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옆에서는 2003년 3월 1일 정오, 서울 시청 광장에서 열린 '반핵반김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이하 국민대회) 현장 녹음' 테이프가 삐걱삐걱 돌아가고 있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테이프는 「월간조선」 2003년 4월호 창간 기념 선물로 독자들에게 배포된 것이다. 이 선물은 침묵하는 다수의 낮은 목소리가 이제 볼륨을 높이기 시작했다는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의 해설로 시작해서 한 시간 분량으로 편집되어 있다. 녹음테이프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내력은 자못 흥미롭다. 이 녹음테이프는 정치와 종교와 언론이 형성하는 삼각형의 마법 안에서 빚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테이프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이 삼각의 마법을 풀어야만 한다.
한국에서 특정 종교나 교파가 언론에 의해 공격받는 현상은 다반사의 일이다. 그만큼 종교는 스캔들 메이커라고 할 수 있다. 언론은 주로 상식과 이성과 도덕의 이름으로 종교를 비판한다. 이러한 이름으로 몰상식과 비이성과 부도덕의 종교를 비판하는 것은 언론의 소임에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줄곧 보아왔듯이 언론은 종교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언론의 종교 비판은 대개 스캔들로 끝나게 된다. 왜 그럴까. 아마도 언론의 논리와는 다른 종교의 논리가 있기 때문 아닐까. 그러나 스캔들도 자체의 논리가 있으며 모든 스캔들이 똑같은 효과를 내는 것도 아니다.
종교는 잉여에 대한 탐색이다. 종교의 핵심에는 우리의 일상 담론이 비켜가는 잉여가 있다. 그 잉여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다. 이처럼 종교에는 선악이나 정오(正誤)의 잣대로 평가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그래서 언론은 종교를 번역하는 데 항상 실패한다. 언론의 이분법적 언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종교의 잉여 때문이다. 물론 언론이 종교의 잉여를 번역하려고 시도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잉여의 문제에 관여하는 순간 언론의 언어는 방언으로 전락하고 만다. 언론의 생명인 객관적인 표준어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이다. 어떤 형태로든 종교와 언론의 만남에서 남는 것은 스캔들이다. 그러나 스캔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스캔들을 통해서만 우리의 시선에 포착되는 종교현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스캔들을 문제화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종교와 관련된 스캔들의 문제이다. 그러나 사태는 정반대다. 언론에 의해 공격받는 종교가 아니라 언론에 의해 찬양받고 이용되는 종교의 문제를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와 언론의 밀월 현상은 낯선 현상이 아니다. 히스테리아가 정신분석에 의해 시간의 트라우마를 드러내듯이, 종교와 언론의 유착이라는 스캔들 또한 그저 우리 역사의 트라우마를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종교와 언론의 유착이 노골적으로 공식화될 때 양자는 모두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양자 모두에게 불신은 치명적인 독소이다.
종교의 언어와 언론의 언어는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이 둘의 언어가 분별 없이 뒤섞이게 될 때, 언론이 종교의 언어로 현상을 설명하기 시작할 때, 종교가 언론의 언어로 구원을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종교와 언론의 혼합은 정체불명의 '튀기'를 만들어낸다. 적어도 이 글에서 분석하는 '튀기'의 정체는 정치-종교적 파시즘이다. 이런 논의 맥락에서 우리는 삼각형의 마법을 완성하는 정치학을 만나게 된다. 언론의 정치학과 종교의 구원론이 맞아떨어질 때 이 둘은 성스러운 결혼을 한다. 구원론이 정치학이 되고 정치학이 구원론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식의 이종 교배를 설명할 언어를 마련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된다.
근대성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기본으로 한다. 서로 득이 될 게 전혀 없기 때문에, 정치와 종교는 가급적 상대방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註1) 반면에 근대세계에서 정교유착은 대개 파시즘의 징후가 된다. 특히 한국처럼 다원적인 종교 상황에서 정치와 특정 종교의 유착은 대단한 모험주의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최근에 그런 일이 우리 눈앞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그 형태는 단순하지 않고 당황스럽다. 종교와 정치가 직접 손을 맞잡은 것이라기보다는 언론이 종교와 정치의 충실한 매파 역할을 하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종교인이 정치 언어를 종교 언어인 양 사용하고, 언론인은 종교 언어를 정치 언어인 양 사용하고 있다.
