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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죽이기' 해도 너무 한다
조중동은 이성을 회복하라!
 
강준만   기사입력  2003/04/24 [00:40]
'익명 취재원'의 오·남용

"일선 검사들은…입을 모았다. 대다수 검사들은…분위기였다. 대검의 한 간부는…말했다. 대검의 또 다른 간부도…성토했다. 법무부 관계자는…항변했다. 한 검사는…말했고, 또 다른 검사는…주장했다. 대검의 한 간부는…말했다."

이는 지난 2001년 10월 한국언론재단 연구팀이 분석한 기사 중 익명 취재원이 가장 많은 기사로 제시된 사례다. 한국과 미국의 신문들의 취재원을 비교 평가한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 신문들의 기사 1건당 평균 취재원은 1.78개로 미국 신문(10.1개)의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신문의 경우 익명 취재원이 너무 많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남도영, <기사 1건당 취재원 평균 1.78개>, 『국민일보』, 2001년 10월 16일, 21면)

미국 신문의 기사 길이가 우리보다는 길기 때문에 위 통계만으로 우리 자신을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또 '비공식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의존도와 취재원의 '자기 노출'에 있어서 한미간 문화적 차이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인구와 세계적인 영향력의 차이로 인한 '규모의 경제'상 우리가 취재 인력에서도 열세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렇게 너그럽게 이해하려는 자세를 갖되, 따질 건 따져보자. 우리 언론인들 스스로 자기 성찰의 차원에서 그간 제기해 온 한국 언론의 고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익명 취재원'의 오·남용이었다. 언론개혁 문제에 대해선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을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견해가 크게 다르지만, 이 점에 관해선 상호 견해 차이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서 취재원을 익명으로 처리하는 건 정당하다. 일단 우리는 언론인의 직업적 윤리를 믿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그게 아니다. 너무 무책임한 보도가 너무 많다. 이게 아예 '관행'이 돼 버렸다. 이건 통계 수치로 잡힐 수 없는 것이다. 언론의 권력기관화로 인해 "언론과는 싸우지 않는 게 좋다"는 속설에 순응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익명 취재원의 당파적 악용이지만, 이마저 그런 관행에 묻혀 당연한 듯이 간주되고 있다.

지난 3월 14일 문화관광부 장관 이창동이 내놓은 홍보업무 운영 방안은 그런 문제들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했다. 차분하게 논의해보면서 지나친 게 있으면 바로 잡고 모자란 게 있으면 추가해서 언론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이랴. 무슨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서 과거 독재정권들처럼 어디 지하실로 끌고 가 고문을 할 리도 없지 않은가.

조중동의 조폭적 행동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던가? 오히려 조중동이 '독재자' 노릇을 하면서 '고문'을 가했다. 연일 '융단 폭격'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감정적이고 거친 공격을 대규모로 퍼부었다. 그것도 온갖 왜곡을 일삼으면서 말이다. 기사 제목도 왜 그렇게 자기 스스로 누워서 침 뱉는 것들로만 뽑아대는지 그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나라당의 성명 내용을 큰 기사 제목으로 뽑은 게 과연 공정한가 하는 건 두 번째 문제다. 예컨대, <군사정권보다 더한 언론 길들이기 의도>(중앙 3월 15일자)라는 제목을 보자. 조선과 동아도 이런 식의 제목을 양산해 냈는데, 이건 조중동 스스로 노무현 정권에 의해 길들여질 수 있다는 걸 인정한다는 뜻인가? 오히려 조중동이 한나라당에게 화를 내야 할 발언이 아닌가?

조중동은 '막가파'가 되기로 작정한 걸까? 기사 제목이건 칼럼 제목이건 완전 막가파식이다. 다음과 같은 제목들을 보라. 완전히 벌거벗은 선동 문구다.

<"정권에 유리한 기사만 보도…국민 알권리 침해">(조선 3월 17일자),
<이창동 감독 '언론과 전쟁'>(조선 3월 17일자),
<"5공땐 보도제한 하더니 노정권은 취재제한하나">(조선 3월 18일자),
<"공무원취재 제한 옛 동독서나 가능">(중앙 3월 18일자),
<언론의 손발을 묶나>(조선 3월 29일자),
<5공 시절 국방부 취재 봉쇄 닮아가나>(조선 3월 29일자)


상명대 교수이자 영화평론가인 조희문이 『동아일보』 3월 19일자에 쓴 <자유를 말하던 이창동 감독이…>라는 제목의 칼럼은 최악이다. 조희문은 이창동의 홍보업무 운영 방안이 '조폭적 행동'이라고 매도하는데, 내가 보기엔 조희문과 『동아일보』가 '조폭적 행동'을 보인 것 같다.

