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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국 철학자들의 작은 향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술모임에서 나온 사회진보, 민주주의 사상과 주체
 
벼리   기사입력  2007/07/21 [09:52]
1. MT를 간다 했다. 장소는 북한산 송추계곡. 지난 여름에 이런저런 핑계로 궁싯거리다가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꼭 가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책은 가지고 가지 말아야지 …, 했는데, 결국 들고 다니면서 읽고 있던 책(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을 가방에 넣고 말았다. 거기 가서 어디 읽을 짬이 있으랴마는 책상물림 버릇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다.
 
2. 학교에서 조교 일을 보고 오후 늦게 출발한다. 송추계곡 입구에 마중 나온 김 선배. 완연한 여행객 차림이다. 아니 피서객인가? 곱슬거리는 긴 머리를 머리띠로 넘겼다. 선글라스까지. 스타일 짱이네! 한 마디 던진다. 선배의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산길 주변으로 듬성듬성 꽃다지들이 바람에 누웠다 일어선다. 개망초다. 조선 땅에서 제일 흔하다고 해서 ‘개’자를 붙인다.
 
다른 ‘개’씨 일족도 있다. 개나리. 잘 있었니? 너 본지 참 오랜만이다. 마음 속으로 인사하면서 문득 가슴이 짠하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이 꽃들. 그런 거다. 제일 흔하다는 꽃조차 시멘트 투성이 서울 바닥에서는 천연기념물이지 않은가. 개망초, 개망초, 개망초, … 입술에서 간질거리다가, 속내 어딘가에서 핀다. 심장 근처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마음이 환하다. 
 
▲송추계곡 산그늘     ©벼리
3. 민박집에 짐을 부리고 계곡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문득 산그늘이 성큼 다가선다. 올려다보자 길목에 아름드리 선 느티나무 가지들 틈으로 초록의 잎사귀들이 반짝거린다. 온 몸의 구멍들이 입을 크게 벌리고 이파리들이 내뿜는 산공기를 허겁지겁 들이킨다. 어질어질하다.
 
먼저 온 팀은 벌써 계곡 어귀에 한 상 거나하게 차려 놓고 있다. 연구소 활동에 노상 농땡이를 부린 덕에 나를 반갑게 알아보는 분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들 머리카락이 허연 고참들이다. 살아남아, 대학에서 아니면 다른 곳에서 가르치고 공부하는 분들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의 뿌리를 이루는 분들. 아니면 피바람 몰아치는 7-80년대의 강호를 버텨온 수승한 내공의 고수들이라고나 할까. 그 시대를 거쳐 오면서도 철학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 나로서는 가늠하기 힘들다. 오체투지라도 할까보다.
 
김 선배가 자리를 권하는데, 듣는 둥 마는 둥 계곡물로 눈길을 준다. 어르신들(?)의 조용한 담소가 계곡물 소리와 뒤섞인다. 첨벙거리며 건너는 사람들. 미끄러지고, 피 나고, 가슴이 먹먹하도록 안타까웠을 것이다. 자리 맨 뒤쪽 귀퉁이에 이번 기수 사람들이 보인다. 슬그머니 그리로 끼어든다.
 
4. 오후 7시 30분 쯤 해서 슬슬 토론 준비에 들어갔다. 발제자는 H 선생, 논평자는 L 선생. 「사회진보와 민주주의 사상, 그리고 주체」. 이걸 다 읽기는 뭐하고, 라며 H선생이 운을 뗀다. 이건 논문에 대한 내용 파악에 집착하기보다 논문의 주제를 매개로 논쟁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다, 라고 나는 의례 제멋대로(?) 생각한다. 하긴 논문을 줄줄이 읽어대는 학회나 논문발표회는 신물이 나기도 하고.
 
