는 매 한가지이다. 영화를 보는 행위가 원초적으로 개인적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영화 보기를 공적인 글로 표현하고 그것이 다른 많은 이들에게 읽혀진다고 가정할 때는 좀 더 신중히 그 영화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글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데에 있어 도움이 되어야 한다. 무책임한 단정보다는 오히려 이야기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 낫다. 내가 아무리 '꽝'이라고 하는 영화도 다른 이가 그와 다른 무엇인가를 느꼈다면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영화를 보고, 때론 읽고, 즐긴다는 것이 영화와 나와의 소통에서 끝나지 않고, 그 영화를 본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으로 이어지려면.
  
* 본 글은 대자보 26호(1999.12.8)에 발표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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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3/19 [15:5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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