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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숨어있기 좋은 방, 신이현/도서출판 살림/1994
 
노영주   기사입력  2002/01/30 [16:10]

대기만성(大器晩成)은 흔히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이 말의 출전이 노자인 만큼 여기에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공자라면 모를까, 그 말은 노자의 가르침에는 전적으로 위배되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성어는 원래 대기만성이 아닌 대기면성(大器免成)이었음이 밝혀졌다. 그 말을 풀이해보면 '큰 그릇은 이루어짐을 면한다' 혹은 '큰 그릇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 보인다'는 의미인데, 아하, 그제서야 아귀가 들어맞는다.

장자의 붕,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 니체의 어린아이 등 동서고금을 통틀어 모든 위대한 영혼들이 꿈꾸어온 것은 너무도 거대한 것이어서 그것은 흔히 아무것도 아닌 듯 보였다.

이 책은 '성장 소설'이다. 하지만 그것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나, 심지어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소설들을 지칭할 때와는 다른 의미이다. 일례로, 스물 두 살의 불문과 중퇴생인 주인공은 과거 1년 간의 대학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책이라고 몇 권 끼고 잔디 새순을 밟으며 어슬렁거리다가 휴강을 한다고 하면 좋아라 만세를 부르며 기념으로 술집으로 뛰어가는 이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 대학이었다. 물론, 도서관을 들락거리거나 그럴 듯해 보이는 모임에 참여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참된 대학인'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꽤 노력을 하는 이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데도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스터디니 뭐니 하면서 알고 싶지도 않은 이론에 핏대를 올리는 따위는 정말 질색이었다. 도대체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나는 늘 뒤에 앉아서 이렇게 투덜거리며 일 년을 보냈다. (p59)

제대로 된 성장 소설의 주인공이라면(<호밀밭의 파수꾼>은 약간 다르지만) 그런 '투덜거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화를 냈으면 화를 냈지 구시렁거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책 전체를 통틀어 이금이 '진지하게' 화를 내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그녀가 노상 입에 달고 사는 말은 쳇, 핏, 제기랄 따위의 건들건들 변죽을 울리는 말이며, 그녀의 감정 상태 역시 '기쁜, 슬픈, 화나는' 같은 명확한 감정이 아닌 '우울한, 불안한, 한심스러운, 귀찮은'처럼 스스로도 분명치 않은 이상한 감정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냥 '성장 소설'이 아니라 '환상적 성장 소설'이다. 그것은 주인공 이금이 결코 '행복한 귀환'을 할 수 없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작가는 '현실 원칙'과 '쾌락 원칙'을 성숙하게 조율하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쾌락원칙'을 끝까지 밀고 나가, 마침내 그 스스로의 파멸, 그것의 어둡고 기괴한 승리를 그린다.

돌아온 탕자는 쳐 죽여야 한다. 왜냐하면 돌아온 탕자는 더 나쁜 것(보수 반동)을 가져오니까. 또 돌아온 탕자만큼 우리를 왜소하게 하는 것은 없다. 진정한 탕자는 한 방울의 물이나 한 점의 떡도 지니지 않은 채, 약대도 없이 사막 끝으로 나가 죽어야 한다. 한 곳이 아니라, 점점이, 여러 곳에! 그리고 탕자들이 뼈를 묻은 곳에서 또 다른 탕자가 숱하게 다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의 오아시스 주위에만 국한되지 않은 더 넓은 세계를 자신의 인성으로 삼을 수 있게 되고, 마지막엔 인간도 신과 같이 될 것이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中

우리의 문학사에 과연 그토록 불모한 작품이 존재했던가? 다시 말해, 돌아오지 않은 탕자가 몇이나 있었던가? 아마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대중적인 탕자는 <사람의 아들>의 민요섭 정도일 텐데, 그런 '쳐 죽여야' 마땅한 탕자를 마치 진짜배기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 틈에서 '사막 끝에 뼈를 묻는' 탕자를 기대하는 것은 과한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대한 평자들의 냉담함은 아마 거기에서 기인하는 것일 게다. 외국도 그러한데 하물며 우리나라에서 이런 식의 '진짜 탕아'는 지나치게 낯설다. 실제로, 이금에 대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늘 입으로는 '예술하는 사람이 가장 존경스럽다'(p210)고 말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리다

아마도, 윤이금이라는 인간에 관한 가장 정확한 평이라면 고등학교 윤리 선생님인 휘종의 아버지 즉, 이금의 시아버지가 내뱉은 다음과 같은 말일 것이다.  

