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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7.06.2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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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 그의 비폭력은 독립 꿈꾸지 못하나
[최을영의 시사인물 포커스] 달라이 라마 시대 종료? 여전히 성자로 남아
 
최을영
"장애물 코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세계 각지에서 펼쳐지고 있는 올림픽 성화 봉송이 연일 수난을 겪고 있다. 2008년 4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티베트 사태와 관련해 중국을 비난하는 시위대의 저항으로 성화가 세 차례나 꺼진 채로 이동했고, 영국 런던에서도 시위로 인해 성화 봉송이 시련을 겪었다. 또한 미국 샌프란시스코 등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시위가 예정돼 있어 성화 봉송이 차질을 빚을 전망이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성화 봉송을 '장애물 코스'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이 '장애물 코스'로 변질된 것은 티베트의 독립을 요구하며 2008년 3월 10일부터 티베트에서 시작된 시위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중국의 태도 때문이다. 티베트에서 시작된 시위는 국제인권단체들이 참여하며 국제적 시위 양상으로 치달았다.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이를 가리켜 "성화 여정은 중국의 세계 파워 부상을 기념하기는커녕 '수치의 여정'이 돼버렸다"며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가장 강도 높은 국제적 시위"라고 칭했다.1) 이에 대해 중국의 장위 외교부 대변인은 "티베트 분리주의자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법률을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성화 봉송을 방해한 것"이라고 강력히 비난했다.2) 그리고 성화 봉송을 예정대로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티베트를 지지하는 시위가 계속 예정돼 있고, 베이징 올림픽을 보이콧하자는 목소리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어 중국 당국이 명명한 '화해의 여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을 듯하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2012년 런던 올림픽 때부터는 세계를 도는 성화 봉송 폐지를 검토하겠다고 나섰고, 런던에서도 국외 성화 봉송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또 일각에서는 나치 치하의 독일이 나치를 선전하기 위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부터 시작한 '국외 성화 봉송'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올림픽 성화가 정치와는 무관한 국가 간 화해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돌프 히틀러'라는 두 단어를 기억해야 한다"고 성화 봉송에 가려진 이면을 밝혔다.3)

국외를 도는 올림픽 성화 봉송 폐지 논란까지 불러일으킨 티베트 시위는 1950년대 중국으로부터 점령당한 티베트의 독립을 촉구하며 일어났다. 중국의 주장대로 티베트의 망명 정부를 이끌고 있는 달라이 라마가 배후조종하지는 않았지만 시위가 일어나자 달라이 라마는 이번 사태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티베트 시위가 국제적 시위로 확산된 것은 그동안 달라이 라마가 펼친 비폭력 운동 덕분이다. 달라이 라마는 서구에서 '성자' 또는 '현자'로 인식되며 서구에서 불교의 확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959년 인도에 티베트 망명 정부를 세운 이후 비폭력 운동으로 티베트의 진정한 자치권을 주장해온 그는 평화의 상징으로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이를 계기로 세계에 티베트의 현실을 널리 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티베트 시위와 그에 따른 유혈사태는 달라이 라마가 원한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티베트의 독립을 주장하지 않았지만 티베트의 시위대는 티베트의 독립을 촉구하고 나섰고, 그 방식 또한 달라이 라마가 꾸준히 견지하고 있던 비폭력과는 일정 정도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달라이 라마     © 로이터통신

티베트 독립시위
 
2008년 3월 10일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서 시위가 발발했다. 이는 1959년 3월 10일 발발했던 '라싸 사건' 49주기를 기해 발생한 것이었다. 중국의 티베트 점령에 반대하며 대규모 민중봉기가 있었던 1959년 이후 티베트는 중국에 의해 침탈당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티베트의 전통 사찰이 파괴되고, 티베트어 사용이 금지되었다. 또 한족(漢族) 이주 정책으로 인해 티베트인들이 티베트 지역에서 경제적 기반을 잡기가 힘들어졌다. 티베트는 고유의 문화를 잃어버린 채 중국 내에서 극빈 지역으로 전락했다. 1951년 인민해방군이 진주하며 시작된 중국의 티베트 점령은 그렇게 티베트 지역을 음울하게 만들었다.

