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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의 수구적 진로수정은 실수인가 철학인가
조중동과의 '코드맞추기'는 지지층의 이탈과 불행의 덫
 
이경렬   기사입력  2003/05/23 [10:44]
노 대통령은 지금 5년 정권 로드맵의 어떤 위치에 서있는지 먼저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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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시름에 잠겨있는 노무현 대통령
요즘 조선일보의 환호를 보세요. 각하니, 편집국 초청이니, 국가 질서 회복이니 하며 노 대통령의 수구적 행태를 엄호하며,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양 은근한 노비어천가로 고무하고 박수를 쳐대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저런 짐짓 속보이는 짓을 하고 있을까요? 노대통령이 정말 장하고 이뻐서요?

아닐겁니다. 노 대통령을 길들이고 있는 겁니다. 프로파겐다입니다. 그들 신문의 독자에게 노 대통령의 혁명적일 만치 변모된 정체성을, 나발불며 선전해대는 겁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수구적 발언이 나오는 것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그 사실들이 노 대통령의 정체성의 근본적 변신이라며 딱지(Labeling)를 붙여주는, 희화적이지만 겉으로는 엄숙하기만 한 제의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혹여 장래에 노 대통령이 그의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 갈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미리 강력하게 차단하려는 그 야비한 술수 말입니다. 그들의 올가미 씌우기 방법입니다.

노 대통령이 만약 개혁지향적인 정책을 시행하려는 경우가 발생했다고 칩시다. 조중동으로선 또 한번의 놓칠 수 없는 호기가 됩니다. 노 대통령이 이미 잘못 계산하고 들여놓은 조중동과의 자연스런 '코드 맞추기' 회합이 이번엔 그를 윽박지를 수 있는 자료로서 조중동에겐 훌륭히 이용되고 말 것입니다. 변신의 귀재 어쩌구 하는 천박한 어휘를 다 동원하여 그의 노선 회귀를 또 한번의 용서받지 못 할 변절로서 규정하고 그를 수구의 이익에 부역하는 정권으로 기필코 잡아놓으려, 정책 결정의 고비고비 마다 딴지를 걸며 괴롭혀 댈 것입니다.

보십시오.
바로 여기가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 자신이 불러들인 함정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자못 필요했을 정책수행의 수구화로의 편향은 나중에 조중동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드는 악수로 돌아오고 맙니다. 더욱 더 노골적으로 우편향을 요구하는 조중동의 간섭과 협박을 노 정부가 버텨내기는 쉬운일이 아닐 것이므로, 강력한 지지자들을 소외시켜왔던 업보를 가진 노 정부는 점차 조중동과의 협력 관계를 아예 정책적으로 수용하므로써 정권의 안정과 안녕을 담보받는 길을 선택하고 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노 대통령은 더 훗날, 이러한 패착이 지지층의 자연적 와해나 이반, 그리고 강고한 극우언론의 발목잡기에 의한 것일 뿐 자신의 신념,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책임을 피하려 할 지도 모릅니다. 허를 찔린 공생의 함정, 그들이 놓은 악귀같은 덫에 걸린 불행이었다면서요.

그러나 정치인의 한 번 판단과 그 행위는 적어도 정치적인 이익과 그 반대급부를 무시한 채 실천되고 말았다 해서 책임을 벗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정치인의 행위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 의해서만 수행된다는 정치의 기역니은을 인정합시다. 현재 우리눈에 실착으로 보이는 정책 결정은 필시 노 대통령과 그 참모진이 심사숙고하여 선택한 고도의 정치 행위라고 규정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난 뒤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변명하는 것은 효력이 없습니다. 수구와의 공생의 댓가는 이토록 만만찮은 것입니다.

자신의 수구적 발언으로 지지자의 대거 이탈을 경험하면서도 한편 지금 당장은 조중동의 격려와 다둑거림에 자신의 깊은 한숨을 의탁해버리고 있을 노 대통령에게 인간적으로야 가여운 마음이 아니 들 수 없지만, 냉혹한 현실에서는 이제 그가 쉬 발을 뒤로 뺄 수도 없는 형국이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초심으로 되돌아 가려고 해도, 조중동의 하이에나 이빨에 한 번 발목잡히기 시작한 그가 운신할 선택의 폭은 대단히 협소해져버린 겁니다. 그들은 절대 노통을 순순히 내주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비운이 현실로 나타나면 우리가 나서서 가열차게 싸워야 한다구요? 그래야겠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문제의 본질은 노 대통령에게 계속 남아 있습니다. 노 대통령이 지금 '일관되게' 어느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를 검토하면 될 일입니다. 그 발걸음을 주시하다보면 그 때가 되었을 싯점에서 불행하게도 우리는 노 대통령과 한편이 되어 조중동에 대항할 상황에 있지 않을 것만 같은 예감이 옵니다. 노 대통령이 필경 조중동의 품에 의탁해 있을 사태를 우린 결국 맞을 거라고 예측합니다. 치기어린 허튼 예상이라 웃고 마는 사람도 더러 있겠군요.

