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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벽 쌓은 MB정권, 언론장악의 벽 막아야
[홍헌호의 진단] 미디어법 개정과 파시즘, 87년 민주항쟁 재현될 수 있다
 
홍헌호   기사입력  2009/05/28 [15:34]
경찰이 서울광장에 둥글게 차벽을 둘러 놓았다. 눈여겨 보니 우물을 닮았다. 우물안 개구리들이 떠오른다.
 
우물안 개구리들, 스스로에게 올가미를 씌운다 
 
우물안 개구리들은 우물 밖의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른다. 아니 아는 것을 두려워한다. 오직 세상의 모든 진리가 우물 안에 있다고 믿고 있고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한다. 혹시라도 자신들의 동료들이 우물 밖의 세계에 관심을 가질까 노심초사한다. 그래서 매일 우물 안에 모여 서로를 세뇌시키기도 하고 우물벽을 더 높게 쌓는 일에 열중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극단적인 고립주의와 이분법이 종국에는 스스로에게 올가미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 박정희 전대통령은 평정심을 잃고 차지철이 만들어 놓은 우물 속에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그리고 우물 밖에 대한 적대감만을 키웠다. 결국 그는 측근에게 살해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2004년 탄핵사태도 우물안 개구리들이 스스로에게 올가미를 씌운 대표적인 케이스다. 당시 우물안 개구리들은 전국민이 자신들처럼 노무현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고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들은 우물 안에 모여 1년 내내 노무현은 악마라며 서로를 세뇌시키고 우물 속에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민심의 외면과 쓰라린 패배의 고통이었다. 탄핵을 주도한 이들 중 상당수는 정치생명의 종말을 맞았다.     
 
민심은 하늘과 같은 것이다
 
5년 뒤 머리 나쁜 우물안 개구리들은 또다시 그 실수를 반복했다. 거의 모든 언론을 장악하고 우물벽을 더 높게 쌓은 후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에 대한 보복은 집요하게 추진되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었다. 용케 그의 측근들의 실수를 포착한 우물안 개구리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극우파 개구리들 중 일부는 노무현이 자살해야 한다는 망언도 서슴치 않았다. 
 
▲     © 대자보

그러나 민심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아닌 우물안 개구리들에게 올가미를 씌웠다. 민심은 본능적으로 법학자들이 말하는 ‘비례의 원칙’을 양자에게 적용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들의 실수는 인정하지만 그것에 비해 우물안 개구리들의 광기가 지나쳤다는 것이 민심의 진단이었다.    
 
상황이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자 우물안 개구리들은 납작 엎드렸다. 국민들이 이번 일을 빨리 잊어 주기만을 바라면서 말이다. 간헐적으로 극우파들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난동을 부리기도 하지만 국민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깊은 물은 조용히 흐르고 무서운 개는 짖지 않는다. 지금 민심이 그렇다.
 
민심은 하늘과 같은 것이다. 하늘을 더 넓게 그리고 보다 더 정확하게 보려면 개구리들이 우물 밖으로 빠져 나와야 한다. 설마 우물벽을 더 높이 쌓아야 자신들이 더 똑똑해진다거나 민심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그들은 여전히 우물벽을 쌓는데 열심이다.  
 
귀동냥 지식을 진리라 믿지 말라 
 
이명박 정부가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려면 반대파들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어야 한다. 자신이 모든 진리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정책입안자들이 국책연구소로부터 한두 마디 귀동냥 지식을 얻어와서 검토도 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무조건 진리라고 우기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일례로 이명박 대통령은 여전히 ‘시위가 GDP의 1%를 갉아먹는다’는 KDI의 엉터리 주장을 진리인 양 믿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거짓에 속아 광기를 내뿜다 스스로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불쌍한 개구리 신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제전문가들에 의하면 한국의 지하경제 규모는 GDP의 30%에 달한다. 또 경찰청의 보고서에 따르면 1년 동안 적발된 범죄건수만도 200만 건에 이른다. 이 두 가지가 GDP성장률에 미치는 악영향은 1% 손실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GDP의 30%에 달하는 지하경제와 200만 건의 범죄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악영향에 비하면 시위에 따르는 경제적 손실은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다. 필자는 시위에 따르는 경제적 손실이 GDP의 1%가 아니라 그것의 1/20인 0.05%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방송규제완화로 2만개 일자리 창출? 경천동지할 코미디  
 