2008년 3월 일어난 독립시위를 중국은 늘 해오던 대로 강경하게 진압했다. 외신 기자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다. 이번 시위는 3월 10일 수백 명의 승려가 티베트 독립을 주장하다 감옥에 갇힌 동료 승려들의 석방을 촉구하며 시작됐다. 시위 발발 초기 중국의 친강(秦剛) 외교부 대변인은 13일 "달라이 라마 집단의 소수 승려들이 계속 말썽을 일으키고 사회 혼란을 기도하며 티베트 지역의 분열을 획책하고 있지만 지금은 정상을 되찾았다"면서 "달라이 라마 집단의 어떠한 분열 기도도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4)

그러나 승려들이 시작한 시위는 3월 14일 티베트 전역으로 확산됐다. 중국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해산하는 것도 모자라 실탄을 쏴 사상자가 발생했다. 라싸의 응급센터 직원은 '아에프페(AFP)' 통신과의 전화 통화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쳤고, 이들을 치료하느라 너무 바쁘다"며 "죽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지만, 정확한 숫자는 모른다"고 말했다.5)

그러나 중국은 발포 사실을 부인하는 한편 이번 시위를 달라이 라마가 기획하고 배후조종했다고 주장했다. 창바 푸촉 시짱자치구 정부 주석은 17일 "중국 공안당국은 최루탄 등 적법한 수단 외에는 어떠한 살상용 무기도 사용하지 않았다"면서도 "이번 사태로 모두 16명이 숨졌다"고 밝혔다.6) 그러나 중국은 3월 20일 시위대를 향한 발포 사실을 인정했다.

한 번 불이 붙은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기존의 시위와 달리 이번 시위에서 티베트인들은 라싸 지역의 한족들이 거주하는 상점에 불을 질렀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 알려진 티베트인들의 행동 치고는 강경한 것이었다. 그리고 승려가 시위의 주도 세력으로 나선 점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에 중국은 17일 장갑차로 무장한 치안병력을 라싸로 급파했고, 중국 당국은 전 세계 동영상 공유 사이트인 '유튜브'의 접속을 차단했다. 중국 언론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신화통신'은 "라싸에서 극소수의 사람들이 폭력과 약탈, 방화 등 파괴활동으로 사회질서를 교란했다"며 "달라이 라마 패거리의 티베트 사회 안정 파괴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중국중앙텔레비전'은 16일과 17일 티베트인들이 중국은행과 한족이 운영하는 가게를 공격하는 영상을 내보냈다.7)

티베트는 고립된 섬이었다. 외신 기자들의 접근이 금지됐고, 중국은 기존에 머물고 있던 외신 기자들에게 추방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시위대를 진압하는 한편 대규모 검거에 나섰다. 중국 공안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 걸려 있는지를 확인하며 용의자를 가려냈고, 승려들의 대화까지 통제했다. 티베트 망명정부는 이번 시위로 최소 100명이 사망하고,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됐다고 추산했다.
 
문화적 학살
 
중국은 시위 발생 초반에는 시위의 배후조종자로 달라이 라마를 지목하고, 달라이 라마를 비난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는 이번 시위와 관련이 없었다. 14일 달라이 라마는 망명 중인 인도에서 "50년 넘게 티베트를 지배해온 중국의 야만적 폭력이 이번 사태의 원인"이라며 "중국 지도자들이 폭력 행사를 중단하고 티베트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8) 그리고 16일에는 "중국 정부는 평화를 가장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고 있다"며 "중국 정부의 평화는 테러 통치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티베트에서 일종의 "문화적 학살"이 이뤄지고 있다며 티베트인들이 종종 2류 시민 취급을 받는다고도 말했다.9)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티베트인들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기 바란다"면서 자신의 목표는 분리 독립이 아닌 자치권 확대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번 여름 베이징 올림픽 개최를 지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10) 18일에는 자신을 배후조종자로 지목한 중국 당국에게 "중국이 나를 시위 조종 인물로 지목했는데, 이 주장이 사실인지 믿을 만한 기구에 맡겨 조사할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11) 달라이 라마는 또한 "상황이 통제를 벗어나면 나는 완전히 물러날 수밖에 없다"며 자신의 무력한 처지를 비관했다.12) 티베트 국민들이 폭력을 사용할 경우 비폭력 노선을 견지해온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또한 시위의 배후로 티베트청년회를 지목했다. 티베트 망명정부 내 강경파로 분류되는 티베트청년회는 20~30대 청년으로 구성되어 있는 단체로 3만 5000여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티베트청년회는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노선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체왕 리그진 회장은 베이징 올림픽 개최를 지지한 달라이 라마를 비판하며 "달라이 라마의 온건 노선에 대한 티베트인들의 좌절감이 높아지고 있다"고 밝혔다.13)

