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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폭탄' 양산하는 우리들의 탐욕
그녀와 자녀들의 고통을 함께한 자들은 누구인가
 
권태윤   기사입력  2003/07/22 [10:07]

▲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아이들이 느꼈을 당시의 공포와 절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14층 높이에서 내던질 때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난 17일, 생활고를 비관해 아파트 14층 계단 창문을 통해 큰딸(8)과 아들(6)을 집어던진 뒤 막내딸(3)과 함께 뛰어내려 숨진 손모(34.여)씨가 아이들과 함께 부평묘지공원관리사업소에서 화장(火葬)되어 납골처리장에 뿌려졌다고 한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아이들이 느꼈을 당시의 공포와 절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14층 높이에서 내던질 때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를 생각하며 밤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늦도록 잠 못 들며 잠든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하나하나 머릴 쓰다듬어 본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지뢰밭 같은 이 세상에서 나 하나 없어지면 이들이 어찌될까를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난다.

더러는, “죽으려면 혼자서 죽지 왜 죄 없는 아이들을 죽이느냐?”며 아이들을 죽인 엄마의 냉혹함을 비난한다. “자식이 어디 부모 소유물이냐?”며 부모의 정신적인 미성숙을 탓하기도 한다. 하지만, 목숨을 끊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안다면, 아이가 길가다 넘어져도 가슴 아픈 것이 엄마 마음이라는 것을 아는 부모라면, 그녀의 ‘잔인한’ 선택을 비난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남편이 직업을 잃고 곁에 없는 가정에서, 게다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까지 있는 상황이라 돈벌이에도 자유롭게 나설 수 없었을 그녀가 느꼈던 절망은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그녀가 겪던 고통은 우리가 함께 감내해야 할 공동의 것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아래를 보며 살아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돈을 물 쓰듯 하는 사람들도 넘쳐나고, 위정자들은 평생을 모아도 만들지 못할 거액을 ‘떡값’으로 받아 챙기는 기 막히는 현실 앞에서 그녀의 절망은 배로 늘어났을 것이 분명하다. TV를 켜면 아무개 선수는 연봉으로 얼마를 받았네, 우승상금으로 얼마를 받았네, 로또에 누가 당첨되었네 하는 한숨 나오는 소식이 매일같이 흘러나온다. 수십 수 백 억원의 재산을 가진 이들이 몇 만원, 몇 백 만원의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뻔뻔스런 거짓말을 일삼고 적반하장 격으로 고함을 지르는 모습이 나온다. 귀족 마케팅이니 뭐니 하며 도시락 하나에 백 만 원이 넘는 것도 보여주는 세상이다.

자본주의는 참으로 냉혹한 시스템이다. 게다가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는다는 지극한 상식이 결코 통용되지 않는 차별과 모순이 당연시되는 우리 사회에서, 자본주의란 이미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시스템의 기능을 잃었다. 술수와 편법, 잔꾀와 부정직이 부를 이루는 효율적인 수단이 되고, 자라는 청소년들마저 ‘오로지 돈만 있으면 안되는 게 없는 세상’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과연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집값, 땅값 떨어진다고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당당하게 반대하고, 자기 아이가 몸이 불편한 아이와 함께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고 항의하는 매몰찬 부모가 널려 있다. 이런 세상이다 보니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조차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가 되어버렸다.

‘같이 죽자’며 울부짖는 아이를 14층 아래로 내던지기 전에, 우리 중 누가 그녀에게 과연 “함께 살자”고 호소했을까. 그녀의 고통에 손 맞잡고 ‘힘내서 살아보자’고 말해 준 이웃도 없었을까. 그래서 죽음만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했을 그녀가, ‘아니야, 그래도 더불어 살자고 저리 마음 써주는 저들이 있으니’라고 마음을 고쳐먹도록 했을 ‘저들’이 없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고 서럽다. 우리 사회의 이른바 가진 이들은 모두들 제 욕심 차리기에 바쁘고, 제 식구 제 자식 잘 먹고 잘사는 데에만 정신을 팔고 있다.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자기 욕심을 위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고 짓밟고 이용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쌓은 부가 과연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가 있을까.

좀 더 여유 있는 이들이 어려운 이웃에게 “함께 살자”고 말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같이 죽자”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고, 결국 그들로 인해 자기 자신도 죽임을 당하는 사회가 되고 만다. 생활고를 이유로 살인과 강도행각이 늘어나고, 얼마 전의 대구지하철 화재사건처럼 대중을 향한 증오범죄가 늘어만 가는 비참한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부유층들이 많이 몰려 산다는 강남 사람들이, 인권침해를 당하더라도 ‘감시카메라’ 설치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 한심한 일이다. 담장을 높이 쌓고 보안장치를 늘리는 것으로 안전을 확보했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오히려 담장을 허물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진정한 보안이라는 것을 지금이라도 다시 깨달아야만 한다. 아무리 보안이니 안전을 추구해도 ‘같이 죽자’고 마음먹은 사람들을 막을 방법은 없다.

우리는 같이 죽지 말고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같이 죽자고 덤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함께 살자’는 마음이 깃들도록 해야만 한다. 적어도 최저생계만은 위협받지 않는 사회안전망을 조속히 구축해야 한다. 요즘 “파이를 키워야 나눠먹을 것이 생긴다.”는 성장우선론을 말하지만, 파이를 키울 사람이 배고파 죽는 상황에서 성장을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한쪽에서는 배가 터지도록 먹고도 남는 사람이 있고 한쪽에서는 굶어죽을 지경에 처한 사람들이 즐비한 극도의 차별구조가 방치된 상황에서 “파이를 먼저 키우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 마디로 ‘배부른 사람들의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다.

‘같이 죽자’는 사람들이 그 끔찍한 최후의 수단을 쓰지 않도록 도와주어야만 한다. 더 많이 갖기 위해 약자를 짓밟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강자들의 ‘탐욕열차’는 정말 이쯤해서 정지해야만 한다. 너 죽고 나 죽은 다음에야 얼마나 많이 가진들 그것이 무슨 소용일 있을 것인가. 가진 사람들이 ‘뭘 먹을까’를 고민하기보다 ‘누가 굶고 있지나 않을까’를 걱정하는 정상적인 사회가 되지 않는 한 ‘같이 죽자’는 약자들의 공멸시도는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엄마의 손에 떠밀려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던 마지막 순간에 아이들의 머릿속엔 어떤 세상이 화인처럼 찍혀 있었을까. 악몽과도 같은 그 끔찍한 현실이 되풀이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 필자는 '좋은 글을 통해 우리를 생각하는 PEN21사이트( http://www.pen21.com/ ) 운영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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