흥분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발언을 해도 그걸 알아차리기 어렵다. 조중동은 이창동이 '조폭'이라는 단어까지 써 가면서 관료사회에 만연한 권위주의를 비판했을 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걸 상기해야 할 것이다. 내부에 대해서도 그렇게 비판적이면서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사람이 내부의 무슨 구린 구석을 감추겠다고 언론 자유를 위협할 정도로 취재를 제한하겠는가?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는가?

누워서 침 뱉지 말자

매사를 악의(惡意)로만 해석하겠다고 들면 밑도 끝도 없는 법이다. 물론 매사를 선의(善意)로만 해석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최소한의 균형 감각과 차분한 토론 자세일 것이다. 조중동의 이성 회복을 촉구한다. 아니 이성 회복을 거부해도 좋으니, 최소한 누워서 침 뱉는 짓만큼은 삼가주면 고맙겠다. 이와 관련, 『미디어오늘』 기자 이영환이 3월 20일자에 쓴 글에서 아주 뼈 있는 말을 했다. 다음과 같다.

옳고 그름을 따져보기 위해 문화관광부의 이번 운영방안을 다시 한번 읽어봤다. 어떤 내용이 문제일까. 답을 찾아가다가 엉뚱하게도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한자 성어에서 생각이 맞춰버리고 말았다. '아, 그래 우리도 언론통제를 당하고 있지.'
본지의 특성상 동아, 조선, 중앙일보는 중요한 출입처다. 본지 기자들은 이들 신문사를 취재하고, 또 기자들의 의견을 들어 좁게는 언론계에, 넓게는 본지를 읽는 국민들에게 언론의 현실을 알려주는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3개 신문사를 상대하는 본지 기자들은 출입 자체에 꽤 애를 먹고 있다. 자유로운 출입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사 가운데 보안의식이 철저하기로 소문난 조선일보는 편집국에 들어가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본사 사옥 1층 로비에서부터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걸러지고' 있다.……
모두가 보안상의 이유라고 하지만 그 속에는 속된 말로 '척 보면 아는' 모순이 숨겨져 있다. 문화관광부의 운영 방안을 가장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는 3개 신문사는 지금도 국민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다.

자, 물어보자. 조중동은 왜 『미디어오늘』 기자의 출입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가? 우리들은 개인 사기업이자 족벌기업이기 때문에 문화관광부와는 다르다고 말하려는가? 설마 그렇진 답하진 않으리라 믿는다. 아무리 조중동이 개인 사기업이자 족벌기업이라 하더라도 공적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이상, 조중동도 자유로운 취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데엔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조중동의 적반하장(賊反荷杖)

문제는 완전히 자유로운 개방을 했을 경우에 생기는 문제일 것이다. 조중동의 경우엔 완전 개방을 한다 해도 드나들 사람이 기껏해야 『미디어오늘』같은 언론 전문지 기자 몇 명에 지나지 않겠지만, 문화관광부는 사정이 크게 다르다. 모든 매체들을 차별하지 않고 대우하기로 한 이상 수십, 아니 수백 명의 기자들이 문화관광부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달리 말해서, 문광부 청사 내 취재 제한은 기자실 개방과 브리핑 제도의 도입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중동은 기자실 개방과 브리핑 제도의 도입에 대해선 아무 말 못하고 청사 내 취재 제한만 문제 삼고 있다. 예컨대, 『중앙일보』 3월 29일자 사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기자실 개방과 브리핑제도의 도입에 반대하지 않는다. 정부가 브리핑을 1주에 한 번 하든 두 번 하든 자체적인 판단에 따라 진행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신제도의 도입과 함께 강행하고자 하는 취재 제한 방침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언론에 대한 불신감을 바탕에 깔고 이루어진 취재의 제한은 정권에 유리한 자료와 정보만을 일방적으로 흐르게 하는 정권 홍보의 방편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취재 제한이 아니다. 기존의 잘못된 관행을 바꿔보자는 것이므로, 취재 환경 변화다. 그 조치가 나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기자실 개방과 프리핑 제도의 도입에 따른 것이지 조중동이 의심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게 아니잖은가. 지금 조중동은 기자실 개방과 브리핑 제도의 도입에 대해선 정면으로 반대를 하기 어려우니까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어거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여전히 예전의 특권의식을 갖고 "너 한번 당해볼래?" 하는 식의 몰매를 주었다는 말이다. 그래놓고선 '전쟁'이라는 단어를 이창동에게 떠넘기고 있으니 세상에 이런 적반하장(賊反荷杖)이 없다.