그리고 티베트청년회 대변인 텐진 노쌍은 "중국은 툭하면 달라이 라마가 시위대를 조종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그는 정신적 지도자일 뿐이지 구체적으로 투쟁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아니다. 특히 티베트 현지 저항 조직과는 아무런 연결선이 없다. 중국이 시위의 순수성을 훼손하기 위해 달라이 라마를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티베트청년회가 이번 시위를 주도했다는 주장에 대해 "그렇지 않다. 독립투쟁의 리더는 티베트 안에 있는 주민 자신이다. 주민이 자발적으로 봉기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도 티베트청년회도 배후가 아니다"라고 밝혔다.14)

텐진 노쌍의 말처럼 티베트 시위가 주민 스스로에 의해 발발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원인은 단순해 보인다. 중국의 일방적인 티베트 점령과 티베트인들에 대한 정치·사회·경제적 차별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해 보이는 원인은 시간의 더께가 켜켜이 쌓이며 단순하지 않은 문제점을 만들어냈다. 중국은 티베트를 자국의 문화권 내로 편입시키기 위해 사원을 폐쇄하고 티베트어를 금지시켰으며, 개발이란 명목으로 티베트에 한족을 대거 이주시켜 경제적 불평등을 가중시켰다. 또한 티베트에 핵무기를 배치하고 자연을 황폐화시켰다. 달라이 라마의 말처럼 티베트에서는 '문화적 학살'이 50년 넘게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티베트의 역사를 잠시나마 살펴봐야 할 것이다.
  
티베트 수난사
 
19세기 말까지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티베트는 1904년 영국의 '영허즈번드'라는 탐험대가 라싸에 온 것을 계기로 영국과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르면 중앙티베트 지역과 동티베트 지역은 중국의 지배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영국에 의해 문호가 개방된 티베트는 이후 국공내전 기간과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사실상 독립정부를 꾸렸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대장정을 통해 1949년 중국의 지배자로 올라선 뒤 1950년 10월 티베트에 인민해방군 4만여 명을 진주시켰다. 그리고 다음 달에 티베트 외무부는 유엔에 이런 내용의 긴급 전문을 띄운다.

"평화를 신봉하는 나라가 전쟁 준비를 끝낸 나라에 대항하기는 불가능하다. 유엔이 이 침략적 행위를 저지시켜줄 것을 기대한다."15)

그러나 유엔은 티베트 사태에 개입하지 않았고 중국은 티베트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1951년 5월 중국은 티베트 의회 대표들에게 '티베트 평화해방안 16개 조항'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이 조약에 따라 티베트의 외교권은 중국으로 넘어갔다. 같은 해 9월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라싸에 진주하며 티베트는 중국에 점령당했다.

중국에 의한 '평화해방'은 허울에 불과했다. 점령 초기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을 오가며 티베트의 주권을 찾기 위해 중국과 협상을 벌였다. 당시 그는 티베트 자치구준비위원회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이는 무위로 돌아갔고 중국은 1954년 통과된 헌법 3조에서 "각 민족의 자치구는 모두 중국의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못 박았다. 또 1955년에는 티베트에서 집단농장제를 실시했다. 티베트의 독립은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1959년 3월 중국이 달라이 라마를 억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가 있던 포탈라궁을 에워싸고 시위를 벌였다. 중국은 무력진압으로 대응했다. 3월 10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시위대들에게 총을 발사했고, 대대적인 포격을 퍼부었다. 이 시위로 인해 8만 7000명에 이르는 티베트인들이 죽거나 다쳤고 티베트인들의 정신적 근간이 되는 수많은 사원이 파괴됐다.

