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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않는다
최용식 소장 반론에 재반론, 노조에 선입견 있나?
 
홍성관   기사입력  2003/08/27 [12:46]

우선 부족한 글에 재반론을 해주신 점 감사 드린다. 재주의 모자람으로 본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고, 그런 부분이 외려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었음도 반성한다. 그리고 재반론 해주신 덕택에 본 기자가 최용식 소장(이하 최 소장, 존칭생략)의 첫 글에서 오해했던 몇몇 부분이 해소됨과 동시 명확해진 부분들에 대해 다시 반론하게 됨을 밝혀둔다.

[관련기사]
최용식, 국민경제가 튼튼해야 노동자가 산다, 대자보(2003. 8. 26)
홍성관, 노동자의 생존권이 '제밥그릇챙기기'인가?, 대자보(2003. 8. 25)
최용식, 주5일 근무제, 노동계는 전투를 하나(시대소리)

첫째, 최 소장이 인식하고 있는 법률이라는 것이 기자에게는 법전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물론 현대 민주국가는 법치주의를 포함해, 민의에 따라 법을 제정하고 누구든 그 법을 준수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법률을 이해할 때에는 실제로 운용되고 있는 시스템을 봐야지 법전에 해석되는 것만을 보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우리나라의 헌법은 제정 당시 세계 유수의 헌법들을 참조해 만들었기에 법학자들이 봐도 감탄할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독재정권이 득세하는 사이 우리의 그 훌륭한 법은 대체 무얼 하고 있었던가. 이는 법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오늘날에도 법이라는 장치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자들에 유리하게 작동되는 특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명시하기 위함이다. 법률이 '네거티브 체제(Negative System)'라 해서 그것이 최소한의 것만 규정하고 그 외에는 자유를 부여한다고 보는 것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견해다.

최 소장은 이런 이유로 주4일 근무제를 해도 안 말린다면서, 마치 그런 결과를 끌어내고 아니고는 노동자들의 능력에 달려있다는 투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모르는 소리다. 이번 개정안에 딸려 있는 '소급' 부칙으로 인해 이미 임단협을 체결한 현대나 금속노조에 재전운이 감돌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이런 판국에 "법은 일단 주 5일제로 해놓고 열심히 싸우든 성과를 내든 해서 주 4일까지도 해봐라"라는 식의 어조는 무책임하다.

둘째, 최 소장은 다시 한번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받고 있는 차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정부의 개정안이 바로 이들의 주 5일제 실시를 연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 건지 여쭙고 싶다. 이전의 기사들을 통해 언급했지만, 이번 정부의 개정안은 20인 미만의 사업장은 2011년에나 주 5일제가 가능케 하고 있다. 이렇게 법률로 고착되면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앞으로 8년이나 기다려야 한다. 이런 정부안은 결국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찌감치 혜택을 받게 되는 노동자들에 대해 상대적 박탈감을 갖게 되고, 그것은 노동조합의 단결력을 약화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양대 노총이 요구하는 단일안이야말로 이들에게 주 5일 근무 혜택을 줄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대안'이자, '실현되어야 마땅한 대안'이 아닌가. 이런 까닭에 본 기자는 최 소장이 언급한 '명분'을 문제삼을 수밖에 없다.
 
▲8월18일 국회앞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근로기준법 개악저지 양대노총 총력투쟁 결의대회 모습     ©민주노총홈페이지
현대자동차 임단협의 체결 이후 경제부총리가 사측의 임원을 만나 이번 현대차의 협상이 그다지 진일보한 내용도 아니며, 사측에서 전연 수용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비단 현대자동차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사측이 둘 다 망해보자는 심산으로 협상테이블에 앉았을리 만무하기에, 본 기자는 협상이 체결된 이상 회사가 망할 만큼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또 본 기자는 조중동을 제외한 어디에서도 중소영세 비정규 노동자들이 노조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조중동의 지면을 장식한 비난의 소리 중 몇몇도 출처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작위적인 냄새가 났기에 믿지 못하였다. 오히려 최근 한달 사이에 만난 까르푸의 노조원이나 진로의 노조원은 자신들의 현재 여건이 상부 노조 조직과 연대해 싸울 없기 때문에 그렇지 양대노총의 제안은 자신들도 바라는 것임을 시사한 적이 있다.

이 말들을 꺼낸 것은 정작 협상을 타결시킨 본인들은 말이 없는데 그것을 연신 문제삼아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노조 때리기'에 혈안이 된 조중동의 논리와 흡사해 보이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최 소장의 글이 중소기업의 노동자들이 받는 차별을 근거로 대기업 노조를 비판하는 조중동과 다를 바 없음을 보이기 위해서다. 언제부터 그들이 그렇게 중소기업의 노동자들을 위하고 챙겼던가.

최 소장의 안티조선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아쉬움이 컸다. 얼마 전 한총련과 관련한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임종석 의원의 예를 보아도 그렇다. 임 의원이야 나중에 그것이 보도과정에서 왜곡됐음을 밝혔지만, 본 기자가 보기에 최 소장의 글은 왜곡의 필요성도 없다. 혹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다수 매체가 조장한 분위기에 일정부분 휩쓸린 경향이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으시는지.