미디어법과 관련한 정보통신연구원의 보고서들도 엉터리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신문·방송 겸업허용으로 현재 3만 개의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방송업이 2만 개의 일자리를 추가로 창출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말 그대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산업연관표에 따르면 방송업의 취업계수(10억의 총산출이 어느 정도의 고용을 유지하게 하는지를 나타내는 계수)는 3.5이다. 그런데 취업계수 3.5라는 수치는 전산업 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치이다.
 
전 산업에서 가장 일자리 창출효과가 낮은 방송업에서 신문·방송 겸업허용으로 2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이들의 코미디가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알아 보려면 제조업의 경우를 들여다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제조업의 일자리는 1990년 초 500만개를 넘어섰다가 2008년 400만개 이하로 100만 개 이상 줄어 들었다. 이 기간 동안 제조업의 취업계수는 1995년 8.5, 2000년 5.1, 2003년 4.2로 변화해 왔다.
 
이 수치들로 추정하자면 1990년과 2008년 사이 제조업의 취업계수는 3.5~10.0수준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일자리는 늘어난 것이 아니라 20%나 줄어들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필자가 지난 1월 21일 <대자보>에 쓴 글 "신문·방송 합치면 고용 폭증? 황당한 코미디일 뿐"을 참고하길 바란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정보통신연구원의 연구원들은 2003년 기준 취업계수 3.8에 불과한 방송업이 방송규제완화로 엄청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이들의 눈에는 2000년 이후 케이블TV에 대한 규제완화로 일자리가 전혀 창출되지 않았다는 실증적인 근거는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다. 
 
▲ (출처) : 한국정보통신산업협회, <정보통신산업연보>와 <정보통신산업월보>  

표에서 보다시피 2002년 이후 케이블TV에 대한 규제완화는 일자리 창출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 그들이 단순히 공중파방송의 몫을 빼앗아 가는데 불과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MB정부가 부둥켜 안고 있는 정보통신연구원의 연구보고서들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어느 언론사 기자에게 듣자 하니 정보통신연구원의 연구자들도 취업계수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매우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스스로 실토했다 한다
 
언론 독점, 정권의 파쇼화와 거대한 저항 가져온다
 
MB정부와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개정 시도, 그것은 언론독점을 위한 시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미디어법 개정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전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아니 오히려 언론의 독점이 정권의 파쇼화를 가져와서 국민들의 불신을 증폭시키고 이에 따라 사회갈등을 야기시키는 주요 요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MB정부가 국민들을 화합시키고자 한다면 언론의 공정성부터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언론의 공정성을 회복하려면 언론이 특정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 특히 재벌들에 의해 독점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언론을 재벌에게 넘기면서 언론의 공정성을 운위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코미디일 뿐이다. 언론을 재벌에게 넘기려는 시도는 그 자체가 우물안 개구리들의 우물벽을 더 높게 쌓는 행위에 불과하다.
 
또 MB정부가 국민들을 화합시키고자 한다면 한두 개 언론이 정권에 입맛에 맞지 않는다 하여 이들을 압박해서 모든 언론을 단일 색깔로 일원화시키려는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 그런 시도는 파시스트들이나 하는 것이다.
 
국민들의 진정한 화합을 위해서는 하루빨리 언론의 공정성과 다양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이것이 회복되지 못하면 앞으로의 정국은 파시스트들과 그 반대파들의 격전장이 될 것이다. 파시즘이라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모든 국민들을 단일 색깔로 일원화시키려는 시도, 그것이 바로 파시즘이고 그것이 바로 독재이다. 
* 필자는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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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5/28 [15:3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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