취재 환경 변화로 인한 문제를 극복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없는 게 아니다. 얼마든지 타협책이 가능하다. 그러나 조중동은 처음부터 그런 지혜를 발휘하겠다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시종일관 '이창동 죽이기'로 일관했다. 나는 많은 언론학자들이 이 중요한 점을 간과한 채 조중동의 나팔수 노릇을 해준 것에 대해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심지어 일부 진보적 언론인들까지 가세했다. 정말 왜들 그러는가? 조중동이 먼저 모든 걸 힘으로 찍어 누르려는 식의 '조폭적 행동'을 보인 것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오아시스'의 분노?

조중동의 '이창동 죽이기'에 있어서 내 시선을 가장 사로잡은 건 고려대 영문학과 교수 서지문이 『조선일보』 3월 18일자에 쓴 <'오아시스'의 분노>라는 칼럼이었는데, 아무래도 서지문에 대해선 따로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서지문이 '이창동 죽이기'를 위해 그 칼럼을 썼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결과가 그랬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서지문의 칼럼은 그 함의에 있어서 매우 위험할 뿐 아니라 다른 어떤 칼럼이나 기사에 비해 사실상 이창동과 개혁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창동의 『오아시스』를 감상하고 난 뒤의 느낌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 서지문의 칼럼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배우들의 연기와 이창동 감독의 연출은 매우 훌륭했다. 그런데 그 영화가 그냥 소외된 사람들, 반사회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포용을 촉구하는 것을 넘어, 소위 '정상인'에 대한 불신과 적의를 부추기고 있다고 느껴졌다. ……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개혁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국민은 없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개혁이 너무 성급하고, 그 방법이 강압적이고, 개혁이 이루어내려고 하는 사회의 비전이 선명히 제시되지 않기 때문에 저항과 두려움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새 정부의 대통령과 신임 장관들의 발언을 보면 개혁의 목표가 개혁 그 자체 -또는 기존 질서의 전복-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왜 서지문은 『오아시스』 이야기를 하다가 노무현 정권의 전반적인 개혁 이야기로 넘어간 걸까? 나는 서지문이 노무현과 그 일행이 기존 질서에 대한 불신과 적의를 갖고 있으며 그걸 부추기고 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아시스』 이야기를 꺼냈다고 느껴졌다.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서지문은 왜 그러는 걸까? 이미 서지문에 대해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 있지만, 종합적으로 한 번 말씀드릴 필요를 느끼게 된다.

대선시 서지문의 활약

서지문은 김용옥 비판으로 유명해진 분이다. 물론 이런 표현은 서지문에게 결례가 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일반 대중의 지식인 인식 방식으로만 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가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김용옥의 텔레비전 특강을 '공해(公害)'로까지 규정하면서 격렬하게 반응한 사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서지문을 알게 되었다는 걸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나는 그 전까지만 해도 서지문에 대해 아주 좋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물론 그가 쓴 글의 내용이 내 맘에 쏙 들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의 과도한 김용옥 비판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서지문의 주장에 반론을 펴면서도 행여 서지문이 기분 나빠 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쓰려고 무진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나의 『이문열과 김용옥』이라는 책에 실린 <지식인상을 둘러싼 '문화 충돌'인가?: 서지문의 김용옥 비판에 대해>라는 제목의 글이 바로 그것이다.

내 기억으론 서지문이 김용옥 비판 사건을 계기로 『조선일보』에 정기적인 기고를 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의 칼럼을 지켜보면서 그가 글을 쓰는 『조선일보』라는 매체가 서지문의 생각까지 바꾸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서지문이 대선 기간 중에 쓴 두 편의 칼럼은 웬만한 『조선일보』 사람도 주저할 수준의, 과격한 불공정성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서지문은 『조선일보』 9월 17일자에 쓴 <한국 대통령후보의 '反美'>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노무현의 미국관을 문제 삼으며 지금으로선 노무현이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는 주장을 한 데 이어, 『조선일보』 11월 25일자에 쓴 <'위장결혼'>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선 "노무현과 정몽준의 '위장결혼'이 집권으로 이어질 경우를 생각하면 너무 아찔"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서지문은 대선이 끝난 뒤에도 노무현과 관련된 칼럼을 계속해서 썼는데, 그 칼럼들의 내용에도 혀를 끌끌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서지문은 『조선일보』 12월 23일자에 쓴 <자연인 노무현, 공인 노대통령>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무현 당선자의 걱정스러운 몇 가지 성향들로 인해 국가경영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을까 불안하다. 무엇보다도 걱정스러운 것은 노 당선자의 면밀하고 사려깊지 못한, 충동적인 발언과 행동이다. …… 공식 외교석상에서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막말을 해서는 안 되고, 폴란드에 가서 독일이나 독일인을 칭찬하는 실수를 범해서도 안 될 것이다."

