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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수의 ‘낭만’과 최연희의 ‘술버릇’
[정문순 칼럼] 체면과 권위가 강요되는 남성 문화가 허세와 방종 낳는다
 
정문순   기사입력  2006/10/23 [17:28]
인류 역사 이래로 모든 제의와 축제에서 술은 빠지는 법이 없었다. 술을 먹는다는 것은 축제의 성격이 그렇듯이 삶의 완고한 규칙과 갑갑한 관습을 벗어나도 좋음을 나타낸다.
 
그리스 신화에서 술의 신 디오니소스는, 합리적 이성의 견고한 정신을 나타내는 아폴로 신과 대조적으로 제도나 관습의 제약에서 놓여난 삶의 자유분방함과 낭만을 표상하는 존재였다.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사람들은 억압적인 삶의 규칙으로부터 벗어나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었다.
 
또 주몽 신화에서 해모수와 유화가 만나 술에 취해 결혼하지 않은 몸으로 관계를 가져 주몽을 낳듯, 비범한 영웅의 탄생처럼 삶의 범속함을 넘어선 일에 술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그러나 디오니소스도, 주몽도 없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삶의 합리적 규칙에 도전하는 낭만과 파격을 술에 기대하기는 어렵게 됐다. 술이 떠맡은 역할은 이제 아연 달라졌다. 술과 관련한 뒷말이 가장 많이 나오는 곳 중 하나는 국회의원들이 모이시는 곳이다. 이 분들은 술에 취하면 연로한 경비원에게 주먹을 휘두르기도 하고, 여성 기자를 성추행하기도 한다.
 
추행한 것도 모자라 먹지도 못하는 술을 억지로 누군가가 먹여 제 정신이 아니어서 저지른 실수이니 제 잘못은 없다고 말한다. 술이 국회의원의 탈을 쓴 성추행범에게 모욕을 당해도 좋을 만한 것은 분명 아니리라. 
 
삶의 낭만과 여유로움이 있어야 할 자리를, 방종과 타락으로 채우는 이들의 일상은 오히려 빈틈없이 경직되고 메마른 것에 억눌려 있을 가능성이 많다. 대개 일상에서 남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을 만한 근엄과, 허점을 드러내지 않도록 가식을 부려야 하는 이들이 그런 부류이다. 흐트러짐 없는 권위를 가져야 하고, 거짓을 써서라도 자신의 약점을 감추어야 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에게 요구되는 미덕이기도 하다.
 
한국 남자들은 여간해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감정의 솔직하고 자유로운 분출을 이들에게서 기대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마음이 동요해서는 안 된다. 남들 앞에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여자들의 몫일뿐 남자답지 못하다는 비난을 각오해야 한다.
 
자신을 감추어서라도 체면과 권위가 강요되는 남성 문화는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더 빈번히 나타난다. 초선 의원 시절 국회에 첫 등원하던 날 가벼운 옷차림으로 의정 단상에 선 유시민 의원을, 위엄과 권위로 주렁주렁 자신을 치장하고 있던 중진 의원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빈틈없는 절제는 한편으로는 무절제한 방탕이 허용되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다. 낮 동안 남성의 권위와 체면이 유지되려면 밤에는 그것과 정반대되는 것이 필요했다. 양복 아닌 차림조차 용인하지 못하는 '엄숙주의자들'이 국회 밖에서는 난동꾼이나 성추행범이 되기도 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회는 남자에게 하늘을 찌르는 권위 의식이 요구되는 것만큼이나 그것과 대척에 서 있는 무절제와 방종, 타락에 관해서도 여자한테는 어림없지만 남자에게만큼은 지나치게 관대하다. 술 먹고 추태 부리는 것도 남성다움에 해당하거나, 기껏해야 남자가 흔히 할 수 있는 실수쯤으로 용인된다. 성추행 의원 최연희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 떼고 국회의원 노릇을 할 수 있는 것도 남자의 타락을 사소한 술버릇으로 치부하는 세상에서나 가능하다.

몇 년 전 텔레비전을 통해 본 유럽 축구 경기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결승전에서 아깝게 패배를 당한 이탈리아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자 보는 사람이 안타까울 정도로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패배의 아픔을 속으로 삭이지 않는 그들을 보며, 경기에 져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한국 선수들이 떠올랐다. 그러다 최근 월드컵 경기에서 이천수 선수의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보자 반갑고도 감동스러웠다.

이천수의 발랄함이라면 최연희의 '기이한' 술버릇에 약이 될 수 있을까. 주위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가 남자에게도 허용되어야 허세와 방종을 오가는 그들의 비정상적인 심리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 본문은 '양산의 새로운 지역 신문 <양산뉴스>'(http://www.ysnews.co.kr) 2006년 10월 20일자에도 실렸습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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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10/23 [17:2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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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친이반 2006/10/25 [17:15] 수정 | 삭제
  • 한국여자들은 울면서 어떻게 울지를 배운다.
    남자들은 그렇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