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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를 삼킨 영혼 - 안데르센의 절규
[두부독감14] 안데르센 동화의 가면 벗기기
 
두부   기사입력  2003/05/27 [13:13]
엽기적인 성냥팔이 소녀

▲성냥팔이 소녀 삽화     ©대자보
12월 31일, 춥고 어두운 거리를 헤매고 있는 소녀는 맨발이다. 소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세밑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는 것 같다. 하루종일 성냥을 팔지 못했던 소녀는 아버지에게 들을 꾸지람을 걱정하고 있다. 소녀는 부잣집 앞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불을 붙인다. 추위를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해서다. 그러나 불이 붙은 트리는 삽시간에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집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진화에 나서지만, 헛수고가 된다. 소녀는 '성냥 사세요'라는 말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불이 나자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신기할 뿐이다.

다음 소녀는 자신의 집 앞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 집이 좋겠어. 불쌍한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아버지도 외로우실 거야. 성냥불로 달래드려야지." 불이 붙은 소녀의 집은 활활 타오른다. 집안에는 아버지 혼자 있다. "어머, 누가 죽어가고 있나봐. 누가 죽었을까?" 조금은 가증스럽게 소녀는 되뇌인다. 그때 희미하게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소녀는 할머니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 "할머니, 절 데려가 주세요!" 불타고 있는 집안으로 소녀는 천천히 들어간다. 다음날 잿더미로 변한 집에서 아버지와 딸이 불타 죽은 채 발견되었다.

▲안데르센 초상화     ©대자보
안데르센의 원작 <성냥팔이 소녀>의 결말은 위와 다르다. 크리스마스 트리와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기는커녕 소녀는 죽지 않고 할머니와 함께 하늘나라로 승천(?)한다. 저자는 단호하게 성냥팔이 소녀를 "죽음의 환상에 빠져 불을 지른 소녀"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안데르센은 자신의 현실을 숨기고 소녀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사실 안데르센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인물이었다. (사실 우리는 안데르센이라는 인물보다는 안데르센 동화에 익숙해 그를 모를지도 모른다.) 그가 그려내는 동화는 인간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는 것과 감동적인 이야기, 유머러스한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그의 삶은 녹녹지 않았을 뿐더러 신산하기까지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정신병으로 사망했고,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또한 그는 인생의 동반자를 찾지 못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또한 그는 외아들이었다). 그가 보낸 사랑은 가혹하게 외면당했다. 더군다나 그는 "덴마크의 오랑우탄"이라 불린 정도로 추남이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판단해보건대 안데르센 동화는 안데르센과는 다른 궤적을 그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화 위에 삶을 살짝 올려놓은 것인지 삶 위에 동화를 올려놓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모델은 자신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어릴적 돈을 벌어 오라는 부모의 명령을 들어야 했으며, 그때마다 그녀는 다리 밑에서 울었다고 한다. 저자의 상상대로라면 성냥팔이 소녀가 선택한 죽음은 도저히 벗어나기 힘든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안데르센의 절규』(안나 이즈미, 좋은책만들기)는 안데르센 동화의 가면 벗기기다.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와 그 뒤편에 숨어 있는 안데르센의 '삶'을 겹쳐놓는다. 그는 저주받은 영혼의 소유자였으며,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현실과 타협할 수도 타협하지도 않았던 요정 나라의 왕자, 안데르센. 그는 어린이를 위한 것도 어른을 위한 것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려고 동화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안데르센의 공주들 : 인어공주, 엄지공주, 얼음공주

▲ 디지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중 한장면
안데르센의 동화에 살인, 폭력, 자살, 변태, 근친상간, 강간, 불륜, 질투, 배신, 복수, 사기, 이기주의, 스토킹, 사체유기 등이 숨어 있다고 한다면 믿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인어공주가 바닷속에 칼을 버리고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을까? 그러나 저자는 모든 것을 잃은 인어공주가 칼로 왕자와 신부에게 복수를 했을 거라고 말한다. 그것이 "포장되지 않은 안데르센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안데르센은 사랑했던 루이제에게 일방적인 러브레터를 보내지만 다른 남자에게 그녀를 빼앗기고 만다. 그 후 두 번이나 똑같은 일을 경험했다. 그렇기 때문에 안데르센은 여자에 대한 욕망을 감추지 못하고 여자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저자는 인어공주를 "채워지지 않는 성(性)의 목마름"이라고 명명한다. 안데르센은 <인어공주>를 집필하는 동안 수많은 눈물을 흘리며 정성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의 상처 치유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더군다나 그는 그러한 상처를 치유할 방편으로 평생 동안 스물아홉 차례나 외국 여행을 했다.

