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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판 '광주학살', 군부의 '8888 민중항쟁' 진압
[버마 난민촌을 가다 2] 해방 뒤 어수선한 정국 틈타 군부쿠데타
 
최방식   기사입력  2006/09/29 [11:24]
버마 난민들이 모여 사는 태국 국경지대.
[연재를 시작하며]
기자는 지난 7월 16일부터 일주일간 태국과 버마 국경지대를 다녀왔다. 군부정권의 폭정을 피해 40여만명의 버마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양국 사람들이 그냥 뒤섞여 사는 여느 국경 도시와는 처지가 사뭇 다르다.


특히 9개 정글 속 캠프에 모여 사는 30여만명의 버마인들은 수용소 포로와 같은 삶을 강요받고 있다. 버마에서 민주화운동을 했거나 소수인종이라는 이유로 폭정을 피해 국경을 넘었건만 태국정부마저 이들을 범죄인 취급하며 정글 속에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어서 그렇다.

48년 독립과 소수인종 탄압, 45년여의 군부독재, '버마의 5&18'이랄 수 있는 '8888민중항쟁'과 정글 속 학생들의 무장투쟁, 90년 총선과 10년 넘게 거듭되는 아웅산 수지여사의 가택연금 및 세계 속의 NLD, 그리고 버마인들의 오랜 침묵과 저항을 이 번 기행을 통해 다뤄보려 한다. /편집자
 
군부독재 27년, 전국적 민주화운동 분출
 
태국의 북서쪽에 자리한 벵갈만 연안의 나라 버마. 국토 크기는 남한의 7배쯤 되지만 인구는 우리와 비슷하다. 48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떨쳤으니 독립한 때도 우리와 유사하다. 하지만 1인당 GDP는 180달러(2003년 기준). 고작 우리의 1/70에 불과하다. 어떤 연유로 버마인들은 이런 빈곤에 시달릴까 궁금하기만 하다. 세계인들은 왜 버마를 독재국가라 할까? 민주인사들은 왜 해외로 도피해야 했을까? 태국에 왜 그리 많은 난민들이 있을까?

식민지 해방의 기쁨도 잠시.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 움직임, 일상화한 좌우 대결과 폭력, 그리고 집권한 독립운동가 출신 엘리트집단 내의 분열 등으로 버마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틈을 타 네 윈(지금은 사망)이 이끄는 군부가 자칭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걸고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했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이듬해였다.

아시아에서 민주화운동이 활화산처럼 분출되던 80년대 후반. 버마에서도 1988년 8월 항쟁이 불타올랐다. 물론 20여 년간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시위와 운동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군부의 폭력과 회유라는 2중 정책으로 민주화를 위한 저항의지가 조직적으로 결집되지는 않았다.
 
▲치앙마이에서 승용차로 4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메사량의 한 민가. 파파야와 바나나로 둘러싸인 이 집에서 첫날 밤을 묶었다.     © 최방식

전국적 규모의 88년 항쟁에 네윈 정권은 휘청거렸다. 소마웅이 친위쿠데타를 일으켰고, 무력 진압이 시작됐다. 8월 8일, 양곤에서 10만명이 거리시위를 벌였는데 총과 탱크로 진압했다. 최소 200여명이 사망했다. 9월 14일에는 100만명이 거리로 나왔으나 탱크로 깔아뭉갰다.

버마인들은 이 투쟁을 '8888 민중항쟁'으로 기억하고 있다. 80년 광주항쟁과 비교되곤 한다. 'NLD한국지부' 한 조직원에 따르면, 당시 4천여명 사망소식이 돌았다고 한다. 수천명이 감옥에 갇혔다. 1500여명은 지금도 수감 중이다. 일부는 정글로 숨어들어 무장투쟁을 벌였고, 다른 일부는 태국국경을 넘었다. 이들이 세계 각지로 흩어진 NLD-LA(민족민주동맹 자유지역, 버마 내부 조직은 그냥 NLD로 부름) 조직원들이다.
 
2차 쿠데타로 수천명 반정부 시위자 살해
 
소마웅 군부는 새 통치기구로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를 세우고, 피의 학살에 따른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2년 뒤 총선을 통해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1990년 총선이 실시됐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유권자들은 아웅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NLD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전체 의석의 81%를 차지했다.

