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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으로 사라진 `한국 현대사 증인' 신현확
[우리힘의 눈] 'TK 마피아'의 대부, 이제라도 '80년 광주의 진실' 밝혀라
 
방학진   기사입력  2006/11/25 [11:52]
*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 'TK'의 대부라 불리는 신현확 씨가 4월 26일 타계했습니다. 이에 신현확 씨를 잘 알 수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의 지난 2006년 11월 25일자 기사를 다시 올립니다.-편집자 주
최규하-전두환, 모든 비밀은 신현확에 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이 얼마 전 사망했다. 그리고 그를 대통령 직무대행으로 만든 운명의 10월 26일, 국민장으로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작년 가을 MBC 주말 드라마 <제5공화국>이 한창일 무렵 필자는 우리힘닷컴 지면을 통해 박정희 권력의 중핵인 만주인맥의 대표 최규하를 이야기한 바 있다. 그의 죽음을 보면서 일제가 세운 꼭두각시 국가인 만주국의 관리로서 독립된 대한민국의 대통령까지 오른 그의 성공담 자체가 우리 현대사의 비극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한편 언론에서는 그의 짧았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그가 혹시 남겼을지 모르는 비망록이 있다 없다를 놓고 설왕설래하고 있다. 1979년 10ㆍ26에서부터 그해 12ㆍ12 반란 그리고 이듬 해 5ㆍ18 학살과 8월 장충체육관에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까지 그가 신군부에게 당했던 모욕의 기록 말이다.
 
만약 그가 남겨놓은 비망록이 존재하고 또 그것이 유족들에 의해 일반에 온전히 공개된다면 고인이 된 최규하 자신에게는 모욕적일 지는 몰라도 후세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사료가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그 시절 그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고통을 당한 것을 생각할 때 유족들은 비망록을 공개해 조금이나마 역사 앞에 속죄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최규하가 신군부에 의해 심한 모욕을 당한 반면 신현확은 상대적으로 TK 마피아의 대부라는 별칭을 들으며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해 왔다. 전두환에게 대장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는 최규하    
  
갑자기 찾아 온 10ㆍ26은 최규하를 대통령 권한대행에 이어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고 당시 부총리였던 신현확을 국무총리로 만들어 주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군 안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있던 신군부는 박정희의 갑작스런 사망을 계기로 유신철폐 등 국민적 민주화 열망이 뜨거워지자 이를 잠재우기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해 나간다. 이것의 시작이 바로 12ㆍ12 군사반란이다. 
 
12ㆍ12이후 최규하는 이름 뿐인 대통령이었으나 반대로 신현확은 신군부와 호흡을 척척 맞추며 정부 내의 강경기류를 이끌어 나간다. 즉 짧은 국무총리 재임 기간동안 그는 당시 공화당 의원들, 특히 김종필도 당시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 김대중과 대화하며 여야 합의로 헌법 개정 등 정국을 운영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헌법개정은 정부가 주도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국민들을 더욱 자극한다.
 
이로 인해 학생들을 중심으로 계엄해제와 ‘신현확ㆍ전두환 퇴진’과 ‘유신잔당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위기를 느낀 신군부는 급기야 민주화운동세력과 야당 등 정적을 제거하기로 하고 광주를 그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결국 5월 학살 직후 신현확은 국무총리에서 헌법개정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유신독재에 이어 이른 바 ‘체육관 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출을 내용으로 하는 5공 헌법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80년 신군부 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신현확 전 국무총리    
1920년 경북 칠곡에서 출생해 신동이라 불렸다는 신현확은 경북고의 전신인 대구고보를 졸업하고 1943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오늘의 서울대 법대) 졸업 후 일본의 관료로 진출하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오늘의 행정고시)에 합격해 조선인 고등문관시험 합격자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동경의 상무성에서 근무한다. 해방 당시 그의 직책은 군수성 군수 관리관으로 전쟁에 한창이던 일본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부서에 그를 앉혔다는 것은 일제가 그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단적으로 말해 준다.
 
