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민의 한국현대사OST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박찬종, 정몽준. 그 다음 자리에는 고건
[김수민의 호모폴리티쿠스] 얼떨리우스의 계보, 고건이 낄 자리는 없다
 
숨인씨   기사입력  2006/10/04 [19:18]
박찬종: '무균질 우유' 아닌 '유산균 없는 요구르트'
 
2002년 대선,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95만표를 얻으며 4퍼센트에 못 미치는 득표율을 올렸다. 노무현과 이회창이라는 두 거대축의 틈바구니에서 티비 토론의 활약을 통해 얻어낸 적지 않은 표이지만, 1987년 개헌 이래 3위 득표자 가운데 가장 낮은 득표율이다. 민주노동당을 떠받치며 '배타적 지지'를 명토 박은 민주노총, 전농의 표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한 셈이다.
 
이에 반해, 1992년 대선에 출마한 신정당 박찬종 후보는 150만표 이상을 얻으며 6퍼센트대의 득표율을 확보했다. 신정당은 사실상 박찬종이라는 브랜드에 기대 있었으므로 그는 무소속 후보나 다름 없었으며, 당시 선거는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의 불꽃튀는 2강 1중 구도로 진행 중이었다. 더구나 박찬종에게는 지역적 기반은 물론 열해 뒤의 권영길 후보와 민주노동당과 달리 계층계급적 토대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 개인의 이미지가 민중 후보 백기완의 여섯 배가 넘는 표를 끌어모았던 것이다.
 
박찬종이 부여쥔 150만표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양김정치에 신물을 느끼고 정주영에게서도 대안을 발견하지 못한 유권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투표일 낮잠을 자거나 산행에 나설 확률이 높은 유권자들이다. 그 유권자들의 성향은? 진정으로 개혁적이었다면 김대중이나 백기완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보수적이라고 못박을 수도 없다. 그들은 정치개혁을 원하지만 곧잘 정치에 넌더리를 내고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정치에 대한 환멸이 정치개혁의 열기를 고양하고 기대가 시들면 환멸이 악화되어버리는 한국정치의 사이클을 감안했을 때, 이들은 1987년 체제에서 모종의 캐스팅 보트를 쥔 주인공들이다. 그러나 이념적 근거가 없이 막연한 변화를 추구하며 언론과 대세에 휘둘린다는 점에서, 그들은 가장 허약한 시민들이었다. 
 
이 한국정치의 잉여들을 꿰어차기까지 박찬종은 7, 80년대 내내 부침을 겪었다. 그러나 그 부침으로 얻은 득은 실보다 컸다. 그의 길이 과감한 도전이라기보다는 안정적인 투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박찬종은 사법고시, 행정고시, 공인회계사 시험에 모두 합격하여, 한때 각종 수험생들에게 경외를 받은 적이 있는 수재다. 그는 3공화국시대 7년동안 검사로 일했고, 1971년에 변호사로 개업했다. 유신헌법이 발포되자 그는 "국민적 결단"이라고 찬양하며 정치에 입문하였고, 중대선거구제로 변경되어 치러진 제9대 총선거에서 김영삼과 동반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가 사망하자 소장파로서 이른바 공화당 정풍운동에 나섰고 급기야 '부끄러운 이야기' 운운하며 과거의 행적을 반성하였다. 인권변호사로 데뷔한 것도 이즈음이다. 1980년대 광주학살의 원흉 미국을 규탄하는 대학생들이 연이어 문화원 등을 점거하고 재판정에 설 때 그는 길거리와 변호인석에 나타났고, 명성을 얻어 민추협 간부직을 맡기도 했다. 이미 그무렵부터 언론플레이와 쇼맨쉽에 능하다는 정평을 얻은 그는 1987년 대선 정국에서 양김의 후보단일화를 촉구하며 삭발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박정희 정권 시절 출세가도를 달린 그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힐 리 없었고,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반정부 투사'였으니 군사독재의 잔당에 묶이지 않아도 되었다. 박찬종은 민자당, 민주당, 국민당을 멀리 하며 부패하고 추레한 정치판에서 단연 돋보이는 '단기필마'였다. 김대중, 정주영이 떠나자 박찬종은 이기택, 김종필을 제치고 차기 대통령감 수위로 올라섰다. 1995년 서울시장선거에서 조순에게 밀려 낙선하지만 대선가도에서의 패배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총선 직전의 한 시사주간지의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 1위의 자리를 굳힌다(2위는 김대중, 3위는 이회창).
 