다시 우리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자. 「월간조선」 부록 테이프의 배아는 근래에 개신교가 펼친 몇 차례의 기도회에서 만들어졌다. 「월간조선」에 의해 반공·애국 기독교로 명명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길자연 목사)와 기독교지도자협의회(기지협, 대표회장 최해일 목사)가 주최하고 「국민일보」, 「극동방송」 등이 후원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가 2003년 1월 11일과 19일 두 차례에 걸쳐 서울 시청 앞에서 개최되었다.
한기총은 기독교 내 최대 단체로 61개 교단과 16개 단체가 소속되어 있으며, 기지협은 각 교단의 회장을 지낸 원로 목사 60여 명이 소속되어 있다. 기도회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조용기 목사)와 금란교회(김홍도 목사), 왕성교회(길자연 목사), 성남순복음교회(엄기호 목사), 순복음인천교회(최성규 목사) 같은 대형 교회들이 참여함으로써 기도회 인원 또한 수만 명에 육박했다. 김장환 목사(수원중앙침례교회)가 사장으로 있는 극동방송은 11일 기도회를 서울지역에 생중계했다. 그리고 19일 기도회에서는 '기도가 나라를 살립니다'라는 「국민일보」의 호외 특보와 '사이버와 광화문을 점령하라'는 문구로 장식된 「월간조선」 2월호 표지 복사본이 배포되었다. 2월 9일에는 부산과 대구에서도 이에 화답하는 기도회가 열렸다.
부산에서는 부산기독교협의회 주관으로 수천 명이 참석한 가운데 부산역 광장에서 기도회가 열렸고, 대구에서는 서문교회에서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기도회는 경건한 종교의례라기보다 일종의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찾아보자.
서울 시청 앞은 멀게는 1987년 6월, 故 이한열씨 장례식에서부터 작년에는 월드컵과 추모 촛불시위가 열린 곳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사회정치사에서 몇 가지 전환점을 제공한 상징적인 장소이다. 서울 시청 앞은 민주를 위한 저항의 광장이자 민족의 열정이 분출하는 광장이었다. 그러므로 개신교인들이 기도회를 위해 그런 사회 정치적 공간을 그들만의 공간으로 점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캔들이 되기에 충분했다. 서울 시청 앞은 종교적인 공간이 아니다. 게다가 세계 최대 교인수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형 교회들이 서울 시청까지 나와 구국 기도회를 연다는 것 자체가 혐의를 받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누가 봐도 한기총과 기지협 관계자들이 작정하고 광화문 점령에 나선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공간은 마법을 지닌다. 공간에는 공간 나름의 시간과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서울 시청 앞 광장 또한 그러하다. 정치와 월드컵의 공간에 들어선 이상, 개신교가 정치화되고 스포츠화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광장은 기도회의 모든 언설과 몸짓에 광장 특유의 호흡과 색깔을 주입한다. 역사가 만들어낸 공간의 무의식이 스멀스멀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회의 본래 취지는 순수한 것이었다고 한기총이 아무리 변명하더라도, 시울 시청 앞이라는 공간은 기도회를 기도회로만 머물게 하지 않았다. 한기총과 대형 교회는 그동안 차마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광장 선망증을 고이 간직한 채 서울 시청에 입성했고, 이는 개신교의 정치화 내지 국교화라는 잠재된 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발걸음인 듯 읽혀졌다. 아니나 다를까 기도회는 필연적인 수순을 밟으며 전국의 보수 우파를 집결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하고 말았다.