중국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3월 28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는 티베트 정부의 해체를 발표했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는 1000명에 이르는 티베트인들을 이끌고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 북부의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우게 된다.

티베트는 곧 중국으로부터 수탈을 당하게 된다. 티베트의 영합으로 막대한 영토--현재 중국 영토의 4분의 1에 해당한다--와 자원을 얻은 중국은 이곳에 핵실험 및 폐기물 처리장, 벌목장, 광산, 채굴장 등을 세워 약탈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약탈 행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일종의 문화적 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1960년대 불어 닥친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티베트의 고유문화는 '학살'을 당했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계속된 문화대혁명 기간에 수많은 티베트 사원이 홍위병에 의해 불타거나 폐쇄됐고, 1966년에는 티베트어 사용을 금지당했다. 그리고 중국은 계획적인 한족 이주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중국정부의 티베트인 학살을 규탄하는 집회가 티베트 사태 발발 직후 부터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다.     ©대자보

원나라 시기에 처음 중국에 편입된 이후에도 몇백 년 동안 고유의 문화를 지키고 있던 티베트인들에게 중국의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중국의 힘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채찍만 휘두른 것은 아니었다. 중국은 당근 정책도 구사했다.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은 전형적인 당근과 채찍 정책이었다. 우선 중국은 소수민족의 엘리트들에게 권력의 중심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경제 개발을 통해 분리 독립의 움직임을 사전에 봉쇄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의 통합 정책에 반대하는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탄압을 가했다. 대표적인 것이 티베트인과 위구르인에 대한 탄압이었다. 중국 당국은 분리 움직임이 보이면 곧바로 이들에게 탄압정책을 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고, 감금당했다. 앞서 살펴보았듯 고유의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또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인들은 강도 높은 탄압을 받았다. 그런 그들에게 희망은 인도에 있는 달라이 라마였다.
  
달라이 라마 14세의 탄생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정치·사회·종교적 지도자를 지칭한다. 달라이는 티베트어 '갸초'에 해당하는 말로 '큰 바다'를 뜻한다. 그리고 라마는 티베트어로 무상의 스승 혹은 최고의 스승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달라이 라마는 대해와 같이 넓고 큰 덕을 가진 고승을 말한다. 티베트에서 달라이 라마는 대대로 상속된다. 전대의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면 다시 환생한다고 믿는 티베트인들은 환생한 사람을 찾아 후대 달라이 라마로 선정한다. 현재의 달라이 라마도 1937년 14대 달라이 라마로 선정됐다.

달라이 라마는 1935년 티베트 북동부의 작은 마을 탁체르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라모 톤둡이었다. 두 살 되던 해 그는 달라이 라마 13세의 현신(現身)으로 인정됐고, 네 살 때 티베트의 수도 라싸의 포탈라궁에 거주하게 된다. '텐진 갸초'라는 법명을 갖게 된 것도 이때였다.

포탈라궁에서 달라이 라마는 본격적인 교육을 받게 된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로 성장하게 될 달라이 라마는 어린 시절 장난감이나 시계, 영사기 등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것을 즐기는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 『티베트에서의 7년』의 저자 하인리히 하러는 어린 시절 달라이 라마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러니까 내가 서른둘이던 1944년 달라이 라마가 열한 살 때 처음 그를 만났습니다. 티베트 수도 라싸의 포탈라궁에 살고 있었지요. 그는 놀이 상대가 없었고 형제들만 방문이 허용됐습니다. 그는 망원경으로 바깥세상을 내다보곤 했지요.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당시 보통사람의 자유로운 삶이 부러웠다고 하더군요. 그가 달라이 라마가 아니었다면 아마 개구쟁이로 컸을 겁니다. 우리는 함께 지리와 사진 찍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시계를 분해해 속을 살펴보곤 했지요. 영화도 좋아했습니다."16)

