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사람을 따르지 마라. 가치를 따르라
생명 창조시대의 자기 경영 시리즈7
 
이동연   기사입력  2003/08/04 [14:46]

칼 야스퍼스는 '우리는 자아를 상실해 가는 마지막 역사'를 살고 있다고 말하였다. 뛰어난 실존 철학자다운 예리한 통찰이다. 

그러나 야스퍼스의 말은 반절만 맞다. 자아란 언제나 시대적 산물이기 때문에 시대의 변혁 앞에서는 늘 예전 시대에 기초하고 있던 자아는 늘 허물어 지고 새로운 자아가 탄생한다.

즉 자아란 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외형의 모습은 참이 아닌, 변하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변하고 문화에 따라 변한다. 원시사회의 자아와 정보화 사회의 자아가 같을 수는 없다. 정보화 사회의 자아와 생명이 창조되면서 급격한 문명의 패러다임 변혁이 일어 난 후의 자아가 같을 수 없다.

자아는 '내가 누구냐'인데 내가 과연 나는 누구일까?  누구의 집안에 태어나 어떤 모습을 하고 사는 나는 그야 말로 외형적인 나일 뿐이다.

외형의 모습이 참 나라면 형제들의 자아는 늘 비슷해야 한다.  그러나 형제는 고사하고 일란성 쌍둥이도 천양지차의 성격과 자아를 가진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 낳을 때 겉 낳지 속까지 낳는 게  아니다.'라는 속담이 나온 것이다.

주로 집과 마을중심으로 평생을 보냈던 저 봉건 체제에서도 저런 속담이 통용되었거든 하물며 집은 그저 잠자는 숙소정도이고 모든 경험과 학습을 가정이 아닌 각기 다른 사회현장에서 습득하는 오늘날에는 부모자식이나 형제는 그저 '비슷하게 생긴 타인' 정도일 뿐이다.

진짜 '나'는 내 외모가 아니라 내 머리 속이다. 내 머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자아가 결정된다. '의식화'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우리는 '의식화'라는 말을 들으면 쉽게 사회주의 학습, 내지는 운동권의 사상학습 정도를 떠 올리는 데 사실 우리의 모든 일상사가 다 '의식화'의 가정이다.

모든 정보는 귀와 눈을 비롯한 오감을 통해 우리의 뇌로 전달되어 뇌의 판단력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언론도 종교도 정치연설도 다 의식화의 한 과정이다.
    
육체적 노예보다 더 부자유한 노예가 바로 정신의 노예이다.

과거 봉건 체제에서는 우선 사람의 손과 발을 노예로 만들고 부려 먹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본주의에서는 민주주의의 외피를 쓰고 사람의 심령을 관리하려고 한다. 

자본주의에서는 개인에게 일단 육체적 자유는  준다. 그러나 끊임없이 광고로, 신문으로, 교육으로 개인의 심령을 지배해 버린다.

그래서 프랑스의 전위 철학자들은 현대의 매스 미디어를 '심령의 관리술사'로 지칭한다.
 
사람이란 존재는 누구에게, 또 그 무엇에게 한번 마음을 빼앗기면 그 다음부터 모든 것을 다 바치게 되어 있다.

이단성이 농후한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이 이 원리를  잘 이용하고 있다.  변호사든, 의사든, 교수든 누구든지 그들에게 걸려 한번 세뇌 교육을 당하면, 집도 팔고 가정도 버린다. 모든 것을 교주에게 다 갖다 바치고서도 교주에게 감사하다며 머리를 조아린다.

어디 그 뿐이랴 주변에서 지켜본 일이다. 몹시 가난하게 사는 한 아주머니의 홀로 되신  아버지가 꽤 많은 유산을 남기고 돌아 가셨다.

남자 형제들은 배울 만큼 배워 다 자리를 잡고 살고 있으나 여 형제들은 제대로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해 도회지로 나와 지금까지 힘겹게 살고 있다.