▲사회진보와 민주주의 사상, 그리고 주체     ©벼리
노무현 정부 들어 ‘민주화의 역설’이라는 말이 중요한 개념으로 떠돌고 있어, 최장집인데, 음 그러니까 이 개념이 뭐냐면, - 사람들이 어수선함을 걷고 다들 집중한다. 반면 나는 갑작스럽게 훅을 허용한 복서처럼 잠시 휘청거린다. 철학자가 발음하는 사회과학 개념이라 … 한철연이기에 가능하지 않겠는가. 아카데미 안이었다면 당장 난리가 났을 것이다. - 87년 민중항쟁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을 표현하는 건데, 나는 이게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면에 있어서는 의견이 좀 다르다는 거지. 뭐 조희연이나 이런 분들은 그게 ‘절차적 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고 말한단 말이야. - 그건 아니다, 그건 허구다, 고 난 속으로 생각한다.
 
선생이 그에 답하듯 다음 말을 잇는다 - 87년 이후에 자유화가 진행되었는데, 그 자유는 자본의 자유야. 그래서 이런 맥락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로크식 민주주의고, 잘해 봐야 하버마스식이고, 결과적으로 국가가 중심이 되는 것 아니겠냐는 거야. 6.29가 그거지. 789 노동자 대투쟁도 있었지만서도 ….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면서 이 자유민주주의는 대세가 되었어. 결국 자본의 자유라는 거다, 이 말이야. 절차적 민주주의? 그게 다인가 말이야. - 이렇게 되면 결국 … - 그래서 우리가 지금껏 그런, ‘비판적 지지’라든지 이런 걸 철회해야해. 자유민주주의는 아니라는 거야.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인데, - 그렇지, 이렇게 나가는 거다, 난 고개를 주억거린다. 다른 분들도 턱을 괴고 이해의 신호들을 보낸다. - 이걸 어떻게 일구어내는가가 중요하지. 이 문제에서 중요한 것이 ‘주체’의 문제고 말야.
 
맑스의 책을 보면, 거기 ‘보편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이 나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보편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가 주체가 되는 거지. 이게 인민주권인거고, 로크나 루소가 아니라 …, 그리고 보편계급은 다중도, 아나키즘에서 말하는 그 주체도 아니야. 요즘 다중을 많이 말하는데 그게 뭐야? 아나키즘이라구. - 글쎄 … 난 좀 곤혹스러워진다. 어째서 다중이 이렇게 이해되는 걸까? 하여간 - 소수자 운동도 있는데, 결국은 그 다양성을 통합할만한 철학적 이론이 필요하지 않는가라는 것이지. 자본주의 너머의 대안이 필요해. 지금은 … - 이 정도 말씀하셨으면 거의 다 하신 것 같군.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 P선생이 나선다. 아니 근데, 그 주체라는 게 말입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요? 그게, 그러니까, 프롤레타리아고, 진보진영이야. 그러니까 그게 뭐냐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다중과도 구별이 안 되지요. 응, 비정규직이나 배제된 프롤레타리아들일 수도 있고 …. - 이 문제로 한참의 시간이 간다. 논쟁이 오가고, 목청도 높다. 발제자인 H 선생은 담배를 연신 피워 물고. -
 
이래서는 논의가 제자리다, 고 난 생각한다. 김 선배가 나선다. 자, 자, 자꾸 했던 말이 또 나오고 그러는데요, 논평자가 요약하고 질문 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논평자인 L선생이 말문을 연다. 발제자의 주장을 요약하는 것도 좋은 논평이겠지요. 일단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자면 말입니다, 논평문에, “민주주주의는 이념이기도 하고 그 이념에 도달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직접민주주의로 실현되든 대의민주주의로 실현되든, 인민 또는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말하면 그들이 실제로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민주주의 여부를 가리는 기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있는지는 첫째, ‘정치적 민주화’(절차적 민주주의)와 둘째, ‘사회경제적 민주화’(소유권, 분배의 평등)를 통해 드러날 것이다”고 내가 썼어요. 그 뒤를 또 읽으면, “문제는 지배 세력이 소유권을 틀어쥔 채 불평등한 분배를 정당화하는 방법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로서의 정치적 민주화를 앞세우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온전한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피지배계급을 자기편으로 포섭하는 데 있다”는 겁니다.
 
