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침 일찍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가기 위해 군복을 꺼내 입었다. 뱃살이 많이 불었음에도 그럭저럭 바지는 입을만 해서 다행이었지만, 상의가 꽉 끼는 것이 불편해서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러다가 문득 군복에는 명찰이 달려있다는 사실, 그래서 나를 보는 모든 사람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별로 새삼스러울 것 없는 사실을 깨닫고는 기분이 나빠졌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명찰을 달아본 사람이라면, 학교 교문을 나서는 순간 명찰부터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면서 거의 기계적으로 명찰을 감추는 것은 이름이 촌스러워서도, 명찰을 달고 있는 것이 거추장스러워서도 아니고, 단지 내 이름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본다는 것,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
사진출처: 한겨레
| | 지난 3월, 정보통신부는 인터넷 게시판에 실명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히고, 공공기관 홈페이지에 우선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인터넷 실명제는 모든 국민의 가슴에 명찰을 달겠다는 정책이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 탄 모든 사람들이 국가의 인증을 거쳐 "000000-0000000" "홍길동" 이렇게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이 적힌 명찰을 달아야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한 번 상상해 보라. 정보통신부는 지금 그렇게 말도 안돼는 정책을 인터넷에서 추진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인터넷 실명제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표현의 자유와 익명의 권리를 침해하는 정책이다. 물론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타인의 인권침해 범죄를 막기 위해서는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대다수의 선량한 국민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인터넷 실명제와 같은 규제이어서는 안 된다. 실명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과연 인터넷 게시판을 혼탁하게 하는 일부 네티즌에게 책임을 묻기 위하여 모든 네티즌들의 기본권을 박탈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게시판 상에서 누군가가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면, 그 당사자에 책임을 물으면 되는 것이고, 그것은 현행법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인터넷 게시판 실명제는 원칙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고, 그 정책을 시행했을 때 거둘 수 있는 효과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된다.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면서까지 시행하려고 하는 정책이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 없다면, 당연히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정보통신부가 추진하려고 하는 실명제의 방식은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입력해 실명 인증을 받고 게시판에 글을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터넷에는 주민등록번호 자동 생성기가 돌아다니고, 붕어빵 봉지에 수 만 명의 주민등록번호가 인쇄되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터넷 실명제가 사이버 상의 범죄를 해결할 수 없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관련기사]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인터넷 내용등급제 소동정보통신부의 인터넷 실명제에 반대한다고 해서 인터넷의 모든 게시판을 익명으로 운영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실명이 필요한 곳에서는 자체적으로 실명제를 하면 되고, 익명성을 지켜야 하는 곳에서는 익명으로 운영하면 된다. 인터넷 공간은 지금도 그렇게 조화로운 방식으로 잘 운영되고 있다. 물론 문제점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국가의 획일적 검열과 규제가 얼마나 많은 부작용을 낳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 본문은 본지와 기사제휴 협약을 맺은 문화연대에서 발행한 주간문화정책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culture.jinbo.net/ 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필자는 함께하는시민행동 정보인권국 이호준 활동가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