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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건연합, 토건국가는 미래를 잠식한다
[인물과 사상의 눈] ‘사익’ 위해 국토 파괴하는 토건국가 문제 해결해야
 
홍성태   기사입력  2007/06/21 [18:38]
토건국가 미스터리

‘서독’의 유망한 청년 영화감독이었던 파스빈더는 1974년에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제목의 영화를 발표했다. 10년쯤 전에 서울의 대학로 동숭시네마테크에서 상영했던 이 영화는 중년의 독일인 청소부 여자와 모로코인 노동자 청년의 사랑을 다룬다. 두 사람은 백인과 흑인의 차이뿐만 아니라 무려 20살이라는 나이의 차이도 뛰어넘어 진실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이 너무나 진실해 여자는 운다. ‘너무 행복’하고, 또 ‘너무 불안’해서.

불안은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불안한 사람은 사실 행복할 수 없다. 불안은 정말 영혼을 잠식한다. 어느덧 6월항쟁으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민주화 20년은 불안으로부터 해방되는 20년이었다. 군부독재는 모든 사람을 항상적 불안 상태로 몰아넣으려 했다. 감히 군부독재에 저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를 찾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성이다. 군부독재는 모든 사람을 불안으로 몰아넣으려 함으로써 결국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6월항쟁이 폭발했던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은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헌법 제1조의 ‘민주공화국’ 규정은 비로소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독재 산업화 세력’이 자행한 노동과 자연에 대한 ‘이중의 착취’가 끝나고, ‘민주 산업화 세력’이 노동과 자연을 돌보는 ‘진정한 선진화’의 길이 열릴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민주화와 고성장이 계속 이루어졌으나, 양극화와 생태위기는 사실 개선되지 않고 더욱더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화에 대한 회의와 의혹마저 커지고 있다. ‘민주 산업화 세력’이 ‘독재 산업화 세력’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결과로 다시 ‘독재 산업화 세력’에게 유리한 정세가 조성된 것이다.

‘민주 산업화 세력’은 ‘박정희체계’라는 낡은 사회체계를 해소하고 ‘생태적 복지사회’라는 ‘진정한 선진사회’를 이룩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개발주의를 철저히 비판하고 토건국가를 시급히 개혁해야 한다(홍성태, 『개발주의를 비판한다』, 당대, 2007). 토건국가는 정책결정 과정을 왜곡하고, 정부조직과 재정구조를 왜곡하며, 산업구조와 고용구조의 개혁을 저지한다. 토건국가는 ‘진정한 선진화’의 가장 큰 적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한국의 민주개혁 세력 혹은 진보개혁 세력은 이 망국적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토건국가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토건국가 미스터리’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한국의 민주개혁 세력은 정권의 교체에 관해 열변을 토하거나 코뮌과 같은 생경한 용어를 남발하면서 정작 이 나라를 ‘기형국가’로 만든 토건국가의 생생한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하다(홍성태, 『현대 한국사회의 문화적 형성』, 현실문화연구, 2006). 정권을 교체하거나 공동체를 만드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노무현은 정권 중심의 민주화가 안고 있는 한계를 완전히 입증해 주었으며, 토건국가의 개발계획은 수많은 공동체를 한 순간에 없애 버릴 수 있다.

불행하게도 토건국가는 민주화 이후에 오히려 더욱더 강화되었다. 우리의 미래를 잠식하는 토건국가에 대해 우리는 커다란 불안을 느껴야 한다. 토건국가를 개혁하기 위한 ‘민주화의 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혈세의 탕진과 국토의 파괴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이다
 
토건국가의 개념

국가는 일정한 지리적 경계 안에서 배타적 권력을 행사하며, 다른 국가들에 대해 자주적 관계를 유지하는 정치적 주체이다. 민주국가는 국민의 합의로 수립되고 작동한다. 국민이 대표를 뽑아서 주권을 위임하고, 대표들은 입법부를 구성해서 법을 만들고, 법에 따라 행정부와 사법부를 설립하게 된다. 결국 민주국가의 수립은 입법부의 구성으로 시작해서 행정부와 사법부의 설립으로 일단락된다. 이러한 민주국가는 크게 형식적 민주국가와 실질적 민주국가로 나뉜다. 형식적 민주국가란 민주주의를 내걸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제와 비슷한 독재가 시행되는 국가를 뜻한다.