그러나 이 호기심 많은 아이의 행복한 생활은 중국의 티베트 점령으로 끝이 나게 된다. 1950년 중국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진주, 1959년 라싸에서의 대규모 봉기로 달라이 라마는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망명해 망명정부를 꾸리게 된다. 이후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자치권 확립을 목표로 비폭력 노선에 근거한 투쟁을 벌이게 된다. 그는 전 세계에 티베트가 처한 상황을 알려 나갔다. 1959년과 1961년, 1965년 유엔총회에서 티베트에 관한 결의안이 채택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달라이 라마였다.

달라이 라마가 해외에서 티베트의 현실을 알려 나가며 평화를 설교하던 때 티베트의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급기야 1989년 3월에는 1959년의 민중봉기 30주년을 맞아 대규모 시위가 발발했고, 중국은 변함없이 무력으로 이들을 진압했다. 이 시위로 70여 명의 티베트인들이 사망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중국 당국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티베트를 고립시켰다.

달라이 라마는 즉각 이에 항의하며 국제 사회의 도움을 호소했고, 1989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음으로써 티베트 사태는 국제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중국은 달라이 라마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것에 대한 항의 표시로 노르웨이 정부에 항의서한을 전달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달라이 라마의 위세가 커지는 것을 막으려 애썼다.

중국의 입장은 단호한 것이었다. 티베트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중국의 영토이며, 국제사회에서 티베트의 독립을 촉구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고 맞섰다. 1990년대 달라이 라마가 부시 미 대통령과 클린턴 미 대통령을 연달아 방문하자 미국과의 관계를 급속하게 악화시키기도 했으며 대만, 호주 등의 국가에 달라이 라마가 방문하게 되면 엄중 항의했다. 심지어 달라이 라마가 대만을 방문했을 때는 대규모 군사훈련을 통해 대만을 압박하기도 했다. 또 1995년 디즈니 영화사에서 달라이 라마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쿤둔>을 제작하려 하자 류젠중 영화담당국장이 1995년 10월 디즈니의 고위 간부들에게 "이 영화가 제작될 경우 중국 진출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17) 2000년과 2001년 달라이 라마의 한국 방문이 무산된 것도 거대 강국 중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동안 중국은 달라이 라마의 행위를 이상할 정도로 심하게 비난해왔다. 그것은 그가 서방세계에 불교를 널리 알린 성자로 인식되고, 티베트가 중국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 중국에게는 큰 타격이었기 때문이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발발한 2008년 3월의 티베트 독립 시위가 국제적 시위로 발전한 것은 달라이 라마가 그동안 세계를 돌며 펼친 비폭력 운동 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과연 달라이 라마의 시대는 끝났는가
 
그러나 이번 시위로 인해 달라이 라마의 지배력이 더 이상 티베트인들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비폭력 운동을 통한 독립 혹은 자치권 확립이 성과를 내지 못했고,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이며 다만 자치권을 원한다고 밝힌 것이 티베트인들의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시위가 한족 거주지에 대한 방화로 치달았던 것도 달라이 라마의 지배력이 약화됐다는 분석에 힘을 실어준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으로부터 티베트가 독립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티베트 문화를 지켜내기 위한 자치권 확보를 목표로 삼고 중국에 이를 요구하고 있다. 이번 시위에 대한 성명을 발표할 때도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이것이 독립으로 가는 전략적 선택인지는 모르겠으나 티베트의 청년들은 달라이 라마의 온건 노선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보낸다. 앞서 얘기한 바 있는 티베트청년회의 달라이 라마에 대한 불만도 비폭력주의의 성과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시사IN』의 신호철은 「달라이 라마 시대는 끝났는가」라는 기사 말미에서 "21세기에 신의 환생을 믿는 사람은 줄고 있다. 티베트 주민이 중국 공안의 총격에 쓰러질 때 '관세음보살의 화신'도 죽었다. 단지 일흔두 살 노인이 남아있을 뿐이다"라며 이번 시위 앞에서 현저히 약해진 달라이 라마에 대해 썼다.18)