<장미요정>에서도 오빠는 여동생을 차지하기 위해(근친상간) 여동생의 남자 친구를 죽이고 여동생까지 죽인다. 자신의 사랑을 끝까지 관철시키고자 했던 안데르센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다. 남자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었던 엄지공주, 루디라는 청년을 갖기 위해 악착스럽게 따라다녔던 얼음공주 등은 안데르센이 거부당한 사랑을 보상받기 위해 그려낸 인물들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러한 인물들의 말로는 <빨간 구두>에서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빨간 구두를 광적(狂的)으로 좋아한 카렌은 자신의 발이 잘려질 때까지 그 구두를 벗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그녀가 죽자 아무도 따라 오지 않았지만, 빨간 구두만이 그녀의 관을 뒤쫓았다. 이후에도 빨간 구두는 그녀의 무덤 앞에서 계속해서 춤을 추었다. 안데르센에게 창작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비아그라였다.

일그러진 안데르센의 영혼

세상에 원한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실은 언제나 불만족스럽다. 이야기꾼 안데르센은 그러한 현실의 모순을 감추고 완벽하게 아름다운 동화나라를 만들어냈다. 그 동화나라는 아름다운 요정이 살고, 휴머니즘이 넘쳐나는 곳이다. 그러나 동화나라처럼 현실은 '정론(定論)'에 충실하지 않는다. 악인이 승리하는 것은 현실에서 왕왕 일어난다. <키다리와 작다리>를 보자. 키다리는 우둔하고 작다리는 약삭 빠른 사람이다. 매번 키다리는 작다리의 계략에 속아넘어가고 소해만 본다. 결국에 키다리는 자루에 담겨져 강의 물고기 밥이 되고 만다. "바보는 죽어야 낫는다잖아!" 작다리가 하는 최후의 충고다. '억지 춘향이'식으로 분류하자면 키다리는 약자인 안데르센, 작다리는 안데르센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강자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강자이자 악인인 현실 앞에서 안데르센이 선택한 것은 역시 '죽음'이었다.

그의 약자 콤플렉스는 <외다리 장난감 병정>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 작품은 장난감 병정이 아이들에게 버림을 받아 난로에 던져지지만, 사랑하는 무희와 함께 불타 죽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저자는 이 작품을 비튼다. 외다리 장난감 병정은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다리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태생적 불만과 성장 배경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아름다운 무희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주위의 비난과 따돌림을 받아야 했다. 외다리 장난감 병정에게는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저자가 제시하는 결말은 외다리 장난감 병정의 복수로 끝난다. 난로에 넣어진 그는 불이 붙은 무희를 밖으로 밀쳐내면서 온 집안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고 아이들까지 죽게 만든다. 저자는 간단명료하게 <외다리 장난감 병정>을 "열등감이 빚어낸 복수극"이라고 명명한다.

안데르센의 동화는 완미(完美)하다. 200여년 동안 세계의 모든 아이들과 함께 한 동화는 이후에도 아이들을 키워낼 것이다. 그러나 안데르센의 얄궂은 삶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의 저주받은 영혼은 어느 것도 위로해 주지 못했다. 창작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어쩌면 안데르센은 <미운 오리새끼>의 미운 오리새끼처럼 처음에는 다른 형제들에게 '왕따'를 당하지만, 결국에는 아름다운 백조로 변하길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미운오리 새끼와 안데르센이 겹쳐지는 이유다. 그러나 미운오리 새끼와 안데르센이 다른 점이 있다. 그는 '백조'가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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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5/27 [13:1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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