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의 시작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다. 종교를 음모론이라고 볼 수 있다면 말이다. 사실 종교와 음모론의 논리구조는 일맥상통한다. 모든 사건을 특정 단체나 인물의 책임으로 돌려버리는(이 범위가 좁을수록, 그리고 이론상의 단체와 실재 단체간의 능력 차이가 심할때 확실히 음모론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론을 음모론이라고 한다면 모든 일의 배후에 신의 의지를 상정하는 종교야 말로 음모론의 궁극적 형태이다.
물론 종교가 일반적으로 음모론으로 취급받지 않는 이유는 신이라는 존재는 능력의 부족이라는 경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의 '부재' 를 증명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리메이슨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칼 세이건은 '차고안의 용' 이라는 비유로 종교의 논리를 음모론과 동격에서 취급하고 있지만.
이런 면에서 볼 때 음모론과 거시이론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역사를 절대정신의 자아탐색과정으로 그려낸 헤겔 역시 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음모론자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어떠한 대원칙을 정의하는 것은 거시이론이지만 그러한 대원칙을 모든 세세한 사항에 적용시키려 하다보면 어느덧 음모론에 가까워진다. 여기서 대원칙을 세세한 사항에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상황을 조정할 수 있는, 어떤 전능한 힘을 가진 단체나 인물이 존재하여야 한다. 바로 종교는 이러한 이론상의 필수상수를 신이라는 존재로 대체하였기에(그리고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누구나 납득할 만한 결론이 나올 수도 없기 때문에) 음모론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존재를 납득할만하게 상정하지 못한다면 그 이론은 음모론이 된다.
언뜻 듣기에 음모론과 같은 이론들은 그리 큰 영향력이 없을 것 같다. 물론 음모론이 특정 집단 내에서만 소통된다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음모론이 양지로 나왔을 때, 음모론은 여론을 장악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복잡한 현실에 대한 명쾌한 설명으로 어필하기에는 음모론만한 구조를 가진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 일상이 힘들수록 사람들은 정신이나마 쉬운 것을 찾게 되는 경향이 있고 음모론은 항상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킨다. 프랑스 혁명에 대하여 부르주아 계급과 토지귀족과의 갈등, 복잡한 계급별 이해관계와 선동 메커니즘에 초점을 맞춘 서술보다는 혁명은 프리메이슨의 음모라는 서술이 훨씬 더 명쾌하고 이해하기도 쉽다. 물론 프리메이슨은 그리 대단한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바뤼엘 신부의 주장은 음모론이다.
'시온 장로들의 의정서'의 경우는 아직까지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듯한데(이미 스위스 법정에서 위조문서라는 판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계가 유대인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다면 PLO나 아랍국가들이 아직까지 존속할 가능성은 없다.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미국이 개신교적 가치와 패권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국제회의에서의 미국과 이스라엘의 자세와 미국의 대외 발언들을 종합해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재미있는 것은 유대인에 의해 조장되었다고 하는 볼셰비키 혁명이 만들어낸 소비에트 연방과 유대계 금융이 장악하였다고 하는 미합중국이 여태껏 냉전구도 속에서 대립하여 왔다는 사실이다. 이것도 유대인의 연극일까.
신이 아닌 이상 현실에서 자신의 의지를 적재적소에 모두 관철시킬만한 능력을 가진 단체나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음모론은 유대인, 프리메이슨, CIA, 모사드 등의 단체를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승화시키고 이러한 이론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사실관계를 교묘하게 왜곡한다. '의정서'의 경우처럼 아예 조작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실만 발췌하는 식으로 이론을 구축한다. 그렇기에 음모론은 이러한 왜곡의 연결고리만 밝혀낸다면 쉽게 무너지는, 모래 위의 집과 같은 이론이다.
최근 다시 제기되고 있는 황우석 사태와 관련된 해묵은 음모론도 이러한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황우석 개인에 대한 종교에 가까운 숭배는 음모론과 종교의 일맥상통함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교리화 되어가고 있는 황우석 음모론 정경(正經)에서 전능한 권력을 담당하고 있는 두 축은 한국정부와 언론, 그리고 미국이다. 축을 하나씩 분석해보겠다.
우선 한국의 정부와 언론은 과연 황우석 죽이기를 위하여 신성동맹을 맺었는가. 나로서는 노무현과 한나라당, 보수언론이 신성동맹을 맺었다는 말은 영남권과 호남권이 대선에서 같은 후보를 지지한다는 것 만큼이나 현실성이 없다고 본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자면 과연 이들이 황우석 '죽이기' 를 하기나 한 것일까. 최소한 내가 기억하는 노무현은 황우석의 연구에서 감동을 받고 일종의 면책특권까지 부여해가며 황우석 띄우기에 앞장섰다. 최근 소위 ‘황빠’ 들은 황우석이 개인의 노력으로 최고과학자의 위치까지 올라갔지만(이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을 항상 망각하곤 한다) 정부를 위시한 신성동맹이 그의 업적을 시기하여 죽이고 있다는 식으로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다. 황우석이 지금과 같이 '빠' 의 대상이 된 것은 황우석 개인의 능력만이 아니다. 물론 그의 언론공작은 탁월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종교에 가까운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과학적 엄밀성이 결여된 정부와 과학부처의 업적 과장, 그리고 언론의 받아쓰기가 결합되어 그를 희대의 영웅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를 대중의 슈퍼맨으로 몰아간 사람들은 거품이 터진뒤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고 있다. '신성동맹' 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황우석을 죽이기 위하여 결성된 음모세력이 아닌. 황우석 사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세력들을 총칭하는 암묵적 분류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와 언론의 신성동맹이 황우석을 죽이려는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미국의 음모에 놀아난 것이라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이번에는 모든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미국을 보자. 물론 미국이 지금까지 세계 역사에서 온갖 음모를 획책하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대다수는 무력이나 직접적 외교채널을 통한 것이었지 독립적 언론이 존재하는 제 3국 민주국가에서의 여론조작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영역이다. CIA나 NSA는 전지전능한 단체가 아니다. 쿠바의 실패를 상기하자.
