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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개념'도 모르는 비평가들은 가라
[추천사] 류상욱의 영화이야기, '호모 시네마쿠스'
 
정성일   기사입력  2003/07/31 [16:04]

▲영화의 개념도 모르고 수사학적인 글쓰기의 방식으로 글을 쓴 영화비평가들은 자성해야...     ©아웃사이더
영화가 개념이라는 것을 말한 사람은 철학자 질 들뢰즈이다. 그러나 이미 영화의 대가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볼쉐비키 혁명 시대에, 이제 막 시작한 영화의 초창기에 에이젠쉬테인과 그의 동료들은 영화의 기술인 편집을 철학적 의미의 몽타주에로 끌어 올렸다. 조금 과장하자면, 영화가 없었다면 벤야민의 몽타주 글쓰기는 절반만 완성되었을지도 모른다. 1920년대 초현실주의자들은 영화의 이미지에서 영혼을 보았으며(포토제니), 그 안에서 리듬을 발견했고, 더 나아가 영화의 미래를 통해서 모던한 시대정신의 물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같은 시간에 지가 베르토프와 괴벨스는 정반대의 목표를 갖고 영화-기계장치의 선동성을 믿었다. 영화는 전쟁의 도구이며, 혁명의 마이크이며, 자본의 상품이며, 미학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개념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러나 점점 더 오늘날 주변의 영화 평들은 소설이 되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다루는 도구인 개념의 역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기 때문이다. 맥락 없이 개념이 불려오고, 때로 그 개념은 수사학적인 빈 말 이외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것은 결국 영화를 오해하는 것이거나, 또는 논리적 오류에 빠지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기만하는 것이다. 영화감독들이 영화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거의 배우는 것이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안에 개념을 가다듬고 그것을 통하여 영화를 새롭게 해석하고, 그 안에서 적극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개념의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자꾸만 영화에 관한 글들은 대중에게 굴복하고 있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그들에게 읽을 거리를 제공하고는 있지만, 그 반대로 생각할 거리를 주고 있지는 않다. 영화에 관한 글은 영화를 더 빨리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느리게 보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이것만이 소란스러운 소비의 경제학에 휘말려든 영화의 과잉생산에 맞서서 위대한 영화를 지키는 방법이다. 아도르노가 자신의 글을 요약하지 말라고 하소연한 것은 그가 자본주의의 저 야만적인 소비의 광기와 맞서는 방법이다.

    우리는 영화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설명하고, 그 안에서 다시 생각해보고, 그것을 세상의 삶과 견주어 보기 위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개념을 더 다듬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 개념의 정의뿐만 아니라, 그 개념의 계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처음 이 책을 집어든 독자는 망연자실할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상투적인 감독의 이력서나, 실제적인 영화 텍스트의 읽기나, 또는 유행이 되어버린 용어들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물론 필요하다면 벤야민과 라캉을 읽어야 한다. 또는 푸코와 데리다를 알아야 한다. 보들리야르와 리오타르가 동원되어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영화의 개념들의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이 책의 저자인 류상욱씨가 뒤따라가는 저 저변의 근심은 영화에 관한 근본주의자의 고민이다. 그는 지금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아무 의심 없이 사용하고 있는 개념들이 어디서 온 것이며, 그것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다듬어졌으며, 그 안에서 오류를 유도하는 또 다른 텍스트들이 어떻게 끼어 들었으며, 그 개념의 주변에서 벌어진 역사가 무엇인지 물어본다. 나도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누벨 바그 영화들은 1959년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서, 혹은 멀리 히로시마에서 벌어진 아방가르드 영화 청년들의 소동처럼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의 알제리에 대한 근심을 읽지 못한다면, 그건 마치 80년대 남한의 독립영화들을 광주와 무관하게 읽어내려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모든 개념은 자기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그 역사는 세상에서 단 한번의 주사위 던지기, 바로 벌어진 세상의 사건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몽타주라는 말을 쓸 때 레닌을 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미장-센이라는 말을 할 때 프랑스 30년대 인민전선을 떠올려야 한다.

