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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의 마타하리는 영화를 뭘로 보는가?
 
변희재   기사입력  2002/03/07 [13:15]


'딴지일보'의 마타하리라는 사람이 <러브레터>를 비판하면서 "난 모른다. 어쩔래?"식의 논리를 가져왔다. 우리는 흔히 예술작품을 평가할 때 이런 딜레마에 빠진다. "내가 재미없으면 그만이다." 과연 이런 식의 상대주의적 시각의 문제점은 없는 것일까? 이 글은 단지 마타하리를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예술 작품 비평을 할 때 어떤 식의 태도를 가져야하는지 지적해보려 한다.



영화평이란?

{IMAGE1_LEFT}서강대 정치외교학과의 손호철 교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일행 중에 암박사가 있어 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모두들 그의 권위를 인정하여 경청을 하고 영문학자가 있어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면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데, 유독 그래도 명색이 정치학 박사이자 한국 정치가 전공인 내가 한국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면 '네가 뭘 아느냐'고 코방귀를 뀌고 마는 것이다."

조금 다른 의미에서 영화학자들도 비슷한 곤욕을 많이 경험했을 것이다. 90년대 들어서 영화라는 장르가 대중문화의 선두주자로 올라서면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영화평론가로 나서기 시작했다.

영문학 전공의 김성곤, 국문학 전공의 주인석, 영문학 전공의 도정일, 경영학 전공의 김지룡 등이 모두 영화평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타분야 전문가들 말고도 통신상의 영화 동호회에서는 그야말로 전문가를 능가하는 정보력과 분석력을 갖춘 아마튜어 영화평론가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평은 아무나 다 쓸 수 있는 국민 교과목이기도 하고 가장 쓰기 쉬운 글쓰기이기도 하다. 마치 소설을 분석하듯 줄거리만 가지고 쓰는 경우도 허다하다. 내가 이번에 '딴지일보'에 실린 영화평에 대해 구태여 딴지를 걸고 넘어지는 이유도 바로 이런 영화평에 관한 문제제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아무리 개나 소나 다 쓰는 게 영화평이라지만 최소한 자신이 본 영화에 대해서 최소한의 이해와 애정은 가지고 쓰는 것이 비단 영화평 뿐 아니라 예술비평하는 사람의 기본자세이기 때문이다.

마타하리는 입맛 따라 다 가져오는가?

첫 번째 걸린 것은 '딴지일보'의 마타하리라는 사람이 쓴 <러브레터>에 관한 것이다. 이 사람의 논리는 너무나 간단한 삼단논법이다.

1. 재미없는 영화가 인기 있다면 그것은 거품이다.
2. <러브레터>는 재미없다.
3. 고로 <러브레터>는 거품이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자기가 보고 재미없으면 "나는 재미없다." 이렇게까지만 주장했어도 귀엽게 봐주겠다. 그런데 거기서 마구잡이로 밀고 나가면서 <러브레터>를 보고 감동받은 사람들까지 일본 영화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는 논리로 비약시킨다.

그 때, 굴하지 말고 외쳐도 좋다. 어떤 영화든 재미없어 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일본 영화에 대한 환상에 가까운 거품에 주눅들지 마시고, 당당히 외치시라. 주인공 뇬 "와따시와 겡끼뎃쓰으~!" 하듯이 당당하게.

"절라 재미없네! 씨바, 돈 아까워!"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개봉되었을 때도 재미없다고 외쳤던 사람들 몇 명 있었다. 이제 고급문화에 대해 그렇게 주눅들어 있던 시절은 지나갔다. 그런데도 뒷북을 치듯이 거품에 주눅들지 말라는 조언까지 해준다. 요즘에는 영화평 쓰면서 그런 걱정까지 다 해줘야 하나?

자, 그럼 마타하리라는 사람이 뭘 가지고 <러브레터>를 이렇게 하찮게 평가하는지 살펴보자.

사람들이 기대하는 애절절절하고 설레이고 짜릿한, 거런 러부레타는 없다. 편지의 기능은 그저 과거 회상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편지에 얽힌 짜릿하고 가슴 아려오는 사연을 기대한 대다수의 관객들에게는 쫌 답답한 이야기 전개 방식이다.

원래 약발이 떨어지는 사람일수록 '대다수 국민'이니 '대다수 관객'의 힘을 빌리기 마련이다. 아까는 <러브레터>를 본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문화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며 '내가 제일이다.'식의 엘리트주의적 발상을 하더니 느닷없이 <레브레터>가 대다수의 관객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답답한 이야기 전개 방식을 취했다는 대중추수주의적 비판을 가한다.

둘 중에 하나만 택하라. <러브레터>가 자신이게만 재미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대다수에게도 재미없다는 것인지.

한동원에게 물어봐라.