그런데도 이 아주머니는 아버지의 유산중에서 당연한 자신의 몫을 쉽사리 주장하지 못한다. 왜? 
'남 형제들과 사이가 나뻐질 까 봐.'
'그래도 아버지의 재산은 남자들꺼니까'
그 아주머니와 상담하면서 내 마음 속에 이미자의 노래가 생각났다.
'여자로 태어나서 죄가 될까 봐' 
나는 그분에게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아주머니의 몫을 당당히 가져오십시오. 그게 돌아 가신 아버님의 뜻입니다.'     

자기의 심령을 잘 관리하라. 여러분의 마음에 개나 소나 마구 들어와 짓 밟는 것을 허용하지 마라.

어느 정치인이, 어느 교수, 목사, 스님, 어느 신문이 무슨 주장을 할 때면 반드시 그 주장의 반대 경우도 생각해 보라 즉 반성적(反省的) 사고가 필요하다.  

심령 관리술사들에게 우리의 권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반성적 사고를 줄기차게 반복하면 된다.

반성적 사고를 즐기는 사람들은 미식가(美食家)와 같다. 미식가는 음식을 골라서 먹는다. 자기의 체질을 알고 취향을 알고 건강 상태를 잘 알고 거기에 적절하게 맞춰서 먹는다.

육체의 건강이 음식의 종류에 달렸듯이 마음의 건강도 어떤 책을 읽고 무엇을 보고 듣느냐에 달려 있다.

물론 돌이나 쇳 덩어리를 먹어도 소화가 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 않은 대다수는 내게 유익한 음식을 적절하게 배분해 먹어야 한다.

무슨 신문을 보는가? 인터넷의 어느 싸이트에 주로 들어 가는가? 누구의 말을 많이 듣는가? 모두 당시의 정신건강과 직결되어 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자기를 지켜 낼 수 있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보고 들어도 된다.

그러나 아직 마음이 여려 누구의 한 말씀에 좌지 우지된다면 골라서 보고, 골라서 읽고, 골라서 접속해야 한다.  
      
또한 미식가는 먹거리에 대한 자기의 취향은 있으나 절대 그 한가지 음식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역시 자기 심령을 잘 관리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으나 그 한 사람에게 맹목적으로 매 달리지는 않는다.  

이는 우리가 지난 여러 번의 대선을 거치면서 충분히 경험한 바이기도 하다. 누가 아무리 좋은 말을 그럴 듯 하게 외친다고 하여 전적으로 추종할 필요는 없다. 가치와 개혁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사용해서 자기의 야망과 이기심을 충족 시키려는 사람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아 왔다.
    
사람을 추종하지 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울고 웃지 말고 그 사람이 걸어온 길과 걷고자 하는 의지를 보라. 특히 일대일의 만남이 아니라 다중 속의 한사람으로 만날때는 더더욱 주의하여야 한다.

일대일의 만남 속에서는 어느 정도 개인의 성품에 대한 검증이 가능하나 대중 속에 스크린이나 마이크를 통해서만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검증이 불가능하다. 즉 얼마든지 교묘하게 이미지 조작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미지로 만나는 성격이 강한 사람들, 즉  어느 단체의 의장이든, 사장이든, 대형종교 집단의 지도자이든, 정치인이든 좋아 할 수는 있으나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수는 없다. 

그래서 브랜로만 먹고 사는  회중의 지도자들에게는  특히 적절한 견제와 균형의 장치가 필요하게 된다.

생명 창조사회의 특성도 근본적으로 '사람 지향에서 가치 지향'으로 변한다. 그 이유는  생명창조사회의 트렌드는 매가(mega)가 아니라 나노(nano)이기 때문이다.

'사람 지향에서 가치 지향으로'라는 이 간단한 슬로건 속에는 수 많은 함의가 있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모든 조직을 인치가 아닌 법치로, 카리스마가 아닌 시스템으로, 결과보다는 절차적 과정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변해 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 필자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인천 한누리 공동체를 이끌며 생명창조의 시대로 접어든 인류 사회의 정신적 좌표와 인류의 상생을 위한 미래신화를 연구하며 방송 강의와 집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강화도 : 미래신화의 원형] 등의 저서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3/08/04 [14:46]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