2006년 칭짱철도 개설 이후 더욱더 심해진 한족의 이주와 그와 맞물린 경제적 불평등, 티베트 고유문화의 '학살'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한 이번 시위는 결국 또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 정부는 베이징 올림픽을 예정대로 치를 것이고, 티베트는 또 다시 사람들의 뇌리에서 조금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티베트는 또 저항할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시대가 끝날 것인지, 아닌지는 사실 누구도 장담 못할 일이다. 티베트인들에게 달라이 라마는 여전히 큰 스승이고, 국제 사회에서도 그는 여전히 성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에게는 이뤄야 할 꿈이 남아 있다. 그 꿈이 이뤄질지 미지수지만, 꿈은 꾸라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그의 꿈을 들어보자.

"티베트 고원이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자연이 평화와 조화로운 균형 안에서 살아가는 자유의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꿈입니다. 그 꿈이 실현된다면 티베트는 온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세상 다른 곳에서 겪는 긴장과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그들 내면의 평화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찾아 누리는 곳이 될 것입니다. 티베트는 진실로 평화와 발전을 위한 창조적인 센터가 될 수 있습니다."19)
 
이글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8년 5월호에 실렸습니다. 
[각주]
 
1) 김유진, 「'나치 유물' 올림픽 성화 봉송 논란」, 『경향신문』, 2008년 4월 9일, 14면.
2) 유강문, 「IOC, 차기 올림픽 '국외 성화 봉송' 폐지 검토」, 『한겨레』, 2008년 4월 9일, 15면.
3) 김유진, 「'나치 유물' 올림픽 성화 봉송 논란」, 『경향신문』, 2008년 4월 9일, 14면.
4) 허민, 「중 남부 폭발… '올림픽 안보' 비상」, 『문화일보』, 2008년 3월 14일, 27면.
5) 권혁철, 「티베트 반중 시위 격화」, 『한겨레』, 2008년 3월 15일, 23면.
6) 유강문·이정애, 「중, 병력 증파… 티베트 긴장 고조」, 『한겨레』, 2008년 3월 18일, 2면.
7) 김외현, 「"폭도" 시위대만 '줌인' 중국 언론 편파보도」, 『한겨레』, 2008년 3월 18일, 14면.
8) 권혁철, 「티베트 반중 시위 격화」, 『한겨레』, 2008년 3월 15일, 23면.
9) 정환보, 「"티베트에서 문화적 학살이 이뤄지고 있다"」, 『경향신문』, 2008년 3월 17일, 8면.
10) 서수민, 「고민 깊어가는 달라이 라마」, 『한겨레』, 2008년 3월 17일, 3면.
11) 신호철, 「달라이 라마 시대는 끝났는가」, 『시사IN』, 2008년 3월 29일, 36쪽.
12) 유강문, 「'평화노선' 달라이 라마 기로에 서다」, 『한겨레』, 2008년 3월 19일, 15면.
13) 유강문, 「'평화노선' 달라이 라마 기로에 서다」, 『한겨레』, 2008년 3월 19일, 15면.
14) 신호철, 「달라이 라마 시대는 끝났는가」, 『시사IN』, 2008년 3월 29일, 36쪽.
15) 유강문, 「독립항쟁-무력진압 '58년간 반복'」, 『한겨레』, 2008년 3월 17일, 14면.
16) 고형일, 「달라이 라마의 평화사상」, 『불교학연구』 제2호, 2001년 6월, 6쪽에서 재인용.
17) 이광일, 「하인리히 하러 저 '티베트에서의 7년'」, 『한국일보』, 1997년 11월 19일, 23면.
18) 이태희, 「달라이 라마 다룬 영화 싸고 디즈니-중국 당국 충돌 우려」, 『한겨레』, 1996년 11월 28일, 6면.
19) 신호철, 「달라이 라마 시대는 끝났는가」, 『시사IN』, 2008년 3월 29일, 36쪽.
20) 고형일, 「달라이 라마의 평화사상」, 『불교학연구』 제2호, 2001년 6월호, 9쪽에서 재인용.

기사입력: 2008/04/23 [16:06]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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