' 딴지일보'에는 한동원이라는 게 중 좀 나은 영화평을 쓰는 사람이 있다. 마타하리는 한동원 타령을 하면서 한동원도 헛갈렸다느니 한동원도 재미없었다느니 하며 논리를 이어나가는데 한동원은 예전에 한국영화, <러브>를 비판하며 이렇게 글을 쓴 적이 있다.

어쨌든, <러브>는 관객들에게 사랑받기 wanting하고 asking하고 needing 하지만, 정작 관객에게는 거의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하고 계속해서 빚만 지다가 끝나는 짝사랑 영화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사랑'이라는 텅 빈 말을,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이야기를 통해 더 공허한 것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한동원은 <러브>를 무참히 때리면서 새로운 것 하나 없는 통속적인 러브 스토리임을 강조했었다. 즉, 앞서 마타하리가 이야기했듯이 대다수의 관객들이 원한다는 통속적인 스토리 전개를 그는 거부하는 것이다. 뭔가 새롭고 참신한 표현방식을 요구하고 있다.

내가 보기엔 그게 바로 <러브레터>라는 것이다. '러브레터'하면 수업 시간에 숨어 쓰던 아련한 사연을 기대하던 관객들에게 "허허 여자끼리 편지 주고받네."라는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 그런데 마타하리는 돌대가리성 주장을 한다.

걔네가 그렇게 대단하냐? 아직 <러부레타>에 대해 재미없었다는 평을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왜? 이 영화가 그렇게 전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만한 명작, 대작인가? <러부 레타>가 <편지>보다 우리 정서를 더 잘 파악해버렸단 말인가?

<편지>나 <러브>나 통속적인 연애 스토리를 택한 것은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나는 조금 궁금한 것은 한동원이 <편지>를 어떻게 평가할까이다. 설마 <편지>가 <러브레터>보다 더 위에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니겠지?

마타하리는 한동원에게 물어봐라.

대중영화는 어떻게 비평해야 하는가?

마타하리는 <러브레터>를 평하며 이렇게 울부짖었다.

모든 대학 영화동아리가 한번쯤은 안 틀어본 적이 없을 정도의 이 영화에 대한 정도를 넘어서는 환호는, 정상적으로 영화보는 통로가 막힌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확장되고 증폭된 일본영화에 대한 과대평가라고 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다. 이 영화보다 재밌고 가슴 아릿한 로맨스 영화가 진정 없단 말이냐?

더 이상 바보 한 명 데리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두고 마지막 예의로 질문에 답변만 해주며 이제부터 내 이야기를 풀어나가겠다. <러브레터>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는 대중예술 영화이다. 이 영화보다 재밌고 가슴 아릿한 로맨스 영화가 진정없단 말이냐고 묻는다면 '진정'없지는 않겠지만 거의 없다라고는 말할 수 있다.

어차피 이 글은 마타하리라는 바보 하나 잡으려고 쓰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도대체 대중예술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해보려고 한 것이다. 그것을 좀 더 친근한 소재로 풀어가기 위해 마타하리의 글을 인용했을 뿐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중예술 혹은 대중영화 비평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1. 마타하리식으로 "나는 재미없다. 어쩔래?"
2. 고급예술과 비교해서 대중예술을 칼로 내려친다.

우선 1번 방식을 이야기해보자. '인물과사상 11월호에 신경숙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에 관해 초등학교 6학년생이 비판했다. 논리는 세 가지였다.

첫째. 캐릭터에 개성이 없다.
둘째. 소설을 실화같이 썼다.
셋째. 스토리가 밋밋하다.

이런 비판은 정당한 것인가? 초등학생 입장에서는 "난 재미없다. 어쩔래?"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다. 마치 마타하리의 글과 비슷한 맥락이다. 사실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다. 이것은 문화적 다양성 내에서도 차등성이 있는가 없는가, 더 어렵게 말하면 예술의 주객관의 문제에까지 논의가 닿기 때문이다.

나는 좀 선을 그으려한다. 일단 현 체제 내에서 분명히 예술의 차등성은 있다는 말이다. 이런 것을 미학에서는 객관적 상대주의라 부른다. 뭔가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단일 잣대가 적용될 수는 없고 각기 개별 예술 장르에 따라서 수많은 잣대를 사안에 따라 적용해야한다는 것.

왜 현 체제 내에서라는 말을 썼냐고 하면 그 차등적인 잣대라는 것이 결국 부르디외의 말대로 체제 유지를 위한 교육에 영향을 받은 개인적 취미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교육을 받은 부르주아들이 더 고급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것이고 더 다양한 예술 장르를 섭렵할 수 있으므로 문화의 고급과 저급은 결국 계급문제와 맥이 닿아있다.

