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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명문 대입학원이 됐습니다
미국 롱아일랜드 학원 전영희 대표 인터뷰
 
김철관   기사입력  2003/08/29 [02:43]

▲전영희 대표     ©김철관
"5년 후 고국에 돌아와 살고싶어요.” 85년 말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인해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가 고생 끝에 90년 초 미국 동부 뉴욕주 롱아일랜드에서 최초의 대학 입시학원 ‘롱아일랜드 아카데미’를 세워 성공한 전영희(44) 대표.

그가 지난 22일, 남편 김영배 씨와 함께 2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80년 초 돈암동 고갯마루 판자촌에 살며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화장품 행상으로 간신히 대학을 졸업한 그는 가난을 이기기 위해 무작정 관광비자를 갖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 때 그에 손에 쥐어진 돈은 180불 정도.

미국 뉴욕에 도착한 그는 숱한 고생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금융 중간상에서 사무를 보기도 했고 자동차 유리 갈아주는 회사, 학원 사무 등을 전전하며 역경을 극복해 간다.

“처음 미국에 도착해 신문 광고를 보고 취업을 했지요. 주급 300불 정도를 받고 금융관련 업무도 해봤고 포드, 캐딜락 등 자동차 유리가 깨지면 갈아주는 유리가게에서도 일을 했었지요. 물론 제가 일하는 곳은 대부분 한국 사람이 경영한 곳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너무 막막한 생활을 했지요.”

▲전영희 대표     ©김철관
그는 힘든 일과에도 어렵게 번 돈을 서울에 있는 어려운 가족들을 위해 매달  800불 정도를 어머니에게 송금했다. 어쨋든 미국 돈을 한국에 부친 효녀며, 한편으로는 애국자였던 것이었다.

미국 뉴욕 생활 3년째가 되면서 뭔가 조그만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생각한 그는 미국생활을 하며 평소 알고 지낸 중국인 여성 베티(Petty, 42)와 동업을 모색한다. 당시 베티(42)는 중국 정부가 보낸 국비 유학생으로 뉴욕시립대학에서 석사과정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현재도 베티와 동업을 하며 ‘롱아일랜드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의기투합해 각각 2만5천불(한화 6000만원)의 사업 자금 마련에 성공한다..

 전 대표는 잘 아는 한국인으로부터 돈을 어렵게 빌렸고 두 살 적은  베티는 자신이 직접 아르바이트를 해 번돈 이었다. 이렇게 해 90년초 롱아일랜드 싸요셋(Syosset)지역 지하실에  ‘롱아일랜드 아카데미’라는 대학입시학원을 개업해 뉴욕타임즈에 학원 강사 구인광고 및 학생 모집광고를 내게 된다.

▲전영희 대표     ©김철관
 “유태인계와 이태리계 학교 선생들이 학원 파트타임 강사로 신청을 많이 했습니다. 현재 한국은 정규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과외 학원에 나가 강의를 할 수 없지만 미국은 달라요. 자신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학생만 가르치지 않으면 되지요. 당시 제가 운영한 대입 입시학원이 롱아일랜드에 최초로 개설돼 수강생 100여명이 한꺼번에 수강 신청을 한 쾌거를 올렸어요. 강사 선생님들도 쉽게 구했고요.“

 대학입시학원 2년 만에 빌린 돈 2만5천불을 단번에 갚게 된다. 현재는 학원도 확장했고 수강생도 많이 늘어 꾸준히 300명 정도가 수업을 듣고 있다.

”서울 강남 8학군처럼 이곳 부모님들의 교육열도 대단히 높습니다. 그래서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옵니다. 연간 명문 하버드 입학생이 두 명 정도 배출되고 있고요. 미국 명문대학이라고 손꼽을 만한 동부지역 아이비 리그(하버드, 브라운, 콜롬비아, 유팬, 예일, 코넷, 닥터멀스, 프린스턴)와 서부지역 스탠퍼드, 버클리 등을 모두 합치면 연 20여명 정도 배출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런 결과는 강사들의 실력이라기보다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롱아일랜드 지역 싸요셋 마을에 위치한 그의 학원은 유명학원이 돼 현재 이 지역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곳 학원을 다닌 학생들의 국가별 분포는 한국인 40%, 중국인 40%, 인도인 20% 순 이라고 그는 말했다. 한국인 학생 중 부모의 사업실패 등으로 인해 5%에 해당하는 학생들을 위해 무료 수강을 해주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또 몇 년 전까지 한국의 불우한 이웃을 위해 수익금의 일부를 기부금으로 정산해 한국 불우이웃 단체로 보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학원 일이 바빠지면서 현재 기부금 정산을 못한 상태다.

 ”미국도 기부금제도가 많습니다.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는 누구든지 불쌍한 사람이라면 무조건 도와야 하는데 저는 미국보다 한국의 불우이웃을 돕기로 결정해 꾸준히 도와왔지요. 이곳 학원은 불황도 없는데다가 2년 전부터 학원 일이 바빠지면서 제 건강도 무척 나빠졌습니다.  건강관리를 소홀히 했나봅니다. 제가 직접 기부금 정산을 해야 가능한 일인데 그렇지 못해 아쉽습니다. 물론 게으른 탓이라고 해야 되겠지요(웃음). 이제부터 한국 불우이웃을 위해 제가 직접 기부금을 작성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학원이 바빠지면서 스트레스 받고 몸도 약해진 상태라고 그는 전했다. ”작년에 몸이 많이 아팠거든요. 이제 한국에 들어와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자연이 어우러진 곳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텃밭과 불우 이웃을 도우며 살고 싶은 것이 꿈입니다.“

 전 대표는 5년 후, 한국으로 돌아와 고향산천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완전히 굳힌 것으로 보였다.  88년 미국에서 몇십년 만에 있을까 말까한 불법체류자 신고기간에 자진신고를 해 운 좋게 미국 영주권을 얻었다. 5년전 미국시민권도 획득했다. 이제 그는 미국시민이 됐다.

하지만 그는 가난 때문에 미국인 됐고 다시 한국인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미국에서 다양한 문화체험도 했고,  성공이라면 성공했다"며 "고향산천에 와 좋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60년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상경해 한성여고를 졸업했다. 83년 성균관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85년 미국으로 도미했다. 현재 우리나라 충청남도와 북도를 합쳐 놓은 정도 땅, 뉴욕주 롱아일랜드에서 대학입시학원으로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해 활동하고 있다. 그는 오는 9월1일 오전 2주간의 한국방문 일정을 모두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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