H선생의 한국민주주의에 대한 진단은 부정적인데, 첫째로 그게, “정치적 민주화는 어느 정도 이루었지만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전혀 이루지 못했다”는 거고, 이게 한국민주주의의 위기라는 거에요. 이건 또 민주 정부 스스로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도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시민사회도 이런 면에서는 마찬가집니다. 이걸 ‘신자유주의 발전동맹’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는 자본주의”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겁니다. 이때 변혁주체의 문제가 등장하는데요, 그건 보편적 단독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논평문을 더 보면, “우선 경제의 재정치화다. 경제가 핵심영역이고 전투는 이곳에서 결정될 것이지만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진보정치는 권력관계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데, 가난한 자가 인민주권의 담지자라면 민주주의는 가난한 자를 위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가난한 자의 민주주의, 가난한 자에 의한 민주주의여야 한다”라는 거지요.
 
L선생의 설명에도 의문은 남는다. 주체가 여전히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진다. 그러니까, 절차적 민주주의로 변혁이 가능하지 않다는 거지요? 그렇다. 그럼, 지금의 정부가 ‘민주정부’가 아니라는 건데, 이 개념 말고 다른 개념은 없나요? 글쎄다.
 
여기서 주체 문제는 사실 ‘변혁주체’의 문제고, 그렇다면 구체적인 계급분석이 있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든다. 논평문에도 그와 관련한 질문이 가장 쟁점이다. H선생이 답한다. 그건, 정규직, 비정규직 등등을 포괄한 주체인데, 이 주체는 주력, 동맹 등의 레떼르를 붙이지 않는 주체인 거고, 배제된 이들, 이 모든 사람들의 동맹이야. 질문이 계속 나온다. 그럼, 선생님, 이 PT의 ‘보편성’을 이룰 보편적 요소는 뭡니까? … 자기이익이 아니라 사회변혁의 전망을 가지는 것이겠지. - 애매하다, 난, 고개를 흔들고 만다. 결국 PT독재로 가는 건데 … - H선생이 내 이런 생각을 확인시켜 준다. 그러니까 주체화 전략은 말이야, 정통 맑스주의의 혁명적 측면, 그러니까 PT독재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지. 그걸 재구성해야 한다는 거야. 혁명적 상황이 필요하다면 주체는 구성되어야 해. H선생은 단호하다. 난 토론 내내 다중이 오해받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찜찜하다.
 
▲토론 뒤풀이, 불빛이 정겹다.     ©벼리
5. 김 선배의 중재로 한참 열이 오르던 토론이 3시간여 만에 끝났다. 계곡으로 나서니 거기 저녁 만찬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다. 숯불에 올려놓은 돼지고기도 지글거리며 익고 있다. 난 말 한마디 안했는데도 배가 고프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선선한 바람이 좋다.
 
술자리에 앉아서도 토론이 이어진다. 어째서 사람들은 아나키즘과 자율주의를 동렬로 놓고 맑스주의와 그토록 차별을 두는 거지? 김 선배에게 묻는다. 주위는 떠들석하고, 밝혀 놓은 전등빛으로 벌레들이 들이친다.
 
술자리는 아마 새벽녘에야 끝났으리라.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또 한 뼘 사유가 깊어질 것인가. 모르겠다. 공부라는 게 어디 자로 재듯 명쾌한 코기토를 선사하는 것이 아니니까. 다만 여름 내내 기억할 것들이 많이 생겼고, 또 봐야할 책들이 더 많이 늘었고, 시력이 더 나빠졌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승용차 안에서 I 선배가 말한다. 철학이라는 거 다른 학문과는 달라. 이건 성취감을 주기보다 부족하다는 느낌을 더 많이 주는 거야. 공부하고 나서 나는 더 많이 알았다가 아니라, 아 … 난 또 이만큼 모르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거든. 미치지.
 
차가 막힌다. 목적지까지 겹겹이 장애다. 비로소 내 정신과 몸마저 그럴 것이다. 그러면 해탈하려나? 끝이 없다. - NomadIa
 
*이 글에 나오는 분들의 이니셜은 필자가 임의로 만들었음.
수유너머N에서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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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7/21 [09:5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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