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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Cine] 15분의 오르가즘과 2시간의 불감증
 
공희준 Cinema Jockey   기사입력  2002/02/19 [02:42]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마샬 맥루한의 단호하면서도 간략한 언명 속에는 현대 사회에서 매스미디어가 차지하는 막중한 역할과 비중이 극적으로 농축되어 있다.

{IMAGE1_LEFT}현대 사회에서는 엄청난 양의 정보가 생성되고 소멸한다. 정보화 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유통되는 정보와 지식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학습능력과 정보습득능력, 그리고 종합적인 정보처리역량은 산술급수는 고사하고 언제나 소걸음으로 나아가는 형국이다. 따라서 무수히 산재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팩트의 실마리를 대중이 조야한 형태로나마 알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매스미디어를 통해서일 뿐이다.

신문과 방송이라는 기존의 매체이건, 인터넷과 같은 뉴미디어이건 대중사회에서 인간들은 일정한 장치를 통해 여과된 정보를 접하고 소위 전문가들의 평가와 판단이 가미된 지식을 통하여 자기 자신이 내리는 모든 결정의 준거를 주형하게 마련이다.

싫건 좋건 인간이 매스미디어에 의지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고 이에 발맞추어 구르지 않는 자전거가 넘어지는 것처럼 매스미디어는 대중의 왕성한 호기심을 부추기고 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흥밋거리와 소재를 끊임없이 발굴하고 개발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 권력를 비롯한 제반권력에 대한 감시자이자 사회의 목탁이라는 언론 본연의 기능은 유실된 채 대중매체 스스로가 권력기관화화는 본말전도 현상이 일어난다. 특히 언론기관이 사적 자본의 지배를 받는 개별기업의 모습을 띠고서 존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스미디어의 영향력과 위력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말처럼 무소불위이자 무소부재의 리바이어던이다.

권력기관화환 매스미디어를 비판하기 위한 영화는 적지 않게 만들어지지만 영화판을 좌지우지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하나가 거대 매체의 이른바 "Review"라는 것이고 보면 언론권력을 견제하려는 영화판의 움직임은 찻잔속의 태풍이기 일쑤이다. 오죽하면 영화사 관계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는 행사가 기자시사회일까.

"15분"은 장르를 구분하기가 매우 난해한 모호하기 그지없는 영화다. 도입부에서 배열된 두 명의 동구권 출신 밀입국자의 입국장면에서는 불법이민의 문제와 불법 이민자를 차단하기 위한 방역선의 설치을 미국 우월주의적 시각으로 대변하고 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펼쳐지는 것은 에밀과 올렉 두 명의 범죄자가 펼치는 유혈낭자한 연속 살인극이다. 총격이 빗발치는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두 살인자들이 사용하는 것은 구하기 쉬운 나이프이다. 총기가 보편화되지 않은 유럽의 두 범죄자에게 총보다는 칼이 더 적합한 흉기인 것과 아울러 싱겁게(?) 한방으로 끝나는 총기와는 달리 칼로 연속해서 희생자를 난도질하는 장면은 "친구"에서의 동수의 장렬한 비장미가 아닌 생경한 끔찍함과 역겨운 욕지기만을 안겨준다.

{IMAGE2_RIGHT}주인공으로 극의 전반부를 주도하던 주인공 에디(로버트 드 니로 분)가 극중간에 허망하게 죽어버리는 스토리의 설정은 이 영화를 돋보이게 하는 최대의 반전이자 정형화된 할리우드 문법에 대한 노골적인 정면 도전이리라.

물론 최후의 순간에 악당이 응징을 받는 권선징악의 단골 레퍼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이 영화의 한계라고 질타할 수도 있겠지만, 에밀의 엽기적인 연속 살인행진곡과 그를 이용해 언론자본의 이득을 극대화시키려는 혐오스런 대중매체의 행태는 너무나 보는 사람을 분기탱천시키기에 나레이션의 진부함을 난자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15분"은 두 개의 앵글이 촬영하는 화면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감독의 시선이고 하나는 훔친 캠코더로 에밀이 펼쳐대는 광기의 드라마를 촬영하는 올렉의 눈에 잡힌 모습이다. 올렉의 눈길은 우리 사회에서 O양과 B양 사건으로 표출된 대중의 농밀하면서도 적나라한 관음욕의 발현이다. 이 필름을 사기 위해 언론은 한 인간의 처절한 죽음을 매개로 하여 살인자를 상대로 한 악마의 거래도 마다하지 않는다. 좀더 까발리자면 대중의 비뚤어진 기호와 왜곡된 취향을 매개로 자기 증식해온 언론이 이 광란의 살인극을 부추겼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매스미디어의 권력화가 빚은 부작용이 폭발직전의 임계점에 도달한 곳은 바다 건너 미국이 아닌 우리나라가 아닐까. 어느 소설가를 둘러싸고 빚어진 곡학아세 논쟁은 언론과 지식인의 유착이 만들어낸 희대의 불륜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치권력마저 쥐락펴락하는 언론권력은 모든 것을 주눅들게 만든다. 언론이 띄어준 영화가 박스오피스의 수위를 달리고 주말 연인과의 데이트 코스마저 언론이 정해주는 대로 따라가는 우리네 삶의 편린들은 도처에 편재하는 언론의 가공할 위력을 실감케 한다.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예언했던 빅 브라더는 신문의 형태로 이 땅에 강림한 것이다.

특정한 집단의 이익에 영합하고 특정한 부류의 입맛에 맞게끔 가공된 정보만을 제공하는 특정 매체가 사회적 공론의 장과 담론의 공간을 독점 내지 과점하는 현상은 어느 독재자의 출현이나 전제권력의 등장보다 민주주의의 존립에 치명적인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아침신문이 주는 15분의 오르가즘에 우리 모두 진실과 정의에 대한 불감증에 걸린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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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2/19 [02:4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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