서지문은 정말 걱정이 되어 위와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서지문이 『조선일보』에 정기적인 기고를 하면서 어느새 『조선일보』에 중독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한동대 법학부 교수 김두식이 『한겨레』 1월 6일자에 기고한 <토론이 숨쉬게 하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을 보면서 순간 나는 서지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해 상반기 민주당 국민경선 이후 일부 신문들이 지속적으로 생산해온 노무현 당선자의 이미지는 거의 '개념 없는 또라이'에 가까웠다."

사실이 그랬다. 특히 『조선일보』에서 그랬다. 서지문은 노무현을 '개념 없는 또라이'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일국의 대통령 당선자에게 "공식 외교석상에서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막말을 해서는 안 되고" 운운하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서지문이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해 김용옥의 강연을 '공해'라고 욕했다고 해서 누군가가 서지문에게 "공식 세미나 석상에서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막말을 해서는 안 되고" 운운하는 충고를 한다면 서지문은 그런 충고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

조선일보 권력 중독을 경계하자

그러나 서지문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해볼 뜻이 전혀 없는 듯하다. 서지문은 『조선일보』 2003년 1월 20일자에 쓴 <노무현의 구애(求愛)>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자신이 <자연인 노무현, 공인 노대통령>이라는 제목의 칼럼에 대해 받은 반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무 잘 썼다', '정말 통쾌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 주어서 고맙다'는 치하도 무수히 받았고, 노 당선자를 부당하게 흠집내려 한다는 거센 공격도 많이 받았다.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나에게 항의를 하고 욕설을 한 독자들의 대부분이 내가 마치 약자를 공격하기나 한 것 같이 분노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 우리 나라에서 제일 막강한 사람을 비판한 것이었는데,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아직도 고군분투하는 약소자로 생각되는 것일까? 노 당선자의 지지자들이 아직도 자신들을 소수집단, 미약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다. 그렇다면 그들은 권력을 획득한 자로서의 여유나 관용이 없이, 자신들을 적들에 포위된 투사들로, 대부분의 국민을 정복해야 할 '타자'로 간주하지 않을까. 그러니 '점령군'의 비유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무력한 호소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서지문이 꼭 역지사지를 해주길 바란다. 서지문의 학생들에게 서지문은 매우 막강한 사람일 수 있다. 서지문이 단지 막강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생들의 그 어떤 비판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교수-학생'의 관계와 '대통령 당선자-교수'의 관계는 다르지 않느냐는 항변이 나올 법하다. 나는 서지문이 자신의 칼럼이 실린 『조선일보』와 자신의 칼럼이 무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서지문도 원 없이 만끽했겠지만, 『조선일보』의 힘은 막강하다. 노무현보다 더 막강하다.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조선일보』를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전 연세대 교수 송복이 『월간조선』 2003년 3월호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을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

"노무현 당선자가 삼성을 이길 수 있나요? 노무현 정권이 조선일보를 이길 수 있나요? 이길 수가 없어요. …… 펀더멘털이 되어 있고, 예산의 15% 이상을 좌지우지 못하고, 노무현이 등장해도 파워 시프트 안 일어납니다. 국가가 잘못 가도록 보수 우파가 놔두지 않을 겁니다. 보수 우파는 약한 것 같아도 굉장히 셉니다."

나는 서지문이 노무현보다 더 강한 『조선일보』와 보수 우파의 힘에 신뢰를 갖고 초조해 하지 말기를 바란다. 송복도 말했지만, 『조선일보』에 칼럼 한 번 쓰면 여기저기서 무수히 많은 치하와 더불어 공격도 받는다. 그게 과연 서지문 개인의 힘 때문일까? 『조선일보』라고 하는 신문의 힘 덕분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서지문이 쓴 칼럼의 문제는 '노무현-서지문'의 관계가 아니라 '노무현-『조선일보』'의 관계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서지문이 대선 기간 중에 이회창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면 그게 과연 『조선일보』 지면에 실릴 수 있었을까?

나는 서지문이 정치 칼럼을 쓰는 걸 자제하길 바란다. 나는 '전문가'임을 내세워 비전문가가 정치 칼럼을 쓰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전문가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 역시 전문가가 아니면서도 정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전문가 아닌 사람들도 얼마든지 정치 칼럼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나의 평소 소신이다.