하지만 박찬종은 결정적인 것을 잊고 있었다. SBS 드라마 <독신천하>에서 유선이 이야기했듯 비주얼과 이미지는 다르다. 얼마 전 강금실이 예리하게 포착한 대로 '이미지 정치도 일종의 발전'인데, 그것은 이미지가 컨텐츠와 무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박찬종은 탈정치 혹은 반정치적 정서로 인기를 누린 정치인이다. 그는 반사이득을 날려 보냈던 태풍의 눈으로 들어가는 순간, 어제까지 해왔던 행보를 청산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이회창이 '반민주적 정당에 미래 없다'며 김영삼과 각을 세우는 동안, 박찬종은 원내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그는 철새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신한국당 전국구 명단 21번을 택했고 덕분에 낙선했다) 세월을 허비했다.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린 그는 합종연횡에도 대중적 지지 획득에도 실패함으로써 경선을 완주하지도 못했고, 급기야 경선불복자인 이인제를 따라 탈당하였다. 
 
김대중 정권 내내 뒷골목에 주저 앉았던 그는 '독도 문제'를 빌미로 다시 길거리로 나오기도 했고, 2002년 대선에서는 예전에 후려친 이회창의 뒤통수를 어루만진 탓에 또 한번 세간의 비웃음을 샀다. 강호동을 '씨름판 천하장사'로 기억하는 사람이 아마 박찬종이 '무균질 우유' 광고에 출연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정몽준: 여론조사와 후보단일화론으로 뜨고, 지다
 
1992년 박찬종이라는 얼떨리우스를 키워낸 일군의 대중은 1997년 이인제를 거쳐 김대중 정권기에 한동안 방황을 겪는다. 박찬종과 이인제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다음에야말로 이회창이라는 여론이 팽배해 있었다. <한겨레21>이 두차례 실시한 '호감가는 정치인'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이 1위를 차지했으나 그에게 스타 자리가 돌아간 것은 한참 나중의 일이다(이 과정은 노무현의 집권에 어마어마한 선영향을 끼쳤다).
 
그런 상황에서 정몽준은 2002년에 가서야 신드롬을 일으킨 것이 이상할 정도로 유력한 카드였다. 그의 부상이 늦은 연유는 간단하다. 정치판에서 탈정치적 행보를 걸은 박찬종과는 달리, 정몽준은 정치권 바깥에서 매우 정치적으로 처신했다. 그래서 정몽준이 박찬종보다는 한수 위인 것이다. 김영삼 정부가 파산하면서부터 '경제'와 '통일' 양면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재부상한 아버지의 유산, 아버지나 형들과는 판이한 준수한 외모, 월드컵축구대회 유치라는 업적, 불안하지 않지만 왠지 개혁적인 듯한, 따라서 어느 당으로 가건 혹은 당적이 없건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은 이미지. 민주당 국민경선이 일각의 주장대로 7월에 열렸다면(김근태는 드러내놓고 월드컵 축구도 중요한 변수라고 말했다) 그가 이인제, 노무현과의 접전을 뚫고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몽준은 질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후보단일화 승부의 신호탄이 울릴 때 그는 패배자였다.
 
경선이 4월에 열렸더라도 월드컵축구대회가 그에 앞서 열렸다면 정몽준이 유리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해, 정몽준에게는 일단 시운이 따르지 않았다. 정치인에게 시운이 중요한 까닭은 핵심 지지층을 형성하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갑자기 솟구쳐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고 여긴다면 큰 착각이다. 2000년 총선 패배로 동정표를 얻은 것을 티핑 포인트로 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선거는 반을 점하는 자에게 승리를 안겨다주지만, 그것이 힘들다면 33은 갖고 있어야 한다. 33이 힘들다면 17이라도 갖고 있어야 하고, 17이 힘들면 9이라도 가져야 한다. 단, 그 핵심은 매우 튼튼해야 한다.
 