그 예로 1월 16일자 「월간조선」에 실린 친북좌익세력명단공개추진본부(이하 명단공개본부) 명의의 광고는 '19일 서울 시청 광장으로 모이자'며 보수의 집결을 호소했고, 「월간조선」 인터넷 사이트 역시 기도회 참여를 독려했다. 명단공개본부는 육해공군해병대예비역대령연합회 회장 서정갑씨가 본부장으로 있는 단체로 2002년 3월에 만들어졌고, 국민대회 이후에는 국민행동 친북좌익척결본부라는 살벌한 개명을 단행했다. 이처럼 한기총의 기도회는 각종 보수·우익·호국단체들을 서울 시청 앞으로 끌어모으는 자석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한기총이 자리를 깔아 종교적 알리바이를 만들고, 개신교 윤리학에 얹혀 보수를 표방하는 언론과 정치권과 각종 단체들이 군집하게 된 것이다. 단순히 보수 세력이 개신교를 이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기도회의 구호는 지극히 순박했다. 그들의 주장은 친미와 반북으로 간략하게 요약된다. 촛불시위가 반미시위로 번져 미국이 한국을 싫어하게 될까봐 지레 겁을 먹고, 한국 개신교가 미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청 앞에 모여서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태극기와 성조기와 유엔기를 흔들었다. 한국 개신교의 종교 종주국인 미국을 위무하기 위해서 그토록 현란한 기도회를 열었던 것이다. 한국이 미국의 종교 식민지임을 세계 곳곳에 알리고 싶었단 말인가. 그들 주장에 따르면, 교육과 의료의 근대화를 이루어주고, 조선인에게 일제 침탈을 견뎌낼 성령을 불어넣어 주고,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주고, 한국전쟁과 공산당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고, 그것도 모자라 박정희를 통해 경제발전을 지원해 주고, 나아가 독재정권으로부터 민주화까지 시켜준 게 그들의 종교 종주국 미국이다. 이런 논리 속에서 '기독교인=친미'이고 '반미=사탄의 꼭두각시'라는 기괴한 논리가 튀어나오는 건 하등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성경 어디에 친미가 아니면 사탄이라는 말이 나오는가.
기도회는 현재의 한국 사회를 정치 종교적 위기 상황으로 규정짓고, 이러한 현상의 근본 원인으로 북한의 김정일을 지목했다. 그리고 김정일을 하나님에 대적하는 사탄으로 형상화하는 모든 수사를 동원했다. 마치 개신교 부흥회가 악마주의를 주장함으로써 급속성장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보이지 않는 악마의 효력이 다해 이제 보이는 악마가 필요하다는 듯, 한기총이 새로운 악마 사냥의 저격수로 나선 것이다.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라는 찬송가의 구절(이 구절은 녹음테이프에서 조갑제 편집장이 결론을 대신해 외치는 말이기도 하다)을 전거로 삼아 아무리 정당화한들, 정치와 종교를 혼동했다는 혐의를 벗어버릴 수 있을까. 김정일은 사탄이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금란교회의 김홍도 목사는 19일 기도회에서 공산주의라는 미치광이 병이 한국에 염병처럼 퍼지고 있고, 남쪽에 5만 명이 넘는 고정간첩이 있으며 400만 명의 친북성향의 사람들이 있고, 북한의 정권은 사탄의 정권이라고 주장했다. 김홍도 목사가 1월 26일에 교회에서 한 설교는 <공산주의는 왜 나쁜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전국 교회에 공수되었다. 그는 설교를 통해 수원·연천·부산(부산은 좀 너무한 것 아닌가!)에서 땅굴이 발견되었고 북한이 몇 년 전에 남한 군복 30만 벌을 가져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의 땅굴론·고첩론·군복론은 그냥 듣기에도 민망할 뿐더러, 대형 교회의 성장 동력이 <개그콘서트>였나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이다. 「뉴스앤조이」에 의하면, 실제로 대형 교회들이 2억 원 이상의 땅굴 탐사지원금을 들여 경기도 화성군 지화리에서 땅굴 탐사를 벌였으며, 엄기호 목사는 "땅굴이 정말 존재한다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당연히 발굴해야 한다는 생각에 3천만 원을 지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기사에 따르면, 시청 앞 기도회는 당초에 연천군 구미리와 화성군 지화리의 땅굴설을 제기한 한사랑선교회의 김한식 목사(15대 대선 출마자이기도 하다)가 기획한 것으로, 대형 교회들이 이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기도회에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실제로 2월 4일에는 한기총 관련 목사들이 화성 땅굴 탐사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지난 3월 2일에 소망교회(곽선희 목사)에서는 북한 측 종교인 14명이 함께 예배에 참여했다가 정치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교인들과 마찰을 빚었다. 같은 날 서울 새문안교회 이수영 담임 목사는 "철없는 사람이 대통령에 앉아 있을 5년간이 너무나 불안하다"라며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은 범죄 국가가 아니라 협상 대상"이라고 한 말을 비난하는 설교를 했다. 같은 날짜에 소망교회에서는 정교 분리가 주장되고 새문안교회에서는 정교 분리가 무시되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월간조선」 4월호는 두 사건을 상반되게 해석하고 있다. 소망교회 사건의 경우엔, "우리 교회 교인들의 수준이 높고, 우리 사회에 보수층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했다"라는 한 교인의 발언을 싣고 있다. 반면에 새문안교회의 이수영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는 "한국 내 친북 세력의 선동을 비판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라는 촌평을 냈으며 설교 전문을 게재하는 정성을 보였다.