시끄러워! 쟨 원인도 뭐도 없어. 정신이 돌아버린 애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망나니짓을! 이건 가정교육의 문제도 훨씬 넘어섰어. 정말 남 볼까 부끄럽네!(p185)

사실이다. 이금에게는 원·인·도·뭐·도·없·다. 혹시 불우한 가정 환경 때문이 아니겠냐고? 웃기는 소리. 그렇다면 집을 나가서 부랑아가 돼버린 아버지를 끝까지 경멸해야 마땅하지 '아버지는 뭔가, 이야기가 통하는 매력적인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p92)을 할 리 없다. 아버지뿐 아니다. 그녀가 친근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회에서 소외된 한심한 인간들, 모든 권리를 잃어버린 대신 모든 의무로부터도 자유로운(혹은 역의 경우), '아무것도 아닌' 인간들뿐이다. 그것은 그녀가 '어쩔 수 없이' 타고난 기질이거나 혹은… 어느 샌가 품어버린 우스꽝스러울 만큼 거대한 꿈, 어쩌면 그 둘의 필연적인 결합이다. 이런 식의 기질이 다른 경우보다 고결하다고 고집할 생각은 내겐 전혀 없다. 다만, 그것은 그저 하나의 '성향'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그 성향이 내포하고 있는 뭔가가 내게는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의무 따윈 개한테나 던져주라지."라는 식의 생각은 비단 이금만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악착같이 '권리'를 주장하는 대개의 사람들과 달리 이금은 의무를 저버림과 동시에 권리 또한 포기해야 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당연히, 그녀에겐 원한이란 게 없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예사롭지 않은' 그 무엇이다. 그녀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 누구보다 솟구치는 연민을 갖고 있지만 그들에게 그 마음은 끝내 전해지지 못한다. 그녀가 원하지 않으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사랑을, 연민을 드러낸다는 것만큼 무지막지한 권리 주장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향한 화가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으며, 스치는 친절에 누구보다 민감하다.('나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말을 해주다니,'(p246))    

그런 그녀를 '왜곡되지' 않은 모습으로 만들어주는 단 하나의 인간이 바로 태정이다. 직장 상사의 면상에 재떨이를 날려버린 이금이 술을 마시며 하릴없이 거리를 쏘다니다가 만난 그 남자, 태정. '수배된 자들이나 몸을 숨기기 위해 캄캄한 밤에 남몰래 드나들 것 같은'(p22) 여관으로 이금이 그를 따라 들어가게 된 건 순전히 여관 앞에 심어져 있는 '오동나무' 때문이었다.(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그 오동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아쉽게도 건너뛰어야 할 테지만, 이금이 그 나무와 처음 만난 순간 '괜찮아, 그냥 흘러가는 대로 맡겨둬보라구.' 하는 말을 분·명·히 들었다고 생각한다는 것만은 밝혀두어야 하겠다.)  

'이제 막 성숙해지기 시작한 소녀 같은 몸'(p27)을 지닌 태정(그뿐 아니라 이금의 일탈에 동참하는 모든 남자는 그렇게 빈약하고 작은 몸을 지녔다.)은 여행중인 사람일 거라는 짐작과는 달리 3개월째 이 여관에서 생활하고 있는 장기 투숙자였다. '있는 대로 꼬부리고 누워'(p27) 잠을 자고, '기차가 한 번씩 오고 갈 때마다 뭉텅뭉텅 시간이 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며(p35) 안심하고 위로를 받는, 잠자는 남자, 술 마시는 남자, 귀찮은 남자, 꼬질꼬질한 남자, 한심스러운 남자, 아무것도 아닌 남자.  

(…) 이렇게 길을 따라 주욱, 걸어갈 때가 제일 좋아.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는 이 느낌, 완전히 버려진 듯한 이 느낌이 좋아. 휴지처럼 길거리에 팽개쳐진 그런 기분 알아? 그냥, 내가 하늘에서 이곳으로 뚝 떨어진 기분이거든.

이것이 이 별볼일없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쌍둥이 왕자'의 기분을 이금이 모를 리 없다. "그리고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라는 태정의 질문에 그녀는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쳇…… 뻔하지 뭐. 미친놈처럼 걸어다니다 여관으로 들어가는 것이겠지. 거기에 드러누워 있으면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 기분이 들겠지. 완전히 내던져진 기분이 들겠지. 넌 한 집안의 남자이기를 포기했어……."

'집이 아닌 어디라도' 상관없다는 태정은 그러나 결코 '여행자'라 불릴 수는 없다. '목적'이 있는 길은 떠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차라리 '부랑아'에 가깝다. 이금 역시 마찬가지고. 그런 그들의 표류는 그러므로 랭보식의 '도도하고 잔인한' 출항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육체는 슬프다. 아! 나는 모든 책을 읽어버렸다'라는 말라르메적인 기조, 혹은 '늘 취해 있어야 한다'라는 보들레르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일례로, 그런 '한심스러운 항해'의 삼 일째 되던 날 충동적으로 바다로 가자!고 외치던 그들은 막상 여관 대문 앞에 서자 '뭔가 미심쩍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이렇게 묻는다. '정말 밖으로 나갈 거야?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바다에 가면 뭐가 있는데?'(36) 결국 그들이 간 곳은 바다가 아닌 여관 베란다. 말썽 많은 기름 버너와 쓰레기통에서 뒤진 재료들로 만들어진 요리가 그들의 해수욕 풍경인 것이다. 그리고 그날 비로소 그녀는 늘 싸움에서 교성으로 이어지는 기묘한 동거 생활을 하고 있는 옆방 사람들,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예쁜이 일루 와… 미친 새끼. 또 시작이야. 여보… 내 예쁜이 일루 와 봐… 내 인생… 넌 내 인생을, 나를 망쳐놨어, 불쌍한 내 새끼들, 가엾은 것들! 보고 싶어. 그 애들이 보고 싶어! 챙캉, 철썩, 킹킹. 자자, 쉬이…쉬이…오…하…오…!(p28)