셋째, 최 소장의 눈에는 정부안을 반대하는 노조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본 기자의 눈에는 조직 내 투쟁여건이 열악한 노동자들의 몫까지 대신해서 싸우고 있는 것으로 비춰진다. 이것이 단순히 둘의 관점의 차이일지는 모르겠으나, 정부안에 대한 반대가 대기업노조에게 얻어다 줄 과실은 그다지 없으며, 반대하는 세부항목들은 여성 중소 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변한 것임을 이미 수 차례 밝혔기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넷째, 최 소장은 비뚤어진 선입견으로 노조를 보고 있다. 하부의 노동 현장에는 실제로 노총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존재한다. 노총도 이제 거대조직이 되어, 현장 하나 하나의 의견들을 전부 수렴하기에는 기술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또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도 사람이 만든 조직인지라,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고, 그들의 집회나 투쟁의 방식에서 미흡하고 세련되지 못한 부분이 발견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미흡함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한가. 감싸주거나, 격려해주면서 더 잘하도록 응원해주는 것은 찾을 수 없고, 오로지 원천적인 부정과 멸시만 있어 보인다. 말 안 듣던 친구가 일이 잘못되자, 그것 봐라 하며 비웃고 있는 것처럼만 보인다. 본 기자의 소견으로는 그 시선의 깊은 뿌리에는 레드 콤플렉스가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

다섯째, '지금 당장 이 두 집단 사이의 임금격차만이라도 따져보기 바란다.'는 부분에 대해선 이미 그런 발언 자체가 문제를 안고 있음을 지적했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여섯째, 최 소장은 12%의 강한 노동자보다는 88%의 약한 노동자의 편에 서야한다면서, 여성의 모성보호가 다수의 남성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으로 인해 짓밟히는 것은 간과하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그리고 (+)와 (-)의 단순 계산은 인간의 존엄성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려고 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노동조건의 악화로 희생되는 인간성을 돈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자본가들의 논리가 아닌가.

일곱째, 통계에 따르면 노무현 정권 출범 후 진행된 파업이나 집회의 수는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고, 투쟁강도 역시 예년에 비해 더 세졌다고 보기 힘들다. 최 소장의 평소 성향으로 추측컨대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는데, 이제 노조들도 믿고 기다려야 하지 않나'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야 가능한 기대지만, 넓게 보아서는 불가능한 기대이다. 출범 후 노 정권에 대한 지지도가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음이 보여주듯이, 노 정권은 그다지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한국노총이 노 정권이 친노동자적 정책을 펴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성명을 낸 것이 이를 반증한다.

그리고 오십보 양보해 상대적으로 노조의 투쟁이 더 강화됐다고 쳐도, 그것이 노 정권을 얕잡아 보거나 만만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라, 기대가 컸던 만큼 그에 부응하지 못한데 대한 응징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노조에게 기다려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생존권이 위협받는 그들에게 시간은 사용자의 편일 뿐이다.

여덟째, 진보는 과학이라는 말은 지당하다. 현실에 발붙이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본가 세력들이 세계화라는 명분으로 노동자들을 비인간적 현장으로 내몰고 있다는 말을 그저 시민들에게 뿌려지는 노조의 전단지에 판에 박힌 듯 쓰여있는 문구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오히려 최 소장이야말로 허공에 떠있는 주장을 하는 셈이다.

세계화가 없이 번영을 누리는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했으나, 그렇다면 세계화를 통해 번영을 누리고 있는 나라는 어디가 있는가. 미국 외에는 딱히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그 미국은 리카도의 비교우위를 통한 자유무역에 의해서가 아니라,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그 성공을 달성했을 뿐이다.

현실적인 흐름을 완전히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다지 유익하지도 않다. 우리가 미국에 대항해봐야 얻을 게 얼마나 있겠는가. 또 우리의 시원찮은 경제를 그나마 지탱해주고 있는 게 수출이라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힘의 논리에 의해 강제되는 세계화와 주체적으로 교류에 나서는 세계화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으며, 현재 우리는 전자에 해당됨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세계화가 초래할 결과는 비극이라고 말하고 싶다. 최 소장이 쓴 세계화에 대한 글에도 이의가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키로 한다.

지금의 경기 침체는 내수소비의 회복기미가 안 보인다는 점에서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리고 많은 경제학자들은 그것이 국민들이 느끼는 정세불안과 위기의식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삼성과 같은 대기업들은 예년에 비해 큰 폭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주머니에는 찬바람이 분다. 위기 의식은 어디에서 나올까. 이에 여러 가지로 답할 수 있겠으나, 본 기자는 신뢰를 주지 못하는 정부의 정책혼선과 사회갈등을 과장해 국민들을 불안케 하는 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사회갈등을 해결해 나가는데 '대승적 자세'가 필수적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대승적 자세'가 결코 '노조에 재갈 물리기'로 흘러서는 안되며, 이는 더 큰 갈등을 양산할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용식 소장의 글은 재고의 여지가 크다. / 경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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