    이 책에서 류상욱씨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프랑스 영화학의 계보가 아니라, 프랑스 영화학의 논쟁 속에서 가다듬어진 영화의 개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호들갑스러운 서방세계 영화이론이나 미학에 대한 최근의 유행에 서툰 애교를 부리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개념들은 꼼꼼하게 그 논쟁의 배경과 반론, 그리고 사회적 사건들과 함께 불려 나온다. 그래서 때로는 우회하는 것처럼 보이고, 또는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여겨질 지도 모른다.

   빙빙 돌면서, 「까이에 뒤 시네마」의 작가주의-정책과 구조주의를, 그리고 장 미뜨리의 영화심리학 주변을 탐색하면서 영화를 생각한다. 오손 웰즈는 작가이지만, 존 휴스턴은 작가가 아니라는 말에 대해서 우리는 그 말이 우열을 비교한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또는 니콜라스 레이는 작가이지만, 빈센트 미넬리는 작가가 아니라고 한 말은 신중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의 영화에서 누가 작가이고, 누가 아닌가를 판단하기 위해서, 그래서  이것이 살생부나 재판부의 판결문과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되기 위해서 우리는 신중하게 그 말의 뜻을 물어보아야 한다.

    그저 잠시 생각해 보라. 남한 영화평론가들에게 작가들의 명단은 있으나. 작가가 아닌 감독들의 명단은 없다. 왜 그러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것을 판결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까이에 뒤 시네마」가 목표로 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또는 영화에서 구조주의는 왜 필요한 것이 되었을까? 단지 유행에 몸을 실은 것 이외에 그 어떤 프로젝트 때문일까? 왜 구조주의 기호학은 모던 영화시대와 만날 수 있었던 것일까? 또는 68년 5월 이후 영화학은 갑자기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데리다는 왜 영화에 관심이 없을까? 왜 바르뜨는 영화 대신 사진에서 그의 미학적 근거를 끌어냈을까? 푸코는 왜 그렇게 끈질기게 영화를 위험하게 생각한 것일까? 왜 들뢰즈는 결국 영화에 관한 책을 쓰고 만 것일까? 이 모든 것들은 왜 그러한 순서를 밟아서 논쟁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류상욱씨가 뒤따르는 방법은 항상 질문이다. 아마도 그가 빌려온 가장 위대한 유산은 데카르트일 것이다. 그는 방법론에 대해서 근본주의자로서 질문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대답을 찾는 대신 질문을 구성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그렇다. 우리는 올바르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른 대답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책일수록 꼼꼼하고 끈질기게 따라 붙어야 한다. 그리고 저자와 마찬가지로 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당신께서 이 책을 읽을 때 부디 지하철에서 영화 주간지 읽듯이 심심풀이로 읽지 마시라. 또는 성문종합영어 읽듯이 정리하지 마시라. 그 반대로 계속 질문을 던지고, 그 안에서 이제까지 알고 있던 영화의 개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라. 아마도 이 책은 그저 수사학적인 글쓰기의 방식으로 영화 개념의 잡동사니로 위장한 채 영화에 관한 글을 써 온 영화비평가들을 두렵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근본주의자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영화평론가, 전 [키노] 편집장


[저자 류상욱] 소개

1969년 태어남.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서 석사논문 '앙드레 바쟁의 작가론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동국대학교 영화과 박사과정에 있다.

월간 「키노」에서 게스트 스탭으로 불어번역을 했으며, 1998년부터 2002년까지 'La Traversee'란 제목으로 프랑스 영화이론에 관해, 2003년에는 'Trans-theory'라는 제목으로 영화작가론에 대한 연재를 했다. 9·11테러가 미국의 자작극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는 티에리 메이상의 『무시무시한 사기극』(시와 사회, 2002)을 번역했다.
현재 영화이론에 대한 다양한 주제로 글쓰기를 하고 있다.  bazin87@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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