만약 현 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어서 체제를 뛰어넘어버리는 새로운 예술의 평가 잣대를 추구한다면 우선적으로 상대주의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예전에 카프 문학이 작품성에서 비판을 받을 때 그들은 "작품성을 따지는 잣대는 결국 부르주아적 취미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던 것도 이와 같은 논리이다. 그리고 카프의 주장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예술장르로 인정받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카프가 추구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잣대로 그들의 문학작품이 평가받게 된다. 그것도 쉽게 되는 것은 아니고 치고 박으면서 하나의 방향이 잡히게 되었을 때 가능해진다.

마타하리도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싶다면 나를 비롯한 <러브레터>에 환장한 사람들과 치고 박으면 그만이다.

{IMAGE2_RIGHT} 조금 헛갈린다면 이렇게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러브레터>는 대중영화 중에서도 로맨스류에 속하는 영화이다. 그럼 로맨스 영화들과 비교해서 평가해주면 된다. 즉 <러브레터>와 비교할 만한 다른 영화를 가져와서 함께 평가하여 어느 것이 더 훌륭한지 하나하나 따져보면 된다. 마타하리는 <편지>를 들고 나왔다. 나는 현 체제 내에서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로맨스 영화에 대해 어느 정도의 감상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러브레터>를 위에 두리라 짐작된다.

짐작된다라는 말은 꼭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미적 경험에서의 보편성은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볼 수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타하리 같은 사람이 끝까지 "나는 <러브레터>보다 <편지>가 더 뛰어나다."고 주장한다면 도리없는 일이다. 그러면 나는 한동원을 불러서 "니가 그렇게 씹어버린 <러브>와 <러브레터> 중 어느 것이 더 훌륭한 영화라 생각하느냐?"고 물어볼 수밖에 없다.

만약 한동원이 <러브레터>는 <러브>보다도 더 떨어지는 형편없는 영화라고 말하며 같은 식구 편들기에 나선다면 나는 이번엔 <편지>와 <러브>를 비교해보라는 요구를 할 것이다. 이런 작업들을 계속하다보면 결국 보편적으로 <편지>, <러브>, <러브레터>간의 차등관계가 일정 정도의 범위 내에서 성립될 것이다.

결국 "난 재미없다. 어쩔래?"라는 주장은 개인적으로 생각할 수야 있겠지만 공적으로 떠벌릴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아니 떠벌릴 수야 있겠지만 당연히 거기에 대한 검증은 받아야 하는 것이고 이런 작업을 계속 해주다보면 마타하리는 수긍을 하던지 바보가 되던지 독불장군이 되던지 판단해야 할 것이다.

물론 마타하리의 주장대로 훗날 <러브레터>가 형편없는 영화로 평가되어 내가 바보가 될 수는 있으므로 나 역시 당연히 열린 태도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실 마타하리에게 바보라느니 돌대가리라느니 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마타하리의 글쓰기 방식이 그러니, 나도 같은 언어를 쓴다는 차원에서 그런 표현을 쓴 것뿐이다. 너무 열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2번 경우를 생각해보자. 2번은 고급예술과 비교해서 대중예술을 저급한 예술로 날려버리는 경우라 그랬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이미 예술을 평가하는 잣대를 여러 개를 사용해야한다고 지적했던 점이다.

<편지>, <러브레터>, <러브>는 상호비교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와 완전히 다른 성격의 영화를 가져와서 비교하는 것은 의미없는 짓이다.

마타하리가 또 다시 똘아짓을 한 것은 <러브레터>와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를 비교한 것이다.

관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냐? 하다못해 한 뇬은 귀걸이를 하고 있다던가, 염색을 했다던가, 문신을 새겼다던가 뭐 이런 구별을 도와줄 확실한 뭔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  올해 타계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걸작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피터 셀러즈가 보여준 전설적인 1인 3역에서, 어떤 역들이 같은 배우가 연기한 건지 알아내는게 넘넘 어려웠던거 하구는 완전 대조다.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와 <러브레터>가 도대체 어떤 공통점이 있길래 상호비교를 하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솔직히 말해서 아는 것이 없어서 그랬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일단 장르가 다를 뿐 아니라 1인 2역이라는 구도를 택한 성질도 완전히 다르다.