보십시오.
노 대통령은 취임 3개월간 지치지도 않고 간단없는 시리즈로 수구적 발언과 정치 행위를 일삼아왔습니다. 촛불행진 자제 발언, 수구적 인사의 중용과 영남 출신 편중 인사, 대북송금 특검 수용, 논의를 차단한 이라크 파병 결정, 전교조 반미교육 제재 지시, 실리 없는 숭미 발언으로 국민의 자존심 짓밟기, 햇볕정책의 실질적 파기와 남북관계 급속 경색, 한반도 전쟁가능성을 한미공조라는 허약하기 이를데 없는 수사 하나로 대체해놓고 대미 외교 성과라며 자화자찬하기, 재벌개혁의 연기, 수도권 지역 아파트 값 상승에 손놓고 방관하기, 한총련 검거 지시와 5.18묘역 '난동자' 낙인 발언, 초법적으로 네이스(NEIS) 시행 밀어 부치기, 수구지역 주민 끌어안기 목표의 소위 개혁신당 구상과 지원... 숨이 찰 지경입니다. 드디어 오늘에 와서는 극우진영과 수구언론의 두둔과 찬사까지 얻어내는 장거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는 일관되게 흐르는 기조가 분명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우연이나 상황의 강요가 아닌 노 대통령 자신이 선택한 기조 말입니다.

한 마디로 수구의 길입니다. 선거 공약과는 정확히 180도 틀어진 변신입니다. 대 변신입니다. 그의 자유의지의 선택에 의해서 말입니다. 가히 세상이 뒤집혔다며 수선을 떨어도 할 말이 없게 된 엄청난 반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취임 후 3개월 만의, 지지층의 정확한 자리 바꿈의 현상은 "세계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현상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기현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정치적 이념과 지향은 충분히 드러났다고 보여집니다. 그간 그의 이름 앞에 관형사로 붙었던 '개혁'의 실체는 정작 알맹이 부재, 철학 부재임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고 있습니다. 상황과 실리를 우선시키는 철학, 그래서 이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원칙과 소신도 얼마든지 유기시키고 마는 철학을 가진 사람 말입니다. 그는 예측 불가능의 정치인입니다. 선거 기간 후보로서 쌓았던 지지자들로부터의 신용과 신뢰를 내동댕이 치고도 향후 개의치 않겠다고 공언하는 비상식을 서슴지 않는 정치인 입니다.

그의 실리가 어떤 기준에 근거하는지 (그는 '상황에의 순응'을 실리라고 말합니다) 파악이 안되는 정치인이라면, 그를 믿고 계속 지지한다는 것 자체는, 나의 정체성을 통째로 부정하는 전제하의 투항이고 무책임성의 표현이 되고 맙니다. 그를 '무조건 믿고' 밀어주자는 말은 정치적 지진아나 할 말입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을 믿고 우두커니 바라만 볼 수 없습니다.

▶ 노대통령은 "지도자에게 사고가 발생해도
시스템과 매뉴얼만 있으면 그대로 돌아가는 사회를
소망한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에 대한 이해와 지지를 구하는 것이다.
그를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에게 남겨진 유권자와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선택의 폭은 노 대통령의 어이없는 변절로 인해 몹시 옹색하게 졸아들었습니다. 그간의 지지자들이 실제로 어제, 오늘을 고비로 하여 대규모로 이탈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제(5월 21일) 노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회의를 느낀다-- "이러다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이 상황으로 가면 대통령을 제대로 못하겠다는 위기감이 있습니다."--는 발언이 또한 결정적인 자충수를 둔 듯 보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다시금 지지자들을 되돌릴 수 없는 길을 향해 지금 막 강을 건너는 중입니다. 개혁을 오매불망하는 지지자들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수구와의 공생을 선택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걸어들어가 조중동에게 발목 잡히고 있는 노 대통령, 그들과 화합하는데서 국정수행의 고뇌의 땀을 씻어내며 평안을 구가할 노 대통령, 그는 다시 육체와 정신의 극심한 고통을 수반할 첨예한 대립으로 조중동과 맞서 싸울 철학과 신념과 의지가 결코 없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확실히 섭니다.

후보 시절 그가 언론 개혁을 외칠 때와는 다르게, 대통령이 되고 보니 국정 책임자로서 거대 언론과 매양 대립만 하고 있는 것은 결코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판단하였을 성 싶습니다. 이러한 예측이 저 개인의 자의적 판단과 취향으로 무책임하게 마구 발설되고 있다고 분개할 사람들도 있겠지요. 아닙니다. 인간 노무현에 대한 이전까지의 편견을 다 내려놓고 조용히 사색해보시길 권합니다.

이것은 인간 노무현과 나와의 관계, 즉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 자신이 개별적으로 어떤 대의 앞에 떳떳하게 단독자로서 서느냐의 정체성 문제입니다. 노 대통령이 수구의 길을 가면 반대할 일이고 개혁을 밀고 가는 철학이 확실히 보였다고 판단되면 그를 지지하면 될 일 입니다. 그러나 조중동과의 상생을 택하는 그를 무조건 지지한다는 건 자가당착이라고 보입니다. 그것은 조중동과 수구, 기득권, 반통일, 사대숭미, 친일, 반재벌개혁, 반민중에 손들어 주는 일이 되고 마니까요.

내가 아무리 사랑하고 흠모하던 님인들 어쩌리요, 그가 지금 적군 진지에 가담하여 옛 동지들에게 칼을 들이대는 망동을 서슴지 않고 있는데, 옛 정만을 추억하며 동정으로 눈을 질끈 감을 순 없는 일이 아닙니까? 노 대통령의 계획됐지만 돌연한 우연으로 보이는, 수구노선으로의 방향 전환으로 인해 이미 민중의 상당수는 커다란 고통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무턱대고 감싸며 기다릴 수 만 없습니다.

돌아오지도 않을, 돌아올 수도 없는 강을 건너는 옛님을 나는 깨끗이 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추스려서 나도 모르는 새 형성된 새로운 수구과의 대치선에 또 걸어나가야겠습니다. 그게 내가 설 곳이고 또 양심을 지키는 일입니다.

* 본문은 독자기고입니다. 본문에 대한 네티즌들의 다양한 의견을 환영합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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