또한 미국에게는 황우석의 연구에 위협을 느끼거나 욕심을 낼 하등의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줄기세포에 대한 부가가치의 대부분은 줄기세포의 생산이 아닌 '활용'에서 창출되며 이 부분은 아직도 개척이 되지 않은 분야이다. 진정한 '신의 영역'이라면 줄기세포를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형태로 분화시키는, 활용에 대한 능력일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러한 줄기세포 연구의 영역 구분을 무시하고 국민들에게 장밋빛 환상을 불어넣었지만(그리고 스스로도 환상에 참여하였다) 미국 정보부가 저능아 집단이 아닌 이상 미국이 황우석의 연구에 위협을 느꼈다는 것은 '황빠'들의 뇌내망상에 불과하다.
사실 국제적 분업의 상시적 재배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체제 내에서 황우석의 연구는(성공했다고 가정한다면) 저부가가치를 가진 1차 산업에 가깝다. 그리고 저부가가치 산업이 유치되는 국가는 고부가가치 산업을 독점한 중심부 국가의 '쓰레기장'이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과연 우리가 황우석의 연구에 허황된 지위를 부여한 것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그것의 성공을 기원해야 하는 것인지조차 의문스러워진다. 줄기세포의 활용에 대한 연구까지 완벽하게 이루어져 하나의 시장영역이 생성된 상황에서 미국의 난치병 환자를 위해 한국 여성의 난자가 채취되어 쓰이는 세계는 국익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평화시장 여공은 결혼해도 수년밖에 못써먹는다는 말이 황우석 연구소에 들어갔던 여성은 결혼해도 수년밖에 못써먹는다는 말로 대체된 사회는 과연 달러 몇 푼으로 넘어갈 수 있는 사회인가.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일상이 힘겨울수록 사람들은 음모론에 쉽게 몰입된다. 사회가 어려울수록 영웅주의와 음모론이 횡행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두 사상은 가면만 바꿔쓴 동일한 실체이다. 복잡한 현실을 외면하고 도식화된 단순성 속으로 도피한다는 논리적 구조에서 말이다. 황우석 음모론을 만드는 사람들은 미국의 더러운 뒷공작들을 다룬 노엄 촘스키의 저작은 많이 읽었을지 몰라도 기초적인 생명공학 교양서는 읽지 않았다는 것을, 왜곡된 시선을 스스로 반증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모든 상황을 총괄하며 거대한 음모를 획책할만한 단일화된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미셸 푸코의 저작은 물론이고.
황우석 음모론은 지금까지의 음모론과는 달리 어떠한 실재적 움직임을 이끌어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물론 이 움직임은 기괴한 콜라주이다. 현재까지 한국사회 내에서 존재해왔던 모든 주류 여론들-애국주의, 경제지상주의, 영웅주의, 과학만능주의, 전문가불신-이 민중적 담론-5·18 광주민주화 항쟁에 의하여 촉발된 반미주의-과 연계하여 만들어내는 불협화음 앞에서 나는 참담함을 느낀다.
전제 자체가 잘못된 음모론들은 현실에 대한 다양한 시각표본을 제공한다는 면에서는 가치가 있겠지만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현실을 구성해내는 자세는 사회적으로 매우 위험하다. 온전한 현실은 믿고 싶은 것들이 아닌 보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음모론적 시각으로 현실을 보는 사람은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이들에게 있어 모든 것은 음모의 연장선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자세의 댓가는 자신에게 돌아온다. 정작 중요한 문제들을 외면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사회적 기반은 물론이며 실존적 기반까지 위협당하게 된다. 그렇게 국익이 걱정된다면 FTA에 대하여 연구하라. '있었을지도'가 아닌 '아예 없었을' 국익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정치사회적 기반을 먼저 돌아보는 것이 우선이다.
음모론과 같은 유혹적인 시각에 굴복하지 않고 오성을 통하여 느끼는 모든 것으로 현실을 파악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존재를 오롯하게 지켜나갈 수 있다. P.S. 황우석의 애국주의적 선동에 홀린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과학과 과학자는 모두 국경이 없어야 한다. 과학과 과학자가 불균형을 이루는 순간 과학은 과학자의 도구가 되며 이는 결국 과학이 과학자의 의도대로 쓰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은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는 조국이 있다는 말은 야바위다. 조국 독일을 위하여 독가스를 개발한 하버와 소련에 복수하기 위하여 핵체제를 설계한 에드워드 텔러는 모두 과학을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였고 이는 비극적 결과를 낳았다. 황우석이 줄기세포를 이용한 생물무기를 만들어 북한에 살포하는 광경은 나만의 망상은 아닐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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