해방 후 대구대학(청구대학과 합병한 지금의 영남대) 교수로 있던 그를 정계로 부른 자는 같은 칠곡 출신으로 갑부의 아들이며 미군정 아래서 수도경찰청장으로 지낸 장택상이었다. 특히 장택상의 아버지인 장승원은 일제 당시 친일부호로 독립운동가 박상진 열사에게 살해 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이승만이 신뢰하는 장택상의 추천으로 부흥부 장관까지 승승장구하던 그는 4ㆍ19에 이어 5ㆍ16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3ㆍ15 부정선거 연루 혐의로 2년 넘게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것이 아마도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시련이자 마지막의 시련이다.
 
그 후 역시 그의 고향과 가까운 달성 출신의 김성곤(쌍용그룹 설립자)과 함께 쌍용양회 사장, 역시 김성곤이 이사장으로 있던 국민대학 이사장을 지내는 등 주로 경제분야에서 일해 오다가 1972년 유신체제와 함께 공화당 국회의원과 보건사회부 장관, 부총리까지 고속 승진을 해 나가며 10ㆍ26을 맞는다.
 
이러한 그가 80년의 봄 당시 국민적 요구와는 정반대로 유신체제를 찬양하고 나선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변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당시 김종필과 공화당 의원들 대부분이 신군부의 의해 정치규제 등의 숙청을 당하는 속에서도 신현확은 재빨리 공화당을 떠나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얼굴마담 격인 국정자문위원으로, 이번에는 삼성물산 회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강원도 원주 출신의 최규하가 대구경북 출신들이 주축이 된 신군부에 의해 심한 모욕을 당한 반면 신현확은 상대적으로 ‘TK 마피아의 대부’라는 별칭을 들으며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해 온 것으로 보인다. 
 
▲최규하와 함께 박정희 묘에 참배 중인 신현확    
 
박정희 체제에 대해 대구경북이라는 지역과 군인이라는 출신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신군부에 대구경북 출신 민간인을 연결해 주는 막후 실력자로서 신현확의 존재는 시간이 갈수록 크게 느껴졌다. 심지어 김영삼 정부를 지나 지역주의의 늪을 도저히 건너지 못하고 있던 김대중은 급기야 동진정책이라고 하여 대구경북의 정서에 감성적으로 호소하는 구애적전을 전개하면서 급기야 박정희기념관 건립이라는 무리수까지 범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 김대중은 대통령 신분으로 대구를 찾아가-더 정확히 말하면 신현확을 찾아가-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약속하는 항복선언을 하며 지역주의를 인정하고 만다.
 
몰론 김대중 정부의 동진정책은 아무런 성과 없이 민주화세력의 비난만을 초래했을 뿐이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위한, 그가 회장으로 있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는 현 정부 들어서도 정부를 상대로 기념관 건립 지원금을 내 놓으라며 소송 중에 있으니 동진정책은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신현확의 막후 역할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2004년에는 대부분 독재정권에 부역한 자칭 원로들이 모여 대한민국의 좌경화를 우려하는 시국선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더니 요즘에는 박근혜의 대선 캠프에 원로 자문 그룹으로 활동한다는 소식이 들여온다.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민족의 아픈 역사와 마주하지 않고 어느 정권에든 부역을 일삼아 온 그에게 2000년, 서울대 법대 동창회는 자랑스러운 서울 법대인상을 줌으로써 스스로 상의 권위를 깎아 내리고 말았지만 더욱 걱정스런 것은 최규하 만큼이나 80년 당시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그마저 아무런 역사의 증언과 발언도 없이 사라질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현재 정부 고위 관료인 자신의 외아들에게는 현직 공무원 중 최고의 재산가(2005년 현재 186억원 보유)라는 유산을 물려주었음에도 80년 광주의 원혼들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이 사라진다면 두고두고 후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글쓴이는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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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11/25 [11:5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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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해방 2006/12/04 [14:54] 수정 | 삭제
  • 나쁜 놈...이제는 조용히 있을 때 아니냐?? 그간의 만행으로도 지옥을 100번은 더 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