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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은 노벨 문학상 받을 자격있어"
[사람] 일본에서 김지하 시인 구명운동 한 미야타 마리에 문예평론가
 
김철관   기사입력  2007/06/10 [12:11]

“김지하는 자신의 사고의 해체와 자기변혁을 창조한 시인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
 
▲미야타 마리에 일본 전< 중앙공론사 > 편집장     ©대자보 김철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87년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한국 상황을 취재했던 신문, 방송, 통신사 등 당시 외신기자들을 초청해 지난 8일(국회)부터 9일(프레스센터)까지 잇달아 국제언론인 세미나를 열었다. 이중 홍일점이면서 유일한 여성인 일본 잡지사에 일했던 사람이 포함됐다. 군사정권시절 사형선고를 받는 등 숱한 탄압을 받아온 김지하 시인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일본인 여성 미야타 마리에(70) 일본 전 <중앙공론사> 편집장이다. 현재 그는 일본에서 문예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김지하 시인의 시를 첫 접한 것은 1970년이었다. <주간 아사히>에 실린 ‘오적’을 읽고 시어에 압도 됐다.
 
“당시 김 시인의 ‘오적’은 조선 전통의 풍자 문학의 흐름을 받아 부정부패의 투성이가 된 지배층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로 인해 한국의 정재계를 뒤흔들게 됐다. 오적이 판매가 금지됐고 반공법위반 혐의로 투옥됐다. 주옥같은 김 시인의 시집을 일본에 발표 소개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71년 12월 작품집 ‘긴 어둠 속 저편에’를 첫 편집 간행하게 됐다.”
 
그는 1972년 5월 <창조>에 실린 풍자시 ‘비어’를 발표해 다시 체포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출판활동만으로 김 시인을 구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저명한 문학가 오다 미노루, 신문을 발행하고 있던 영국의 데이비드 보켓 등 3명이 나서 72년 6월 ‘김지하구원국제위원회’를 발족한다.
 
“김지하 구원운동을 하기위해 일본의 저명한 문학자 수십 명에게 ‘긴 어둠속 저편에’를 보내 위기에 처한 김 시인 석방을 위해 협력해달라고 호소를 했다. 하지만 호소에 응한 사람은 오다 미노루씨 한사람 이었다. 오다 씨와 오사카에서 < RONIN >이란 신문을 발행하고 있는 영국인 데이비드 보켓 씨를 설득해 3명이 '김지하구원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때부터 나에게 김지하 작품의 소개와 구원운동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됐다. 그리고 구원활동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계기가 됐다.”
 

 
▲통역을 한 나카가와 유미 씨(좌)와 미야타 마리에 씨(우)     ⓒ 김철관 
김지하의 최대 위기는 1974년 1월 ‘대통령긴급조치’가 발표된 이후라고 지적했다. 그로인해 정상적인 문학 활동을 못한 김 시인은 지하로 잠입하게 됐다고 밝혔다.
 
“당시 김 시인 숨어있던 원주 가톨릭성당에서 쓴 극비 원고가 일본까지 도착 한데는 원주 가톨릭성당의 지학순 주교와 그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34명이 체포됐다. 그 중 김지하 시인은 4월 25일 흑산도에서 체포돼 그 해 7월 13일 군법회의에서 사형판결을 받게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지하구원국제위원회’를 확대발전시켜 ‘김지하 등을 돕는 모임’을 발족해 전 세계 호소하게 된다. 이 때도 미야타 마리에의 역할이 컸다. '김지하 등을 돕는 모임'은‘김지하를 죽이지 말고 석방하라’등의 내용을 담고 세계적인 저명인사가 서명한 탄원서를 한국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샤르트르, 보봐르, 마르쿠제, 하워드 진, 노엄촘스키, 에드윈 라이샤워 등 세계적인 저명인사와 오에 겐자부로, 마쓰모토 세이초, 엔도 슈사쿠, 다니카와 순타로 등 다수의 일본 문학자와 지식인들이 서명을 해 주었다. 작은 운동은 세계적 규모의 운동으로 확대됐다.” 이들에게 서명을 주도한 사람도 그였다.
 
▲미야타 마리에 여사가 일본에 소개한 김지하 시인의 작품들     © 대자보 김철관
당시 그는 시종일관 김 시인의 작품을 일본 문예지 등에 소개, 발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된 후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처분으로 나올 때까지 김 시인의 구명운동에 앞장 선 장본인이다. 옥중에서 나와 82년 6월 발표한 ‘타는 목마름으로’와 그해 12월 ‘대설 남’도 신군부정권에 의해 출판이 금지됐다고.
 
“당시 나는 문예지 ‘해’라는 곳에서 편집장을 맡고 있었다. 1983년 4월호에 82년 발표된 김 시인의 시 전문을 소개했다. 이외에도 90년대 ‘모로 누운 돌부처’ 등 수많은 작품을 <중앙공론> 등 문예지에 소개했다.”
 
그는 2003년 7월 한국현대사의 의미를 겸비한 김 시인의 회고록 ‘힌 그늘의 길’이 발표됐지만 현재 일본에서 번역 출판하지 못한 점을 못내 아쉬워했다. 자신이 현재 편집 현장에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도 되풀이 했다. 하지만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의 한국은 학생시위 등으로 사회 대한 문제의식이 있지만 일본은 젊은 사람들은 이런 경험들이 부족해 사회 문제의식도 없고 관심도 없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한반도 분단의 어려운 조건에서도 순조롭게 민주화 길을 더듬어 왔다. 98년 이후 몇 차례 방문을 할 때 마다 비약과 변모에 놀랐다. 일본 젊은 사람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야당도 없고 우경화 위기가 너무 심화되는 등 일본의 퇴행이라는 현실을 앞두고 아연실색할 뿐이다.”
 
그는 98년 김지하 시인의 초청으로 한국을 첫 방문한 후 이번이 일곱 번째다. 한국에 올 때마다 김지하 시인과 만나 대화를 한다. 98년 김포공항을 통해 첫 만남을 가졌는데도 어색하지 않았고 오랜 만남처럼 자연스러웠다고. 문학을 통해 그의 사상을 꿰뚫고 있었고 편지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미야타 마리에 씨는 98년 서울을 처음 왔을 때 인사동 같은 시골 모습이 눈에 띄었는데 지금은 찾아 볼 수가 없어 약간 외롭고 쓸쓸했다고 피력했다. 
 
▲통역을 한 나카가와 유미 씨(좌)와 미야타 마리에 씨(우)     ©대자보 김철관
미야타 마리에 씨는 1936년 11월 5일 일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고, 지난 1959년부터 1997년까지 일본 <중앙공론사>에서 일했다. 일본에서 김지하의 작품 출판과 구원 활동 등을 통해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다. <추억의 작가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미야티 마리에 씨 인터뷰는 지난 8일 오후 87년 6월 항쟁 20주년 기념 국제언론인세미나가 열린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가졌다. 마침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국제학과 석사과정(3학기)을 다니면서 이곳에 나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나카가와 유미 씨의 통역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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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6/10 [12:1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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