사실 국가의 특징은 여러 기준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토건국가는 무엇보다 경제정책을 기준으로 국가의 특징을 포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토건국가는 통상국가나 공업국가와 같은 범주로 묶일 수 있다. 또한 근대 국가는 대체로 통상과 공업에 힘을 쏟으면서 가장 강력한 개발의 주체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민주와 독재의 차이를 떠나서 모든 근대 국가는 사실상 개발국가였다. 그런데 개발은 심각한 파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로부터 개발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국가는 개발이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면서 아예 토건국가가 되었다.

여기서 ‘토건’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토건’의 법적 용어는 ‘건설(construction)’이며, 말 그대로 ‘토목과 건축’을 뜻한다. 토건에서 더 중요한 쪽은 당연히 토목이다. 토목은 건축에 비해 훨씬 커다란 자연의 변형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토목공사’는 “인류생활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여러 구조물을 만드는 작업”으로 정의되며, ‘토목’이라는 말은 땅을 파고 나무를 이용해서 구조물을 만들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만리장성 공사 때부터 벌써 ‘토목’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대체로 ‘공공재’를 만드는 사업이기 때문에 ‘공공사업’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영어에서는 public works가 ‘토목공사’를 뜻하기도 한다(네이버 백과사전, ‘토목공사’). 또한 ‘토목공학’은 “국토의 보전·개수·개발경영을 맡는 공학으로서, 역사적으로는 군사공학에 대비해서 인간의 생활환경 향상을 위한 공학을 총칭한 학문으로서 발달”했다고 한다(네이버 백과사전, ‘토목공학’). 영어로는 토목공학을 civil engineering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문명공학’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처럼 ‘토건’이라는 말 자체는 부정적인 뜻보다는 긍정적인 뜻을 더 많이 담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토건은 문명을 상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문제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토건사업에는 언제나 거대한 자연의 파괴가 따르기 때문이다. 토건국가는 무엇보다 정부조직과 재정구조가 이러한 토건사업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토건국가에서는 국가의 운영과 사회의 작동이 모두 토건사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토건사업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러나 토건국가에서는 불필요한 토건사업이 너무나 많이 시행되며, 필요한 토건사업이라도 민주적으로 시행되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대체로 근대 국가는 근대적 하부구조의 건설은 물론이고 경제성장의 촉진을 위해서 활발히 토건사업을 추진하는 개발국가의 성격을 지닌다. 경제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 개입이 가장 적다는 미국도 일찍이 ‘TVA사업’이라는 엄청난 토건사업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고자 했다. 토건국가는 ‘개발국가의 가장 타락한 형태’로서 ‘정치권과 토건업이 유착하여 세금을 탕진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국가’이다. 토건국가는 혈세의 낭비, 국토의 파괴, 부패의 만연이 국책사업으로 펼쳐지는 대규모 토건사업을 매개로 구조화된 ‘기형국가’이다. 따라서 토건국가의 개혁은 ‘기형국가’의 정상화로서 그 자체로 중대한 ‘국가발전’에 해당한다.

정책결정 과정이 올바로 이루어지는 국가는 결코 토건국가가 될 수 없다. 정책결정 과정 자체가 크게 왜곡된 국가가 아니고서는 새만금 개발사업이나 시화호 개발사업처럼 불필요한 대규모 토건사업이 국책사업의 이름으로 강행될 수는 없다. 따라서 토건국가의 개혁은 사실 민주주의의 기초적 과제이다. 개발독재의 구조적 유산인 토건국가가 개혁되기는커녕 더욱 강화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민주화는 대단히 ‘기형적 민주화’였다. 이 사실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밝은 미래’는 없을 것이다. 
 