아도르노는 이런 식의 논리적 비일관성을 파시즘의 징후로 파악한다.註2) 파시즘은 스스로의 논리적 불일치를 깨닫지 못한다. 불일치와 비일관성이 반성을 일으키지 못하고 그저 당연한 것으로 일상화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수·친미·반북이라는 구호 속에서 논리의 비약과 비논리의 일상화를 보여준 한기총의 기도회는 종교적 파시즘의 징후에 휩싸여 있는 것 아닌가. 개신교 전체를 한기총과 등가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기총 기도회의 사례를 통해서 우리는 개신교의 악마주의와 종교-식민지주의가 보수 언론과의 유착 속에서 어떻게 굴절되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한기총이 주도한 1월 11일과 19일의 기도회가 열린 직후에, 이를 지켜본 자칭 애국 운동 세력과 기독교계 인사들은 기도회를 제2의 삼일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회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대회집행위원장에는 김상철 「미래한국신문」 발행인이, 총무위원장에는 한사랑선교회의 김한식 목사가, 홍보위원장에는 서정갑 명단공개본부장이 선임되었다. 보수·우파·애국을 자처하는 국민대표 57인이 추대되었으며, 여기에는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 한강중앙교회 신신묵 목사, 노량진교회의 림인식 목사, 최해일 기지협 회장, 정진경 한기총 명예회장, 신현균 민족복음화운동본부 총재 등의 개신교 목사들이 포함돼 있다. 따라서 국민대회가 보수의 세력 과시였음을 상기할 때 한기총의 정치적 순수성 주장 성명은 더욱 실없는 변명으로만 들릴 뿐이다. 국민대회에 앞서 제1부 행사로 반공기독교의 기도회가 열렸으니 더욱 그러하다.
다시 「월간조선」 녹음테이프로 돌아가 보자. 이 테이프는 일종의 간증 테이프이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간증이라기보다는 한국에 자유와 복음을 가져다준 미국의 성스러움에 대한 간증이다. 이를 위해 국민대회는 철저히 개신교 기도회의 도식을 전유한다. 국민대회는 선 악=미국 북한=하나님 사탄=보수 진보=우익 좌익=애국 반역이라는 식의 종교적 이원론을 가동함으로써, 종교의 논리와 정치의 논리를 등가화한다. 이로써 국민대회는 북한의 김정일은 사탄이고 남한의 현정권은 사탄의 동조자이며 극우 보수 세력만이 미국의 비호 아래 한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선전하기 위한 간증 집회가 된다. 그리고 간증을 위해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부흥사들이 동원된다. 납북·탈북 어부 이재근씨가 김정일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제5공화국의 찬송가인 '아! 대한민국'이 울려퍼지고, 개신교회 합창단이 미국 국가인 '별이 빛나는 깃발'을 열창하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군가인 '전우야 잘 자라'를 합창하고, "물렀거라! 똥 먹어라"를 연발하는 박홍 신부의 축귀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그리고 「월간조선」 4월호는 이 귀중한 행사를 녹취해서 우리에게 선물해 준다.