그러나 나의 그런 소신에 비추어 보더라도 서지문의 경우에는 지나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는 연달아 계속 노무현을 비판하는 칼럼을 네 개나 썼다. 나는 서지문이 『조선일보』 권력에 중독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던 서지문은 결코 그런 지식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지문에겐 역지사지(易地思之)가 필요하다

나는 아직도 서지문이 『문화일보』 97년 8월 22일자와 10월 4일자 칼럼에서 이문열에게 가했던 비판을 기억한다. 이문열에게 그렇게 혹독한 비판을 가했던 정신의 소유자가 5년 후 『조선일보』 지면에서 노무현을 집요하게 비판한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다. 서지문은 자신의 이문열 비판은 어디까지나 이문열의 남성 우월주의를 비판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노무현 비판과 무관하다고 주장할 지도 모르겠다. 나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의 정신이란 게 무엇인가? 수구적 페미니스트가 가능한가?

그런 질문에 답하는 의미에서라도 아무래도 서지문의 이문열 비판의 한 대목을 여기에 다시 소개해야겠다. 서지문은 『문화일보』 1997년 8월 22일자에 쓴 칼럼에서 "'선택'이라는 소설을 보면 작가 이문열은 여권주의자들을 대부분 성도착자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다"고 일침을 가했다.(서지문, <남성들의 긴박한 선택>, 『문화일보』, 1997년 8월 22일, 6면) 그러자 웬만한 비판엔 대해선 끄떡도 않던 이문열이 『중앙일보』 1997년 9월 9일자 지면을 이용해 서지문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이제 그만 논쟁을 그치자"며 아주 구차스럽고 교활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변명이 어찌나 구차한지 서지문은 "안전장치로 '그릇된 전도열에 감염된' 등의 수식구를 몇 개 넣었다고 해서 작가의 여성해방 이념과 여성해방론자들에 대한 혐오와 적개심이 감추어지지는 않는다"면서 다음과 같은 따끔한 비판을 가한 바 있다.

이문열 씨는 이 책에서 여권론자들을 은근히 나병환자와 후천성면역결핍자에 빗대기도 했고, 9월 9일자 모 일간지 기고문에서는 '제멋에 겨워 신나게 돌아치는' 여권론자들에게 자기의 소설이 '뭣 좀 된다 싶은데 갑자기 덮어 씌워진 한바가지 얼음물 같았을 것'이라느니 하며 여성운동가들에 대해 계속 야비한 언사를 남발하고 있는데, 이것이 영향력 있는 작가이며 더욱이 고귀한 조상들을 자랑하는 양반의 후예가 써도 되는 말인가. 그리고 책에서 동료·후배들의 소설 제목을, 작품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한 것이 '유감'이라고 했는데, 그는 일왕(日王)처럼 정식 사과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인가. 끝으로 말해두고 싶은 것은 비록 몇 사람 여성주의자들이 그의 소설의 어이없는 메시지에 대해 반박했지만, 그것이 무어 이 작품을 여성운동에 대한 가공스러운 위협으로 간주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선택'으로 인해 한국의 여성운동이 치명상을 입었으리라고 미안해하거나 또는 자축(自祝)하지 않아도 된다. 한 완고한 남성작가의 비이성적이고 억지스러운 비난에 흔들리기에는 수천 년을 내려온 부당한 억압과 인격말살을 거부해야 한다는 여성들의 자각과 의지가 너무나 강인하고 결연하니까.(서지문, <'선택'의 어설픈 훈계>, 『문화일보』, 1997년 10월 4일, 6면)


여기서 중요한 건 서지문의 이문열 비판 내용은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지금의 서지문에게 되돌아갈 수 있다고 하는 점이다. 나는 서지문이 제발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하면서 지금 자신이 이문열과 얼마나 비슷한 위치에서 노무현과 이창동 등 과거의 아웃사이더들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지 깨닫는 기회를 가져보길 바란다.

『조선일보』에서 영문학자인 서지문에게 칼럼을 맡겼을 때엔 '정치 칼럼니스트' 행세를 해달라는 건 아니었을 게다. 영문학자도 얼마든지 정치에 대해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서지문처럼 계속해서 노무현과 그 정부에 집착하는 건 영 어색하다. 언젠가 서지문에게 드린 부탁이었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다. 서지문이 『논어』와 같은 고전들을 차분히 다시 읽으면서 지나친 과격을 좀 자제하는 동시에 중용의 도를 지켜주길 바라마지 않는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http://inmul.co.kr 5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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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4/24 [00:4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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