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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여, 미몽과 이기주의에서 깨어나라!
불붙은 서울대 이기주의 논쟁, 대자보 통해 토론활발
 
홍성관   기사입력  2003/10/07 [00:48]

그동안 언론사마다 기자 1명씩은 꼭 배치할 정도로 숱한 이슈를 낳고,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한국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서울대에 이번에는 학생들의 '서울대 이기주의' 논쟁이 불붙고 있다.

'서울대여, 미몽에서 깨어나라!'

▲댓글들이 달린 대자보     ©대자보
이번 논쟁은 지난 9월 중순 이 학교 중앙도서관 복도에 게재된 '서울대여, 미몽에서 깨어나라!'는 제목의 대자보에서 비롯됐다. '민중의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라고 밝힌 이 대자보는 화물연대의 파업 노동자들이 서울대로 진입했을 당시 학생들이 보여준건 따뜻한 연대의 손길이 아닌 싸늘한 외면뿐이었다고 비난하면서, 이것은 서울대가 가진 썩은 정신상태, 민중혐오증의 단적인 예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얼마 전, 한 학생이 이 학교 중앙도서관 복도에서 김밥을 파는 할머니의 김밥을 사먹고 배탈이 났다는 이유로 대학본부에 얘기해서 그 할머니를 쫓아낸 일과 도서관에 타대고시생, 지역주민을 비롯한 비서울대생을 출입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을 언급하면서 이는 노골적으로 이기주의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중의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80년대 이후의 서울대 총학생회장들 중에 단 한 명만이 민주노총에서 일하고 있다는 예를 들면서 서울대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렇게 민중의 삶과 무관하게 관념으로만 진보주의자를 자임하는 까닭에 학생운동을 하던 학생들도 졸업할 때가 되면 별 저항의식 없이 출세지향적인 미래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 대자보는 중앙도서관의 복도에 뿐만 아니라, 서울대 학생들이 이용하는 인터넷 사이트들에도 게재되면서 즉각 이에 대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각 게시판에는 수많은 리플들이 올라와 있으며, 중앙도서관 복도에는 다른 학생들의 대자보가 연이어 붙었다.

'서울대 이기주의를 경계하라'

지난 여름 반미반전 투쟁으로 구속된 적이 있는 농경제 사회학부의 김종현 씨는 관련 대자보에서 우선 "지식을 앞세우는 학생운동의 독선적 태도를 반성한다"면서, 그러나 "이런 서울대 학생운동의 문제가 최근 서울대에 불고 있는 이기주의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자신을 학생운동가라고 밝힌 김 씨는 "지식의 권위를 내세우고, 자기 입맛에 맞는 문제에는 목에 핏대를 세워도 그 외 문제들에는 무관심한 서울대의 학생운동이 민중의 곁을 떠나 한낱 지식인 운동으로 전락한 것이 현주소"라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서울대 입학생 중 상당수가 의대, 한의대를 가기 위해 자퇴하고, 재학생 중 절반 가까이가 고시에 매달리고 있는 현실을 언급하면서, 이제 더 이상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보장해주는 시대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김 씨는 그러나 "서울대 학생들이 격한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노골적인 서울대 이기주의의 발흥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김 씨는 '서울대생들도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며 파업노동자들을 비롯한 외부인들의 학교이용을 금지하고, 타대생 고시생의 도서관 이용을 제한하자는 일부 주장에 대해, "이는 서구에서 실업률이 높아지자 불만의 화살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향하고 백인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극우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지적했다.

또 아무리 취직이 힘들어도 다른 대학생들이 겪고 있는 청년실업에 비할 정도는 아니라면서, 한국의 교육예산 중 상당부분이 지원되는 국립대에서 외부인 이용을 제한하는 것은 명백한 '이기주의'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도서관 자치위원회의 이규진 씨는 "서울대에 시험 쳐서 들어와 등록을 내고 다니는 학생으로서 우리가 먼저 이용하겠다는 것을 이기주의로 보는 것은 잘못됐다"고 반박했다. 이 씨는 도서관은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안방과도 같은 곳으로 아무에게나 내어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면서, 서울대생이 개인 당 몇 천 원뿐인 국세 부담을 진 일반인과 같은 권리를 가질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또 "실정법 상 일반일은 서울대 도서관에 대한 권리가 없다"면서, "이것을 이기적 발상이라는 것은 도덕적인 매도"라고 말했다.

▲대자보앞에 모인 사람들     ©대자보
이어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학생은 '민중의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김종현 씨의 주장은 도덕주의로의 회피이자, 자유주의 시장경제국가 속에서의 자유와 권리 개념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나온 것이라며 반박했다.

이 학생은 "도덕주의에 근거하면 반론자를 부도덕한 자로 매도해 반론자의 주장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처럼 묵살해버린다"면서, "다원주의·자유주의에 입각한 시장경제를 선택한 나라에서 개개인들의 법에 근거한 자유로운 권리 주장과 다양한 욕구에 따른 이기심의 추구를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개인의 출세를 위해 고시를 준비하든, 학생회장이었던 사람이 현재 운동을 하지 않던 간에 그것은 개인의 선택일 뿐이라면서 서울대생에게 민중에 대한 의무감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피력했다. 덧붙여 서울대 학생들만 이용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도서관을 외부인에게 개방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권리남용은 명백한 이기주의

역시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학생은 "도서관 문제는 '영조물 이용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법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더 우선하여 존중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치판단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법학대학 양승엽 씨는 "도서관 좌석 문제에 대해 감정에 치우친 선동이나 어설픈 법논리를 펴기 전에 현실이 어느 정도인가를 되돌아보고 우리 사회에서 상식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바탕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재반론을 펼쳤다.

양 씨는 모든 권리 주장이 타당한 것은 아니라면서, 권리 남용은 명백한 이기주의라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법적인 권리는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고려하는 것"이라면서, 행정부 관리 하에 있는 서울대가 공익을 위해 운영되는 공영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이어 "공영재에 대한 국민의 권리는 보편적이며, 이에 따라 외부인의 서울대 시설 이용에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양 씨는 또 "자유시장 경제체제가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는 없다"고 말하며, "(서울대 일부 학생들의)배타성은 당장 눈앞의 이익은 보장해줄지 몰라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논쟁은 대자보들에 대한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는 등 앞으로도 당분간은 이어질 전망이며, 많은 학생들이 국립 서울대 학생들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생산적인 논쟁으로 발전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취재 후기] 본 기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중앙도서관 복도를 찾았는데, 매번 많은 학생들이 대자보들 앞에 몰려 있었다. 지나가던 학생들도 이런 반응에 궁금해하며 대자보 앞으로 모여들었다. 큼지막하게 출력된 대자보에서 작은 메모에 이르기까지 논쟁의 글은 이어지고 있었고, 이후에도 쉽게 논쟁이 끝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80년대 서울대 운동을 주도하던 핵심 인사 중에 한 명인 백태웅 씨가 고안한 대자보 문화의 상징인 서울대 중앙도서관 복도에는 그간에도 항시 수많은 자보들이 붙어있었으나, 학우들에게는 더덕더덕 붙어있는 식당 스티커와 매일반이었다. 학생운동이 얼마나 학우들로부터 괴리되어 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아쉬운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대자보 논쟁은 운동권과 비운동권이라는 단순히 이분법적인 구조에서 벗어나 다양한 스펙트럼의 색깔들을 아우르는 토론의 장을 형성해갈 단초를 제공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서울대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선에도 관심을 가져주기를, 그리하여 이런 논의가 한 학생의 지적처럼 뜬구름 잡는 놀이로 끝나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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