하지만 군부정권은 약속을 어겼다. 선거 결과를 무시하고 아웅산 수지를 가택에 연금시켰다. NLD 지도부를 포함해 2천명의 민주인사를 체포&투옥했다. 수지 여사는 이듬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군부는 그를 지금까지 가택에 가둬놓고 있다. 친위쿠데타의 2인자인 탄 쉐(74)가 92년 소마웅으로부터 실권을 넘겨받았다. 97년 국가통치 기구 명칭도 '국가평화발전협의회'(SPDC)로 재편했다. 그리고 탄쉐 군사독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메사량 외곽 한적한 곳에 자리한 ABSDF 본부 사무실 앞마당 호수에 영롱하게 피어오른 연꽃.     © 최방식
태국 땅이다. 방콕을 거쳐 북부 정글 중심도시인 치양마이에 도착했다. 착륙 전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치앙마이는 녹색도시였다. 열대림 속에 자리한 도시는 정말 한적했고 아름답기만 하다. 작은 마을마다 중심부에는 곱게 단장한 사원이 자리하고 있고, 주변으로 전통 가옥들이 들어서 있다.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는데 벌써부터 열기가 전해져 온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 데 공항 관리가 뜬금없이 "어디에 묵을 거냐"고 묻는다. "어디에 짐을 풀든 무슨 상관이람." 중얼거리다 말고 행여 심사가 지연될까봐 "호텔 어디든" 한마디 하니 "됐다"고 가란다. 듣고 있던 종순 형이 "저 것들 왠지 부패한 냄새가 난다"고 귀엣말로 거든다.
 
푸른왕국 태국 치앙마이 정글 속으로...
 
공항로비로 나오니 태국인 한명이 우리를 맞는다. 버마 민족민주동맹자유지역(NLD-LA) 한국지부가 우리의 방문소식을 알렸고, 버마학생군민주전선(ABSDF) 본부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그 치가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 대화가 잘 안 된다. 결국 전화를 연결해 NLD-LA 본부 요원 한 명하고 통화를 한 다음에야 안내원의 차에 동승했다.

처음에는 어디로 향하는 지, 그리고 왜 그곳으로 가는지 조차 몰랐다. 다시 전화를 연결해 알고 보니 ABSDF 본부가 있는 치앙마이 서북쪽으로 200km에 자리한 메사량(Mae Sariang)으로 간단다. 이 도시는 버마와 태국 북서부 국경지대에 있는 작은 타운. 버마 난민촌 중 한 곳인 멜로웅 캠프를 우리가 방문키로 돼 있어 100km 인근에 있는 이곳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치앙마이에서 4시간여를 달렸다. 북부 정글지대이다 보니 열대림 숲 속을 이리 저리 오갔다. 저녁 9시가 돼서야 메사량에 있는 한 민가에 도착했다. ABSDF 본부였다. 이 조직의 재정담당 간부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이름이 '라 한'이란다. 우리 여행의 일정을 모두 점검하고 추진하는 책임자였다.

ABSDF 본부는 메사량의 외곽지역 한적한 숲 속에 자리하고 있다. 밤이라 자동차 불빛으로만 풍경이 보이는데 널찍한 농장으로 보였고 한적한 저택을 파파야(야자수 나무)와 바나나 수종이 둘러싸고 있다. 우리가 머물 방은 본관 2층이었다. 이 곳 가옥 구조를 보면 대부분 1층은 거실이나 창고, 부엌으로 사용하고 2층을 침실로 사용한다. 열대지역이라 시원하고 벌레도 피할 수 있어서 그런 것으로 보였다. 온한대 지역의 집들과는 구조가 사뭇 달랐다.
 
열대림 숲 속 4시간여 달려 도착한 메사량
 
너무 배가 고파 2층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라 한에게 저녁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어디 밥 사먹을 식당 없냐"고 물으니 가능하다고 한다. 작은 타운인데도 도심으로 가니 이곳저곳 불을 환하게 밝힌 식당과 주점이 꽤 보인다. 그 중 가장 커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서니 손님이 여럿이다. 외국인도 몇 보인다.

태국에서 첫 식사였다. 태국어와 영어로 병기된 메뉴를 봐도 뭘 주문해야 할지 모르겠다. 과거 외국에서 생활할 때 베트남이나 중국 식당에서 음식을 선택했던 기억을 더듬어 주문을 하고 맥주도 서넛 시켰다. 가장 무난하게 돼지고기를 얹은 볶음밥을 택했다. 어디서나 그렇지만 향료가 문제여서 안전한 선택을 한 것이었다. 날아다니는 안남미 쌀밥을 생각했는데 떡 진 우리 밥 정도 되는 음식이 나왔다. 멋도 모르고 다행이라 여겼다. <다음호 계속>

/최방식(국제전문기자, 본지 편집위원) sbchoice@yahoo.com
*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인터넷저널> (www.injournal.net) 편집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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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9/29 [11:2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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