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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독감 4] 해방촌과 오래된 감자
 
두부   기사입력  2002/02/05 [11:16]
기울어진 거리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거리의 우수와 신비』, 1914년


해방촌, 나의 언덕길

황인숙

이 길에선 모든 것이 기울어져 있다.
정일학원의 긴 담벼락도 그 옆에 세워진 빈 차들도
전신주도 오토바이도 마을버스도
길가로 나앉은 툇돌들도 그 위의 신발짝들도
다 기울어져 있다.
수거되기를 기다리는 쓰레기봉투들도
그 위에 떨어지는 빗줄기도
가내공장도 라디오 소리도
「희망미용실」의 유리문에 쳐진 분홍 커튼도
그 커튼에 드리워진 미용사의 그림자도
길 자신이 무엇보다도
가장 기울어져 있다.

이 길을 걸어 올라갈 때면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고
내려올 때면 뒤로 기울어진다.
이 길의 꼭대기에는「데몰리션 노래방」이 있고
파출소가 있고 「블랑쉬 제과점」이 있다.
이름도 없고 번호도 없는
애칭도 별명도 없는
서울역으로 가는, 남영동으로 가는, 혹은
이태원으로 가는, 남산 순환도로로 가는
급, 경사길


키리코의 『거리의 우수와 신비』에서 거리는 불안하다. 그 이유는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거리는 기울어져 있지 않다. 과장된 원근법을 사용한 이 그림은 우리가 현실에서 느끼는 원근법과는 다르다. 왜 화가는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 보는 사람들을 불안케 했을까? 거리에는 한 소녀가 굴렁쇠를 굴리며 위로 올라가고 거리의 위쪽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있다(혹은 내려온다). 더군다나 트레일러 문이 열려 있다. '거리의 우수신비'라는 제목도 심상치 않다. 이 그림 속의 모든 사물들은 불안하다. 그 이유는 황인숙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길 자신이 무엇보다도 가장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키리코의 그림에서는 과정된 원근법을 사용하여 거리가 기울어진 것처럼 착각하게 해서 보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

『해방촌, 나의 언덕길』에서도 모든 사물들이 기울어져 있다. 담벼락, 빈 차, 전신주 등과 빗줄기, 라디오 소리, 그림자도 기울어져 있다. 그러나 시인의 시선은 기울어진 거리에 있지 않고 그 거리에 있는 사물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단지 그 길은 애칭도 별명도 없는 서울역으로, 남영동으로, 이태원으로, 남산 순환도로로 향해 있는 단순한 '급, 경사길'일 뿐이다. 단지 사람들은 그 길이 기울어져 있음을 알고, 걸어 올라갈 때면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내려올 때면 뒤로 몸을 기울인다. 그러면서 시인은 이 일상적인 공간을 '나의 언덕길'이라고 명명한다.

특이한 점은 키리코의 『거리의 우수와 신비』와 황인숙의 『해방촌, 나의 언덕길』은 기울어진 거리를 보여주지만, 그 내용은 정반대이다. 키리코의 거리가 불안하고 막혀 있는 듯하고 그림의 색채에 비해 그로테스크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황인숙의 시에서의 거리는 서울역으로, 남영동으로, 이태원으로, 남산 순환도로로 열려 있다. 더군다나 '해방촌'이라는 제목의 일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키리코의 그림 속의 일상적인 사물들이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과 반대로 황인숙의 시에 등장하는 일상적인 사물들은 지극히 일상적으로 느껴진다. 그 사물들은 기울어진 거리와는 어쩌면 상관이 없는 듯 '있는' 것이면서도 그 거리의 일부인데도 말이다.

감자 속의 生

http://jabo.co.kr/zboard/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등불 아래서 손을 뻗어 감자를 먹고 있는 이 사람들이… 바로 땅을 일군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1885년 4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감자를 기다리며

황인숙

이건 확실히
잘못 선택한 밤참이다
한 번이라도 감자를
삶아본 적이 있는가?
스무 번도 더 냄비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찔렀다
열대야처럼 푹푹
김 속에서 감자들
生을 수그리지 않는다
성마른 소리를 지르며 가스불
시퍼렇게 달려들고
냄비는 열과 김을 다해 내뿜고
감자는 버티고 있다
덥고 지루한 전쟁이다
눈꺼풀이 뻣뻣하고 무겁다
이렇게까지 감자를 먹어야 하나?
한 번 더 찔러보고 아니면
그냥 자야겠다
밤새 찐 감자의 껍질을
살짝 벗기듯 동이 튼다.


빈센트 반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리기 위해 다섯 명의 사람들을 한 명씩 따로따로 마흔 번도 넘게 그렸고, 다시 다섯 명을 가족이라는 공간으로 불러들여 이 그림을 완성했다고 한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흐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땅을 일구고 그 속에서 나온 생산물을 먹는 지극히 자연적인, 그러면서 농부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그리고자 노력했다. 1884년부터 1885년 겨울까지 누에넨에 머문 고흐는 그곳에서 농부들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러한 고흐의 노력과 생활이 이와 같은 그림을 연출해 냈는지 모르겠다.

다섯 명으로 구성된 가족 개개인의 시선은 불안하다. 혹은 서로서로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러면서 식사를 하는 가족들의 분위기는 엄숙하기조차 하다. 마치 마네(Manet, Edouard)의 그림 중, 인물들의 시선이 각자 다른 곳을 향해 있는 『풀밭 위의 식사』을 연상하게 한다.

황인숙의 시, 『감자를 기다리며』는 한 여름밤의 꿈과 같다. 그 한 여름밤의 꿈은 시원하고 명료하게 다가온다. 밤참을 위해 감자를 삶기 시작한 일은 시인에게 '감자를 삶아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반문하게 한다. '스무 번도 더 찔러보고', '가스불 시퍼렇게 달려들고', '덥고 지루한 전쟁'이고, '눈꺼풀이 뻣뻣하고 무거'워지는 지난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감자는 그의 '生을 수그리지 않는다'(여기에서 시인은 '生'을 '생'이라고 쓰지 않고 한자로 쓴 것에 감자의 살아 있음(生)과 자신의 살아 있음(生)을 오버랩 시키고 있다, 살아 있음(生)이 감자와 황인숙에게 동시에 존재한다니?). 전쟁을 방불케 하는 한 여름밤 꿈, 속의 시인은 다시 현실로 복귀한다. '밤새 찐 감자의 껍질을 벗기듯' 아침 해가 떠오르는 마지막 구절은 다시 生의 공간으로 돌아오는 시인의 모습이다.

고흐의 그림과 황인숙의 시에 등장하는 감자. 말이 없는 그림과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는 시, 두 작품의 감자를 통해 화가와 시인은 일상적인 삶의 지난함과 부단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식탁 주위에 모여 있는 가족들과 감자를 먹기 위한 시인)이 노동의 대가와 그 생산물을 섭취하는 모습은 결코 쉽지 않은 '生의 연속성'이지 않겠는가? 고흐의 그림이 어둡고 암울하다면, 황인숙의 시는 발랄하고 재치 있게 生의 연속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다르다. 하지만 인간이 '감자'를 먹고 생을 연장해 나가는 모습은 신성하며, 고귀한 것임을 두 작가는 역설하고 있다. 또한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에서 '전쟁 같은 밤일'이라고 명명되는 야간작업과 마찬가지로 덥고 지루한 우리들의 '전쟁 같은 생'은 계속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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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2/05 [11:1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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