여론조사에서 정몽준에게 1위를 안겨다준 시민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대충 이전에 노무현을 지지한 사람과 이회창을 지지한 사람이 2:1의 비율을 이룬다. 정몽준에게 합리적인 선택은 가능한 짙은 개혁색으로 전자에게 확실하게 호소하는 것이었다. 지역주의 타파나 수구언론에 대한 대항이라는 측면에서 노무현을 능가할 수는 없었겠지만, '2세대 기업인'이라는 자산과 애국주의의 기운을 활용하는 가운데, 매우 어정쩡한 수준이겠지만 '개혁'과 '부패청산', 그리고 '녹색'을 전면에 내거는 길은 트여 있었다. 정몽준은 하지만 'CEO형 대통령'을 기대하는 국민들의 바람에 부응하지 못하는 '의외의 난조'를 드러냈다. 또 그 자신이 3강구도의 수혜자이면서도 이이제이가 아닌 후보단일화에 목을 매었다. 게다가 그 후보단일화론에는 노무현과도 할 수 있고 이회창과도 할 수 있다는 노골적인 정략이 담겨져 있었다.
 
처음부터 정풍은 60퍼센트까지 치닫던 노풍에 비해 파괴력이 약했다. 그가 티비 토론에 등장하자마자 지지율은 하락세에 들어섰고 곧 이회창에게 선두 자리를 넘겨주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정신병력이나 폭력적 사생활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그 일부가 <중앙일보>에 공개되면서 보수적 유권자들에게 그는 '노무현과 다르지 않은 불안한 정치인'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기왕 그렇게 된 이상, 그는 영남보다 호남에, 노년층보다 청년층에, 수구보다 개혁에 호소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노무현은 빨리 양보해라. 내가 이회창을 깨겠다'는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15퍼센트라는 마지노선 앞에서 악전고투하던 노무현이 지지율 20퍼센트를 돌파하고 본선을 목전에 둔 시점에 후보단일화를 선언했을 때, 게임은 끝이 나 있었다. 민주당과 국민통합21의 당원이 각각 반을 차지하는 국민경선인단을 꾸리자던 정몽준은 단일화 방법에 관한 협상에서도 늘 수세적이었다. 오른편에서부터 그는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다시 이회창으로("정몽준은 결국 김대중 편이 되려고 한다"), 아니면 무응답층으로("노무현이고 정몽준이고 결국 그놈이 그놈") 돌아가는 지지자들이 늘었다. 곧이어 왼편이 흔들렸다. 당선가능성에서 정몽준에 무게를 두었지만 노무현의 노선에 더 호감을 느낀 사람들에게 후보단일화 게임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누가 되어도 이회창을 이긴다"는 확신이 선 마당에 그들은 솔직해졌다. 거기다 민주당 안팍의 파상공세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은 노무현에게 대중이 보내는 경탄도 섞여 들었다. 어떤 이들은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았던 김대중의 환영을 보았을 테고, 또 어떤 이들는 김윤환, 박철언 등의 쪼다들과는 격이 다른 '열정과 의리의 경상도 싸나이'를 발견했을 것이다. 후보단일화에 반대한 노무현 지지자들도 '플레이 오프' 게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정몽준은 스스로에게 결정타를 먹였다. 다급해진 그는 뒤늦게서야 도전적인 토론 자세를 보였다. 다음날 여론조사는 정몽준 쪽이 토론을 더 잘했다, 는 데 무게를 두었지만 그것이 화근이었다. 챔피언 벨트를 차고 있던 쪽이 노무현이라는 암시가 된 것이다. 후보단일화 여론조사는 노무현의 신승으로 끝났다. 하지만 재미있는 게임에 뛰어든 한나라당 성향의 지지자나(역선택 방지조항에 의해 1번 항목에서 이회창을 선택한 유권자는 단일화후보를 결정하는 게임에 뛰어들지 못했지만, 이회창과 정몽준 사이에 있던 유권자들이 거름막을 뚫었다는 증거가 있다. 후보단일화에 사용된 두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의 지지율은 불과 30퍼센트 내외였다) 정치적 무관심층의 참여에 비추어 보았을 때, 질적으로 노무현의 압승이었고 그나마 정몽준이 그만큼 추격한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향후 고건을 고전케 할 원리는 이때도 적용되었다. 휘슬이 울리면 관객은 재미를 추구한다. 그런데 "이회창vs정몽준'은 '이회창vs.노무현'만큼 재미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건은 유권자들과의 숨바꼭질에 실패
 