토건국가의 구조

좁은 의미의 토건국가는 행정부를 중심으로 입법부와 사법부를 포함한 국가기구를 뜻하며, 넓은 의미의 토건국가는 경제와 일상을 포함한 사회 전반을 뜻할 수 있다. 그 구조는 대체로 토건정부, 토건정치, 토건경제의 관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대규모 토건사업의 주체로서 토건정부가 확립되고, 그것을 중심으로 토건정치, 토건경제가 형성되며, 나아가 국민의 의식 속에 토건의식이 확산된다. 이렇게 해서 대규모 개발사업을 국책사업으로서 끊임없이 벌이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지는 ‘기형국가’로서 토건국가가 맹렬히 작동하게 된다. 이렇듯 토건국가의 구조적 핵심은 토건정부이며, 따라서 토건국가의 개혁을 위해서는 정부조직과 재정구조의 개혁을 강력히 추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의 재정에서 토건 부문은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까? 놀랍게도 그것은 거의 30%에 이른다. 2007년도 정부 총지출 규모는 예산과 기금을 합쳐서 237조 1000억 원이다. 여기서 직접적 건설부문 예산은 18조 2000억 원(7.7%)이고, 공공부문 건설투자는 무려 52조 3000억 원(22.1%)에 이른다. 이렇게 막대한 예산을 써서 전국 곳곳에서 불필요한 도로․공항․댐․신도시 건설, 간척사업 등이 이루어진다. 새만금 개발사업과 시화호 개발사업을 비롯해서 불필요한 대규모 건설사업이 국책사업의 이름으로 전국 곳곳에서 맹렬히 펼쳐지고 있다. 이렇게 전국 곳곳에서 대대적으로 소중한 국토를 파괴하기 때문에 삶의 질의 물리적 기반인 환경 질이 갈수록 악화되고, 이렇게 국토의 파괴에 엄청난 재정을 투입하기 때문에 복지나 교육 등 삶의 질 확충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복지운동이나 교육운동을 하는 쪽에서 토건국가 문제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히 문제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다를 막아버린 새만금. 방조제가 이어진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구글위성사진 캡춰

경제적으로 보아서 토건국가는 개발국가의 확대로 시작해서 토건업의 과잉 성장으로 완성된다. 토건업의 과잉 성장에 따라 토건업의 영향력이 과잉 성장한다. 토건업이 과잉 성장한 상황에서 토건업의 위축은 즉각 경제와 고용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행정부와 입법부는 물론이고 사법부도 최선을 다해 토건업의 위축을 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제까지 새만금 개발사업을 비롯해서 일단 시작된 대규모 개발사업이 중단된 적은 한번도 없다. 여기에 토건업의 강력한 로비가 작용해서 결국 ‘항상적 과잉상태의 토건경제’가 형성된다. 민주화에 따라 이러한 경향은 약화되기보다 오히려 강화되었다. 정부와 정당이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토건업의 위축을 피하려는 경향이 더욱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토건국가의 문제는 ‘민주화의 역설’과도 구조적으로 연관되며,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와 정당의 책임은 더욱더 크다.

여기서 통계청의 ‘2006년 건설업 통계’를 자료로 해서 한국의 토건경제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2005년 한국의 GDP는 약 787조 5000억 원이었다. 같은 해 ‘GDP 대비 건설업의 비중’은 매출액 기준으로 무려 19%(142조 6227억 8100만 원)를 넘어섰으며, 부가가치 기준으로 보더라도 무려 7.8%(61조 7404억 500만 원)에 이르렀다. 이러한 비중은 심지어 개발도상국보다도 높은 것으로서 ‘병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이다. 예컨대 2001년도 주요 국가의 GDP 대비 건설업의 비중을 부가가치 기준으로 보면, 미국과 서구는 4~5% 수준이었고, 한창 고성장을 구가하는 브라질·러시아·중국은 7% 수준이었으며, OECD에서 가장 높은 수준인 일본은 7.1%였다. 이에 비해 한국은 7.7% 수준으로 단연 높은 수준을 보였다.

한국은 ‘토건경제의 덫’에 빠져 산업구조와 고용구조의 ‘선진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토건경제’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지식경제’는 그저 공염불일 뿐이다. 땅을 파서 10원을 버는 경제가 머리를 써서 10억원을 버는 경제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런 토건경제가 토건정부와 토건정치에 의해 형성되고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지식경제로의 발전을 가로막는 항상적 과잉상태의 토건경제는 극히 인위적인 정책의 산물인 것이다. 이처럼 경제의 왜곡을 낳은 한국의 토건국가는 박정희의 개발독재 시대에 형성되었으며, 전두환 시기에 잠시 조정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노태우 시기에 크게 확장되었고, 김영삼과 김대중 시기에도 계속 확장되었으며, 노무현 시기에 이르러 그야말로 폭증을 이루게 되었다. ‘한반도 대운하’와 같은 망국적 구상은 이런 문제적 역사의 산물이다.