<러브레터>에서의 1인 2역이 두 인물의 동질화를 택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정녕 모르는가? 이와이 슌지가 바보가 아닌 이상 필요하면 문신이라도 찍어서 구분해줬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안 했다면 아이큐 100이상 되는 사람은 "왜 그랬을까?"라는 생각을 해주는 게 창작자에 대한 예의이다. 더구나 '키노'의 기사를 보면 1인 2역의 두 인물 중 한 명은 사투리를 쓰면서 구분을 해줬다고 한다. 솔직히 나 역시 일어는 한 마디도 모르기 때문에 그것으로 구분하지는 못하고 그냥 30분 동안 헤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돌려 생각할 수는 있었다. 한 남자가 두 명의 여자를 시간 차이를 두고 똑같은 인물로 사랑했었다는 것. 한 여자에게는 그림을 그려주었고 다른 여자에게는 결혼반지를 주었고, 그 두 여자가 너무나 똑같이 생겼다는 것. 이거야말로 개별인간의 한계를 넘어가는 차원의 이동을 통한 사랑이 아니겠냐는 말이다.

마타하리가 <닥터스테레인지 러브>라는 거장의 영화를 빌려와 <러브레터>를 때려버린다면 똑같은 논리로 <한겨레 신문>을 들고 <딴지일보>를 내려쳐도 최소한 마타하리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뭐, 그냥 "그래 우리 못났다. 어쩔래?"그렇게 나오겠지만.

나는 <러브레터>는 통속적인 영화라 생각한다. 통속성의 범주를 대표하는 다섯 가지 요소에 대해 대중예술 미학자 박성봉은 이렇게 분류했었다.

1. 웃음의 해학성
2. 성의 관능성
3. 폭력의 선정성
4. 몽상의 환상성
5. 눈물의 감상성

민족문학계열에서 공지영의 '고등어'를 개패듯이 두들겨 팼던 것도 눈물의 감상성 때문일 것이다. 하나하나 파고 들어가면 세상은 부조리한 것이고 눈물을 흘릴 여유도 없이 모두 칼 들고 일어서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밀어붙이기만 하면 개개인의 삶이 남아나질 못한다.

사랑이라는 것도 예쁘게 찍어놓으니까 아름다워 보이지 실상 얼마나 허무하고 유치한 것인가? 일찍이 에리히 프롬도 현대인의 사랑이 서로에 대한 가치를 교환하는 매매거래의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였듯이 따지고 들어가면 별 것 아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속적인 사랑을 갈망하고 원하지 않던가? 대중예술의 통속성은 바로 이런 측면을 부각시켜주는 것이다. 현대 고급미술에서 남녀간의 사랑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 본 적 있는가? 다 파헤치기만 한다. 그런 것이 맞기야 하겠지만 너무 삶이 힘들어지 않을까? 그 잘난 사르트르나 비트겐슈타인도 통속적인 대중예술을 즐겼다는데 하물며 우리라고 못 즐길 이유가 있겠는가? 어떤 때는 머리를 이리 저리 굴려보는 깊이 있는 예술도 즐기다고  또 다른 때는 <러브레터>같이 감상적인 영화를 즐겨볼 수도 있는 것이다.

자. 그래서 대중예술이 통속성을 강조한다면 일단 그 범위 내에서 생각을 하고 고급예술이 깊이를 강조하면 그 범위 내에서 평가하자. 그렇게 분리해서 생각을 해주면서 서로 합일 지점이 있을 때 하나하나 합쳐 나가면 결국 통속성과 깊이는 어느 시점에서 그 벽을 허물 수 있게 될 지도 모른다.

결론을 대신하며

이번 글은 솔직히 '딴지일보'의 마타하리의 글을 비판하면서 시작했다. 그런데 쓰다보니 의외로 예술의 평가에 대해 깊이 들어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 인식능력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두려움도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주제만 던져놓고 빠져나가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대중예술이든 고급예술이든 그것을 감상한다면 창작자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은 동반되야 한다는 것이다.

"나, 모른다. 어쩔래?"식의 비판은 꼭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 운동에 대해 냉소적 시각을 보였던 사람들의 시각과 닮았다. 하나하나 따져들어가보면서 즐기는 버릇은 단지 예술 작품 감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현상에까지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고 잘 모르겠으면 모른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지 말고 주위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보고 그래봐라. 그런 것이 최소한 잡글이라도 쓰는 사람의 기본 자세이다.

설마 내가 마타하리와 논쟁이라도 벌이려고 이 글을 썼겠는가? 예술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누구나 마주하는 딜렘마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해결방식을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더불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식의 태도에 대해서도 제동을 걸어보고 싶었다.

내가 아는 '딴지일보'의 필진들은 특정분야에 대해서 일정 정도 이상의 식견은 가지고 있었다. 마타하리도 좋은 선배들에게 많이 배웠으면 좋겠다.

내가 '국어작문'이라는 수업에서 누누히 들었던 말을 마타하리에게 해주고 싶다.

"머리를 비워놓지 마라."

그리고 시간 나면 대자보 25호에 실린 박수철 기자의 영화평, '러브레터'를 읽어봤으면 좋겠다.

* 본 글은 대자보25호(1999.1.23)에 발표되었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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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3/07 [13:1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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