'내 귀를 의심해야 할지 내 눈을 의심해야 할지 알 수 없'는(p39) 그 추한 몰골의 늙어빠진 사람들을 보고 이금은 잠시 멍해진다.

"난 저 사람들 얼굴 봤어. 깜짝 놀랬어."
"왜?"
"내가 아는 사람인 줄 알았거든."
"누구?"
"우리 아버지!"
태정이 비명을 지르며 웃었다.(p41)

… 이렇게 '서로의 흠집에 꼭 들어맞는' 이금과 태정이지만 어쨌거나 이곳, 육체라는 무거운 짐을 질질 끌고 다녀야 하는 이 생에서의 이야기인 만큼 그들 쌍둥이는 영속적으로 결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금은 번번이 그곳을 떠나고,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길 원했던'(p199) 이금의 뱃속에 들어앉아 꼼짝 마, 하고 총구를 겨누고 있던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리하여 그녀는 다시금 태정을 찾는다. 하지만 언제라도 변함없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던 태정의 방은 텅 비어 있었고 그녀는 '금방 무덤에서 올라온 것 같은'(p218) 모습의 여관집 할머니에게서 태정의 죽음을 전해듣는다.

그 소식을 접한 이금의 행동, 심리상태에 대한 다음 세 페이지의 서술은 지금껏 우리 소설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뛰어난 '反서정적 詩', 사랑과 상실에 관한 서걱이는 소묘이다.  

'내가 그를 사랑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와 함께 나는 신나게 웃어댈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함께 침대 위에서 뒹굴었고 술을 마셨고 담배를 피웠다. 그것은 사랑했다는 것보다 더 대단한 것이었다.(…)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 그때도 나는 외로웠고 혼자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없는 지금은 훨씬 더 외롭게 느껴졌다. 나는 진짜, 완전히 혼자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아아, 나의 쌍둥이 왕자…… 나는 육교 난간으로 허리를 고꾸러뜨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금이 '마귀의 자식, 개 같은 년, 창녀'라는 욕을 들으며 시댁에서 쫓겨난 것은 독자에게나 혹은 이금에게나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결국 그녀가 다시 찾은 곳은 오동나무가 있는 태정의 여관방.

'지금 나는 그 옛날, 태정과 함께 했던 방에서 세 번째의 남자와 살고 있다.'로 시작하는 마지막 페이지는 지극히 드문 '진짜 탕아'가 탄생하는 역사적 순간이다. 대부분의 탕아들은 민요섭처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거나, 혹은 너무도 손쉬운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이곳에서 도피했다. 하지만 이금은 그 무엇보다 힘든 일, 바로 '일상'이라는 절망적인 길 위에서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를 체현해내는 길을 선택했다.

*
신이현은 우리나라 문단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작가적 허영에서 승리한, 혹은 '거꾸로 된 허영'을 실천하는 작가이다. 당연히, 그녀의 작품은 희극의 형식을 띤다. 쿤데라의 말을 빌리자면 비극은 우리에게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멋진 환상을 줌으로써 위안을 제공하지만 희극은 이보다 훨씬 혹독하다. 그것은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까닭이다. 얼핏 보면 단순한 패배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윤이금이라는 주인공의 무위 속에는, 그리하여 결코 희극적이지 않은 결연한 의지가 숨어있는 것이다.

'오 한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위의 시는 최승자의 「악순환」이라는 시의 마지막 연이다. 거기에 딱 한 문장만 보태보자.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테야.'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 글은 대기만성을 부르짖는 세상에 포위된 채 대기면성을 꿈꾸는 낯설고 매혹적인 세이렌(Siren)의 노랫소리가 된다. 그러나 차라리 나무라면 무하유향(無何有鄕)―무위무작(無爲無作)의 절대 자유의 경지. 장자가 추구한 무위자연의 이상향을 뜻한다고도 한다―의 광막한 들판에서 도끼날에 찍히지 않은 채 편안히 대기면성을 즐길 수 있겠으나 인간은 그럴 수가 없으니,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그러한 인간 조건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연민이다.

'나는 아직도 서른이 되지 못했고 그것은 여전히 멀고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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