▲ 새만금 저지 집중투쟁 모습.     © 우리힘닷컴 제공

이처럼 토건국가가 강력하게 확립되어 있는 상황에서 개발주의 정치가 해결되지 않고 개발주의 공약이 남발되는 것은 당연하다. 많은 국민들이 개발주의에 맞서기보다는 편승해서 이익을 취하는 쪽으로 적응되어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오늘날 지역주의는 명백히 개발주의의 허울일 뿐이다. 따라서 토건국가의 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노력이 강화되는 동시에 이 문제를 깨닫고 개혁하기 위한 시민의 실천도 크게 강화되어야 한다. 사실 다수의 국민들은 토건국가와 개발주의의 문제에 깊은 우려를 품고 있다. 문제는 적극적으로 개발이익을 추구하는 소수의 ‘미꾸라지’들이다. 이들은 토건국가의 문제를 ‘투기사회’의 문제로 연결시키면서 더욱 악화시킨다. 따라서 이들을 규제하는 정부의 책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 대운하’와 같은 무책임한 구상은 이런 요청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참여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배신감’의 수준에 이른 배경에는 극도로 악화된 토건국가와 투기사회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참여정부는 줄곧 토건국가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지지를 확대하고자 했다. 행정복합도시, 문화중심도시, 전통문화도시, J벨트개발, 혁신도시, 기업도시 등 참여정부가 추진한 대규모 개발사업은 너무나 많다. 2006년 가을에 당시 추병직 건교부 장관은 갑자기 수도권 신도시 개발계획을 발표해서 어렵사리 잠잠해지던 부동산시장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토건국가 세력의 음모론마저 제기되었다. 그런데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건교부는 수도권 신도시 개발계획을 강행하고 있다. 2005년 6월에 감사원에서 사실상 폐기를 요구했던 한탄강댐 건설계획도 건교부는 되살려서 2006년 12월에 공식적으로 착공했다. 문제의 핵심에 개발주의의 화신인 건교부가 자리 잡고 있다. 
 
토건국가의 주체

토건국가는 토건재정의 확대를 통해 토건경제의 강화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여러 주체들의 집요한 노력이 작용하고 있다. 구조적으로 보아서 이 주체들은 정계, 관계, 재계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불필요한 대규모 개발사업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운영을 실제로 좌우하는 세 주체의 연결은 필수적이다. 이것을 보통 ‘정관재 연합’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민주화에 따라 ‘정관재 연합’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합리성의 형식을 갖추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언론과 학계의 지원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 결과 ‘정관재 연합’은 ‘정관재언학 연합’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연합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토건연합’은 무엇보다 ‘돈줄연합’이다. 불필요한 대규모 개발사업에 사용되는 막대한 혈세는 흔히 ‘눈먼 돈’으로 불린다. 그중에서 직접 부패에 사용되는 돈은 거의 20%에 이르며, 그렇지 않은 돈도 사실상 혈세를 낭비하는 것이다. ‘정관재언학 연합’은 뇌물, 월급, 광고비, 연구비를 지급하거나 서로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혈세를 나눠 가진다. 여기서 직접적 부패에 해당하는 뇌물만이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직접적 ‘범죄’에 해당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일 뿐이다. 불필요한 대규모 개발사업을 위해 엉터리 기사를 보도하거나 연구를 수행하는 것도 사실은 부패만큼이나, 아니 사실 그런 보도나 연구야말로 부패를 가능하게 하는 합법적 수단이라는 점에서 불법적 부패보다 더 나쁘고 잘못된 것이다.

