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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경이 맞아죽어도 이유가 있다?
기존 질서에 순응시키는 ‘제너럴리즘’에서 벗어나야
 
박원경   기사입력  2003/07/10 [16:41]

 ‘니가 그렇게 잘났나?’, ‘세상을 혼자살래?’, ‘독불 장군으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주위에서 많이 접하게 되는 말들이다. 일견 상대에게 겸손을 바란다는 영양진 질책인 듯 보이는 이 말이 사실은 패배주의적 발상의 발로이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을 할까?

사람들은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면 모나지 않게 둥글게 살아갈 것은 요구한다. 부당한 권력이나 잘못된 사실에 있어서도 그것을 지적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잘난 척한다’느니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등의 말로 그들의 행동에 부정적 색깔을 씌워버린다. 필자는 모든 사안에 대해서 기존의 사회와 타협하라는 그런 사고 방식을 ‘제너럴리즘’이라고 명명한다.이것은 기존 사회 모습의 장단점을 떠나서 제너럴한 모습에 편승하고자하는 사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제너럴리즘의 모습은 패배주의적 현실 인식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는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일들이다. 군대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런 사고 행태는 잘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군대 문화’라고 불리워지는 것에 사람들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군사 문화라는 것은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부분에 발언을 꺼린다. 잘못된 사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지적하기 보다는 그것은 수용하고 적응하려고 하며 그것을 넘어서 그것에 가해자가 되기까지 한다.

▲다친 의경의 모습     ©인터넷이미지
얼마 전에 있었던 한 의경이 폭행 때문에 자살한 사건과 관련해서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확실한 사인이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알려진 바로는 상관의 폭행에 못이겨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폭행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군대 내에서의 폭행에 대해서 개탄했다. 그러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죽은 사람이 뭔가 잘못한 것이 있었으니까 폭행을 했겠지”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군대 내에서의 폭행의 부당성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지만 그것은 관행처럼 묵인하는 사고에서 도래한다.

더 나아가서 그 폭행의 부당성을 지적하기 보다는 폭행의 정당성을 찾기위한 노력까지 하는 것이다. 폭행이라는 잘못된 관행에 대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패배주의적 인식이 그 폭행에 정당성을 주기위한 노력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특히나 지금의 40~50대 정도의 남성들이 이런 사고를 많이 하고 있는데 이것이 자신이 똑같은 것을 당했지만 자신에 거기에 저항하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공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재정권하에서 군대를 다녔던 그들은 군대내에서의 폭력의 일상성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인식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그것과 타협하게 되고, 그것을 내면화시킴으로써 폭력에 정당성을 부과하기까지하는 과정을 밟게된다. 특히나 잘못된 것과 타협하는 과정에서 ‘모난 돌이 정맞는다’속담을 인용해가며 부당함에 저항하기 보다는 타협하는 패배주의적 사고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제너럴리즘이 더욱 무서운 것은 이것이 잘못된 생각의 기제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군대 내의 폭력성을 여실히 경험했을 그들에 폭력의 일상성에 동조하게되고 나아가서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느니 ‘군대가서 고생 좀 해야 인간이 된다’느니 하는 식의 폭력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지적을 하고 고쳐나가기 보다는 그 문제를 지적했을 때에 부담감을 의식해서 좋은게 좋다는 식의 물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비단 제너럴리즘이 드러나는 것은 이 부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회 곳곳에서 작용하고 있다. 정치에 있어서도, 경제 사안에 있어서도, 그 생각의 정당성보다는 수에 의해 소수인 의견에 대해서는 그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세상은 혼자사는 것이 아니라는 봉합이데올로기로 입막음을 하려고 한다. 그 입막음이 실패해서 치부가 드러나게 되면 그것을 고발하고 지적한 사람에게‘반동자’혹은 ‘튀는 놈’, 혹은 ‘배신자’라는 부정적 명칭을 동원해서 그 사람이 지적한 가치를 축소하려는 노력이 보이는 것도 제너럴리즘의 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왜곡된 권위주의에 대해서 지적을 해도 사회의 분위기를 깨는 사회 비판자라는 소리를 듣게된다. 특히나 한국의 경우에는 여론, 즉 국민의 생각의 대부분을 극우 언론이 장악하고 있기에 사회에 대한 불만표출에도 거기에는 사회적에서 암묵적으로 합의된 부정어인 ‘빨갱이’라는 이름이 씌워진다. 이는 다소 높은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지식계도 예외의 문제는 아니다. 지식계에 보이지 않게 작용하고 있는 권력기제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사실상 금기시 되어있으며, 선배들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더라도 지나간일을 들추어서 무엇을 하겠느냐, 좋은게 좋은 것이 아니냐는 논리로 그런 지적을 검증하려기 보다는 무마하려는 시도가 되는 것이 지식계이다. 혹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식계의 근간을 흔드는 사람이라거나 버릇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제너럴리즘’이 가지는 가장 큰 문제는 사회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발전은 필연적으로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제너럴리즘은 그러한 변화를 수용할 수가 없다. 부정적 상황에 대해서도 제너럴리즘은 그것을 수용하게끔 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런 부정적 사회의 매커니즘에 포함되게 한다. 더 나아가 포함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역할로까지 만들어 버림으로써, 변화에 대한 목소리까지를 막게되는 역할을 하게된다. 분명 부당한 사안이 존재를 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나서면 정 맞는다는 식의 패배주의적 생각은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변화를 거부하고 부당한 현실을 수용하게하는 제너럴리즘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사회는 결코 바꾸려고 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은 작금의 현실이 그들에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가져다 줄 것이기에 그들 스스로 바꾸어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어디 국회의원들이 정치를 개혁하려고 나서겠는가, 왜곡된 경제 구조에서 돈을 번 많은 사람들이 그 왜곡된 구조를 바꾸려고 노력을 하겠는가? 부당한 사회 구조 속에서 많은 것은 차지한 사람들이 그 사회 구조를 바꾸겠는가? 전망은 극히 회의적이다. 지금의 사회는 결코 ‘좋은게 좋은’그런 사회가 아니다. 부정함에 대해서는 분명히 지적하고 저항하며 바꾸려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혼자 나서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식의 자조적인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다.

자조적 ‘제너럴리즘’에서 벗어나서 참여를 통해서 바꾸려는 노력을 보인다면 세상을 분명 바뀌게 되어있다. 지금의 사회가 과거의 왜곡된 모습에서 이나마 진전된 것은 그것을 바꾸기 위한 수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너럴리즘’을 벗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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