고건의 고전을 전망하기 위해 박찬종, 정몽준을 거쳐 먼길을 돌아왔다. 쓸데없이 이야기를 늘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맞는 말을 해도 웃기는 경우가 있다. 뒤집어 말하면, 아무리 웃기는 자가 발설한 이야기일지라도 진실을 담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가 출범하기 전 박찬종은 고건 당시 총리 지명자에 대한 국회 인준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재한 '한나라당 당원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고건을 '4무(無)- 무소신, 무작위, 무치, 무책임의 인물' '처세의 달인'으로 지목했다. 그 자신에게 돌려줘도 훌륭한 발언이라는 점에서 박찬종의 모습이 웃겨 보였지만 박찬종의 고건 평가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고건 총리'라는 카드는 참여정부 지지층에서도 문제가 된 바 있다. 그때 유시민 당시 개혁당 대표는 "고건은 봄에 한 일 여름, 가을, 겨울에 하는 사람"이라며 행정기술자로서의 그를 무덤덤히 바라보자는 식의 입장을 여론에 제출했었다. 유시민의 의도에 아랑곳 없이 재해석하자면 고건은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고건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우선 총리 시절에는 한나라당의 부패 행각을 단호하게 비판했을 것이다. 아울러 노무현 정부 초기의 아마추얼리즘을 따끔하게 지적했을 것이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마치고 쓸데없이 대통령과 마찰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이고, 가장 먼저 '사회적 대타협 모델'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미적거리지도 걸리적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철저히 정치적인 행보를 겪거나 반대로 아예 은둔에 들어갔을 것이다.
 
고건이 이기는 길은 열린우리당의 일부와 민주당, 그리고 한나라당에서 뛰쳐나온 자들과 손잡고 '신보수 범국민신당'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지율 감소를 각오하고 맨 먼저 마인드 업을 시도해야 하나, 그는 여전히 '스토브 리그'를 벗어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열린우리당의 내분은 한나라당의 상승을 계기로 역설적으로 분당을 막고 있으며, '오픈 프라이머리'는 이 흐름의 응집물이다.
 
어떤 면에서 고건은 정몽준보다 더 불리하다. 대통령선거를 1년 이상 앞둔 현재 지지율이 꾸준히 빠져 나가고 있으며 그를 도와줄 만한 거대한 정치적 이벤트도 없을 것 같다. 그가 핵심지지층을 형성해 대선 직전 열린우리당 후보를 꺾고 반(反)한나라 후보로 옹립될 가망도 별로 없다.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확률은 더 없다. 물론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2007년 대선 전후의 주요 낙오자들을 모아 내각제 또는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추진하는 것이다. 다들 한꺼번에 사라질 위험부담이 있기는 하지만.
 
2004년 고건이 독주를 시작할 때, 나는 유권자들이 벌일 숨바꼭질을 감지했다. 정동영, 김근태로는 역부족임을 간파한 쪽과 '차떼기당'을 한번 더 찍는 게 부끄럽다는 쪽, 그리고 정치에 관심 없지만 심심하게 무응답하지 않겠다는 쪽이 결집한 것이다. 이제 고건의 머리카락 찾기는 어느덧 한계에 달했다. 그 사이 몇몇 술래들이 전봇대를 향해 뛰어나가고 있다. 내년 대선은 그들의 싸움이다. 고건이 낄 자리는 없다. 
* 글쓴이는 경북 구미시 시의회 의원(무소속)입니다.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영남지역 최연소(27세) 기초의원에 당선돼 현재 시의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2002년 <대자보> 필진으로 참여한 이래 다년간 정치칼럼 등을 연재해 왔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대자보> 독자들과 만납니다.
기초의원으로서 풀뿌리 정치 현장에서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블로그 : http://kimsoomin.tistory.com/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6/10/04 [19:18]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