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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변화의 풍경에서 추억속 레닌을 만나다
[책동네] <레닌이 있는 풍경>, 사진에 담은 레닌동상 아래 러시아의 삶
 
박철홍   기사입력  2007/12/08 [00:50]
오늘날 러시아 곳곳에 남아있는 레닌의 동상들, 그 아래 펼쳐지는 새로운 러시아의 삶의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끝나버린 한 시대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 나와 눈길을 끈다.

▲이상엽 사진·글 <레닌이 있는 풍경> 책 표지    © 산책자, 2007
‘386세대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알려진 이상엽은  <레닌이 있는 풍경>을 통해 러시아의 서쪽 끝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동쪽 끝 사할린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포즈로 레닌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레닌이 있는 풍경>은 섬세하며 비판적인 사회학적 상상력으로 중국과 베트남을 비롯해 실크로드 등 지구화시대의 급변하는 공간과 삶의 풍경을 질감이 다른 사진과 글에 담았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중심인물로 이상적인 사회주의 혁명의 지도자에서 ‘박제’가 되어 국가 파시즘의 추억으로 소비되는 레닌의 이미지는 어슴푸레 ‘지금 여기의 진보’의 처지와 겹쳐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 레닌이 서있는 풍경은 지독히 쓸쓸하며 이방인의 눈에 누구도 관심없이 홀로 서 있는 그의 동상은 몹시도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
 
저자는 레닌의 동상과 그 주변에 있는 배경,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었다. 또 그는 오늘날의 러시아, 그 변화의 풍경과 그곳 사람들의 삶의 표정들을 책 속으로 옮겼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전 앞에 있는 레닌 동상 아래 사람들이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소개한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전 앞에 있는 레닌 동상  © 산책자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의 지도자에서 ‘박제’가 되어버린 레닌은 마치 그들에게 어디론가 가자고 손짓하는 듯하고, 그의 이상과 오늘의 러시아는 한참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
 
올해로 러시아혁명 90주년을 맞이해 최근 러시아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31%는 러시아가 혁명이후 경제사회 발전의 선두에 서게 됐다고 답변했다. 26%는 러시아사 새로운 역사를 이룩했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 16%는 혁명이 국가발전의 걸림돌이 되었다고 평가한 반면, 국가적 재앙이었다는 의견은 15%로 나타났다.
 
레닌이 건설한 소비에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모스크바 시는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 대항한 소련군의 출정행진을 재현했으며 수천 명은 ‘사회주의 혁명이여 영원하라’는 플래카드와 레닌의 초상화를 들며 행진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것은 옛 소련이 누렸던 초강대국의 위상에 대한 향수와 자신감의 표현인 듯하다”며 “혁명 기념일에 전국적으로 수만 명의 극우주의자들이 유색인종 추방과 슬라브족 통합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는 기사는 이미 퇴색된 혁명의 의미를 쓸쓸히 되씹게 할 뿐”이라고 전했다.
 
1만 킬로미터 넘는 여행길, ‘혁명의 추억’을 찾아가다
 
저자는 낡은 카메라를 들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와 예카테린부르크, 우랄산맥을 넘어 서시베리아의 노보시비르스크, 이르쿠츠크를 지나 극동의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9,938킬로미터에다가 사할린까지 이어지는 1만 킬로미터가 넘는 먼 여행길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추억과 푸틴의 러시아를 찾아갔다.
 
이 기나긴 행적을 따라다닌 키워드는 레닌으로 대별되는 ‘혁명의 추억’이다.
 
저자는 “‘율리시즈의 시선’으로 레닌이 있는 오늘의 러시아 풍경을 보고자 했지만 나의 사진들은 기대와 달리 러시아의 완전한 보여주질 못한다”면서 “다만 나의 사진이 그 풍경의 실체에 조금 다가갈 수 있었고, 그것이 독자들에게 전달되길 기대할 뿐”이라고 밝혔다.
 
어찌보면 <레닌이 있는 풍경>은 활자 중심의 책이나 사진만 가득한 사진집 보다는 둘이 적절하게 배합된 ‘포토 에세이’로 낯선 풍경의 속살과 인문사회적인 주제를 사색하게 하는 ‘사진 르포’에 가까운 실험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사회 문화 기행기와 다른 기획 감각을 꾀했는데 생각과 풍경을 담아낸 ‘포토 르포 에세이’가 바로 그것.
 
