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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의 사생아 조선일보
촛불집회를 계기로 되돌아 보는 조선일보의 친일
 
방학진   기사입력  2008/07/19 [12:03]
천황폐하의 거룩한 위엄과 덕망(天皇陛下의 御威德). 1940.1.1. 민족정론지, 그러나 일장기를 머리에 이고있는 조선일보

굴욕적 한미 쇠고기협상으로 촉발된 촛불집회는 급기야 그동안 국민의 눈과 귀를 밥 먹듯이 속여 온 조선, 중앙, 동아, 문화일보같은 신문들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안티조선’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조선일보의 오랜 왜곡보도 행태에 대한 반대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 경우처럼 광고주를 직접 압박하는 등 실질적인 타격을 가하는 적극적인 방식은 처음인 것 같다. 특히 친일 교과서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뉴라이트측의 역사교과서 발간 등과 더불어 조선일보의 친일행적이 새삼 시민들의 기억을 자극하고 있다. 이번 달에서는 자칭 ‘민족지’ 운운하는 조선일보의 태생을 되짚어 보도록 하자.

3ㆍ1운동의 위력을 실감한 일제는 조선 통치가 기존의 위압적 방식으로는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한다. 이른바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전환하여,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무관 총독제를 문무관 총독제로 전환한다. 이후 조선 총독으로 새로 부임한 총독 사이토는 ‘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을 내걸고 본격적인 문화통치를 실시하는데, 조선인 관리의 임용 범위를 넓히는 한편 “언론, 출판, 집회 등에 대하여서는 상당한 고려를 두어 민의 창달에 기할 것”을 천명한다. 그 결과 총독부 정책을 홍보하던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이 독점하던 신문시장에 민간지가 출현하게 된다. 곧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의 창간이다. ‘실업신문’을 표방한 조선일보는 친일단체 대정실업친목회의 조진태(사장) - 예종석(발행인) 체제로 출발했다. 동아일보가 창간부터 현재까지 김성수 가계를 중심으로 한 차례도 경영권을 상실한 적이 없는 데 반해 조선일보는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게 되는데 조선일보의 경영권 변화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920. 3~1921. 4 친일단체 대정실업친목회
1921. 4~1924. 9 대표적 친일파 송병준
1924. 9~1933. 1 민족진영 운동가 신석우
1933. 1~1940. 8 서북 출신 광산업자 방응모


방응모
동아일보의 경우 호남 재벌 김성수의 사업수완과 재력으로 말미암아 창간부터 경영의 주도권 변화가 없었는데 반해, 조선일보는 처음부터 여러 가지 상반된 입장을 가진 인적 구성을 이룬다. 예를 들어 친일 성향의 경영진 아래 사회주의 또는 민족주의 성향의 기자들이 공존한다거나, 또는 친일과 반일 성향의 편집진들이 공존하는 식이었다. 때문에 이윤추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일관된 경영은 어려웠다. 신석우 체제 말기에는 조선일보에 대한 경영권 다툼이 벌어져 급기야 같은 제호의 두 개의 조선일보가 나오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이러한 혼란을 평정(?)한 이가 바로 방응모다.

몰락해 가는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는 “일등 가는 사람 찾아 일등 대우 해주라”며 당시 동아일보에 있던 이광수, 서춘, 주요한 등을 최고의 대우로 스카우트한다. 이에 대해 당시 자료는 이렇게 설명한다.

동아일보 대 조선일보의 정면충돌 (<삼천리> 1935년 8월 1일)
우리가 보기에 양 신문이 충돌할 위기는 과거에 3, 4차나 있었다. 첫째로 이광수, 서춘, 함상훈 등, 동아 중진이 조선에 이거하든 때다. 말하자면 인재쟁탈전이었다.


그러면 방응모가 ‘인재’로 여기던 서춘, 주요한, 이광수는 누구인가. 한때 동경유학 시절 2.8 독립선언에 참가하는 등 항일운동에 가담해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던 서춘은 1996년 김희선, 박연서, 장응진, 정광조 등과 함께 친일행각이 들통 나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서훈이 박탈되는 불명예의 주인공이 되었다. 시 ‘불놀이’로 유명한 주요한. 그의 창씨명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의 고이치(紘一)가 일본의 조국 이념인 '팔굉일우'(八紘一宇)에서 따온 것임은 너무나 분명하다. 방응모가 일등 인재의 대표격으로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스카우트 해 온 이광수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 석방된 후 본격적 친일행위에 나섰다. 대표적 친일문인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과 ‘내선일체의 실천을 위하여 일본정신을 깨닫고 황도를 따르자’는 황도학회 발기인 대표를 비롯해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대동아문학자대회, 조선문인보국회, 대화동맹, 조선언론보국회, 대의당 등 온갖 친일단체에 참여하여 황국신민화, 징병, 징용, 학병, 정신대 권고문 따위의 많은 글을 써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을 했다. 그가 지은 친일음악에 쓰인 가사는 그 양이 방대하고 노골적인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히총통의 대사자후. 민족정론지, 그러나 나찌를 옹호한 조선일보
방응모가 이처럼 ‘일등인재’를 모아 대변화를 이룬 조선일보는 이전에 비해 월등한 이윤과 경영 성과를 내기는 했지만 그 동안 그나마 어렴풋하게 유지해 오던 항일 논조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때의 조선일보의 경향을 굳이 이야기하자면 ‘시류 영합’과 ‘상업지 지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조선일보의 변화에 대해서는 현재 조선일보 옹호의 첨병 구실을 하고 있는 원로 언론학자인 정진석 교수조차 이렇게 말한바 있다.

“동아와 조선은 민족지로 불러도 좋을 정도로 항일적인 제작 태도와 이에 걸맞는 논조를 보인 때도 분명히 있었다. 조선 민중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민중(또는 민족)의 표현 기관, 또는 민족 진영의 구심체로 인식하였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의 지면을 놓고 보면 민족지로 부를 수 없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3대 민간 신문이 정론지였느냐, 아니면 상업지였느냐 하는 문제도 간단히 결론 내리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에도 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으며, 오늘날에도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0년대의 동아, 조선의 논조는 1920년대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분명히 크게 달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근대언론의 재조명 / 정진석․이정식․이만열․김봉진․V.찬드라 / 민음사 / 1996)


조선일보가 바뀌게 되는 시기를 ‘1930년대’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이후라고 말하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이처럼 방응모의 조선일보는 민족지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1919년 3․1운동의 결과로 1919년 4월 13일 망명정부일망정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옥동자가 만들어졌다면 국내에서는 총독부의 시나리오에 의해 조선일보라는 사생아가 만들어진 셈이다. 다음 달에는 이어서 철저한 이윤추구형 기업인이었던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통해 벌이는 노골적이며 적극적인 친일행위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 필자인 방학진님은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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