토건연합은 ‘공익’을 내걸고 불필요한 개발사업을 추진해서 국토를 파괴하고 혈세를 탕진해서 ‘사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흔히 ‘마피아’에 비유되곤 한다. 은밀히 활동하는 조직범죄 세력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토건 마피아’는 분야별로 전문화되어 있기도 하다. 예컨대 ‘간척 마피아’ ‘발전 마피아’ ‘도로 마피아’ ‘댐 마피아’ 등이 그것이다. ‘댐 마피아’는 댐 건설을 지배한다. 댐 건설은 토건국가가 작동하는 대단히 유효한 방식이다. 홍수와 가뭄에 대한 국민의 두려움을 적극 자극해서 댐 건설을 정당화하기 쉽기 때문이다. 댐은 많은 기능을 수행하고 여러 의미를 가지지만, ‘댐 마피아’에게 댐은 그저 거대한 ‘먹이’일 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댐 마피아’는 댐 건설을 강행하기 위해 말 그대로 최선을 다한다. 이러한 ‘댐 마피아’가 존속하는 한 시대가 변한다고 해서 댐 건설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한탄강댐 건설계획은 아주 좋은 예이다. 2005년 6월에 감사원은 이 계획이 경제성이나 환경성은 말할 것도 없고 절차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았으므로 원점에서 재검토하도록 했다. 그 직전인 2004년 말에 지속가능발전위원회는 이 잘못된 계획을 승인해서 그 존재이유 자체에 대한 심각한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2005년 8월에 국무조정실은 새로 연구를 하는 방식을 취해서 다시 비슷한 내용의 계획을 제시했다. 그리고 2006년 10월에 건교부는 처음의 잘못된 계획과 사실상 같은 계획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그 내용은 쉽게 말해서 1조 900억 원의 혈세를 들여서 한탄강 상류에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를 쌓는다는 것이다. 한탄강댐 건설계획은 막대한 혈세의 탕진과 국토의 파괴를 추진하는 전형적인 토건국가 사업이다.
 
댐 건설이 엄청난 자연 파괴와 문화 파괴의 문제를 낳는다는 사실을 ‘댐 마피아’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반면에 ‘댐 마피아’는 댐 건설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 여러 사이비 논리를 사회적으로 널리 유포시킨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물 부족론’과 ‘댐 만능론’이다. 요컨대 한국은 ‘물 부족 국가’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야 하는 데 그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역시 댐 건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물 부족 국가’라는 주장은 건교부조차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짓말’이며, 댐의 본질적 문제는 이미 ‘세계댐위원회’도 명확히 지적한 사실이다. 한국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댐 건설계획이 아니라 댐 해체계획이다. 이러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 잘못을 강행하는 강력한 주체인 ‘댐 마피아’를 없애야 한다.
 
토건연합은 거짓으로 진실을 은폐하고, 혈세를 탕진해서 자신의 ‘사익’을 추구한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에서 추방당하고, 소중한 국토가 만신창이로 파괴된다. 이런 문제적 상황이 민주화 이후에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민주개혁 세력이 토건국가의 문제에 대해, 그 주체의 개혁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하다는 사실이다. 환경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조차 토건국가라는 개념을 그저 ‘수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토건 마피아’의 문제를 밝히고 개혁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하청을 받아서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에는 ‘갈등 조정’이 중요한 명분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갈등’이 아니라 ‘저항’이다. ‘토건 마피아’는 갈등의 주체가 아니라 저항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는 ‘생태적 복지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 토건국가를 개혁하는 것은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것이다. 건교부를 폐지하고, 각종 개발공사들을 통폐합하는 것은 그 구체적 과제이다. 이를 위해 문제를 일으키는 거대한 주체들에 대한 연구가 크게 활성화되어야 한다. 개발독재의 전위대로 설립된 각종 개발 공사들과 건교부와 산자부 등의 개발 부서들을 그대로 두고 ‘생태적 복지사회’를 향한 진정한 선진화’는커녕 정치적 민주화의 진척도 이루어지기 어렵다. 추상적인 이념이나 정권 중심의 민주화가 아니라 삶의 질 중심의 민주화를 원한다면, 개발독재의 구조적 유산인 토건국가의 문제에 대해, 그 핵심적 실체로서 정부조직과 재정구조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쏟아야 한다.
 
토건국가에 시달리면서 토건국가에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군부독재에 시달리면서 군부독재에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과 같다. ‘사익’을 위해 막대한 혈세를 탕진해서 국토를 파괴하는 토건연합의 문제를 널리 알리고 해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만성적 불안에 시달리면서 명백한 파국을 향해 치달리게 될 것이다.

* 글쓴이는 상지대 사회학 교수입니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www.inmul.co.kr) 2007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이며, 출판사의 허락하에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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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6/21 [18:3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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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맹덕 2022/06/15 [14:51] 수정 | 삭제
  • 독서중 토건국가에 대해 찾다가 읽게돼었는데 너무좋은글이네요.. 지금은 2022년이고 2007년 작성한 글이라 15년이 흘렀는데 한국이 크게달라진게없는것같아 슬프네요 ㅠㅠ
  • 홍교수님 화이팅 2007/06/22 [05:21] 수정 | 삭제
  •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가슴 아파하고 있었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보았으면 좋겠어요.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