<레닌이 있는 풍경>에는 지난 80년 동안 세계를 분할 지배했던 소비에트 강국이 사회주의 몰락이후 변모해온 풍경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또 녹슬어가는 수많은 레닌 동상들의 쓸쓸한 풍경을 담아냈다. 저자는 혁명가들을 추모하는 마르스 광장의 ‘꺼지지 않는 불꽃’ 앞에서 자신 안의 환멸을 태워버리길 바라며 인터내셔널을 흥얼거리기도 한다.
 
사회주의가 붕괴하던 때 러시아 전역에 있던 스탈린은 사라졌는데 레닌의 동상은 도시 곳곳에 무관심으로 방치되었지만 살아남아있다는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저자는 바로 ‘그 레닌 동상이 있는 풍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곳 사람들의 형편은 어떠한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특히 저자가 모스크바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자본의 물결이 넘실대는 도심 한 복판에 레닌동상이 우뚝 서 있고, 그 동상 뒤로 일본의 기업 ‘SANYO’ 옥상 광고판이 있다. 그밖에도 바이칼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춤을 추는 듯이 코트를 입고 있는 레닌 동상 등에 이르기까지 ‘레닌이 있는 풍경’은 이채롭고 다양한 모습들이다.
 
저자는 시베리아의 자연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루는 생생한 풍경에 주목한다.
 
그들은 바로 동양과 서양의 피가 섞여 독특한 아름다움을 빚어낸 시베리아인들로 새로운 터전에서 온전한 삶을 일궈낸 사할린 카레이츠들. 이들은 스스로를 조선인도 러시아인도 아닌 ‘극동인’으로 호명하는 혼혈 3, 4세들이다. 이 새로운 세대는 역사의 비극으로부터 고유의 정체성을 찾아내어 극동 전체의 미래를 추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석날이자 광복절 오후 유즈노사할린스크의 레닌 광장에서 카레이츠들의 행사가 펼쳐지는 사진이 책에 실려 있는데 아이들이 화려한 고구려 복식을 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또 저자는 본문에서 극동의 사할린은 4만의 동포가 새로운 모습의 우리로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곳이라고 강조한다.
 
위대했던 혁명가, 이제 기념물로만 남아…추억속으로
 
박평종 사진비평가(미학)는 “러시아 어디를 가나 서있는 레닌의 동상을 보며 사진가는 감회가 새로웠을 법하다”며 “레닌이 꿈꾸었던 사회는 이런 사회가 아니었지만 현실은 비정하고 자본은 위력적이며 사진가 역시 이러한 진실을 아시아 동쪽 끝에서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레닌이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채 한 세기도 못가서 무너져 버렸으며 자손들은 다시 궁핍에 빠져들고 있고, 자본주의가 가장 두려워하여 위험인물로 여겼던 이 혁명가의 동상 주변에는 자본주의의 상징들이 모여든다”며 “사람들은 레닌 동상의 발아래에서 빵 사기에 바쁘고 동상을 배경으로 결혼 기념사진 촬영에만 몰두한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위대했던 혁명가는 이제 기념물로만 남아 역사가 되고 추억이 되어가고, 이는 작가가 레닌의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면서 “작가에게 혁명은 이제 추억인 셈이며 그것은 21세기의 씁쓸한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다큐멘터리사진가이자 작가인 이상엽 저자는 1991년 <사회평론 길>에서 글을 쓰면서 사진을 시작했다. 1999년 진보적인 다큐멘터리 사진 웹진 <이미지프레스>를 창간했으며 <여행하는 나무> 등의 무크지를 만들었다.
 
사진집 <아이들에게 전쟁 없는 미래> 이후, 출판에 힘을 써 <이상엽의 실크로드 탐사>, <그곳에 가면 우리가 잊어버린 표정이 있다> 등의 개인 저서 등을 저술했다. 그밖에도 ‘동강사진축전’이나 ‘33인의 다큐멘터리사진가’전 등의 초대전과 개인전 ‘중국 1997~2006’등이 있다. 현재 중국과 시베리아 등지에서 역사공동체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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