사실 국민대회는 종교와 언론에 의해 보수주의가 이중으로 세탁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종교는 언론을 통해 선교와 부흥의 정치학을 구사하고, 정치는 언론을 통해 종교적인 이원론이 지닌 마력을 흡수한다. 종교는 정치화되고 정치는 종교화된다. 언론에 의해 종교와 정치가 서로의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공모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본래 종교와 언론은 각각 신앙과 신뢰를 먹고산다. 따라서 오점 없는 청정의 윤리학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언론에 의해 종교와 정치가 교환할 때, 이 둘의 합심은 파시즘의 테크닉으로 경도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종교가 정치적인 조작의 테크닉으로 변형되고 언론은 종교의 대본이 된다.
기도회와 국민대회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이유가 있다. 한편으로 이 모든 일은 「월간조선」의 몇 년에 걸친 시나리오 작업 끝에 나온 결정판이었다. 「월간조선」 2월호는 '청년 우파들과 애국 기독교의 궐기 내막 사이버와 광화문을 장악하라'라는 선동적인 문구를 통해 우파 청년과 기독교라는 양수겸장의 전략을 구사했다. 연이어 「월간조선」 3월호는 '애국 기독교 궐기 이후 반핵반김 기도회 전국으로 확산'이라는 기사와 함께, '열 명의 우파 인사들이 말하는 한국 자유 세력의 반성과 대안 <침묵하는 다수는 필요 없다. 이제는 행동하는 소수가 더 절실한 시기다>'라는 기사를 싣는다. 애국 기독교와 우파 정치학의 교묘한 배합이 진행되는 것이다. 마침내 「월간조선」 4월호는 〈권말특집: 거대한 전환점 반핵반김·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 내막〉이라는 큰 제목 아래 6개의 각종 기사를 싣는다. '드디어 한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기총과 「월간조선」의 밀월은 최근 3개월 동안 쉬지 않고 진행되었으며, 부록 테이프는 이러한 과정의 결정체로 제작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언론이 종교 파시즘과 악마주의 정치학의 대본을 만들어 주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도회는 우파에 의한 광화문 점령으로 해석되고, 우파는 사탄을 처단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순교자로 해석된다. 「월간조선」 4월호에 실린 김동길 교수의 직설 15탄 제목인 '나도 삼손처럼 김정일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싶다 내가 깔려 죽으면 김정일도 죽겠지'라는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제 정치학이 종교적인 언어를 구사하며 순교를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
조갑제씨는 최근 3월 16일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안보 강연회에서 "광화문과 서점, 인터넷도 장악해야 한다. 김정일은 악마적인 존재이다. 기독교의 적이고 사탄의 제자이다. 성경 어디로 봐도 사탄을 용서하라는 말은 없다"라고 고백함으로써, 「월간조선」의 언어가 세속화된 종교 언어임을 고백한 적이 있다. 그가 기사를 쓰고 사회 정치적 가치판단을 하기 위해 성서를 탐독했다는 것이 그의 고백의 요체인 것이다. 그의 언어는 이미 언론의 언어가 아니라 종교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국민대회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사태는 「월간조선」의 언어가 방언의 언어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사실 그는 "김정일을 평화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열쇠는 한국의 주류,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조직된 개신교의 큰 교회가 쥐고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언론이 파시즘적 기독교로 개종했음을 선언했다. 이 말을 번역하면 통일은 북한의 기독교화에 달려 있는 셈이다. 이런 논리 속에서는 전쟁도 악마를 제거하고 복음을 전하는 성전이 된다. 「월간조선」은 2001년에도 한문화운동연합의 단군상 설치를 북한의 단군릉 건립과 연결시킴으로써, 단군상 설치를 북한이 김대중 정권과 결탁하여 기독교를 제거하기 위해 벌이는 것이라는 독특한 해석을 내놓은 적이 있다.
이제 종교가 언론을 매개로 하여 정치화될 때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가의 문제를 정리하면서 글을 끝마치고자 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독일식 파시즘은 유대교·개신교·가톨릭 등에 대립하는 입장을 취하는 반면에, 미국식 파시즘은 종교에 대한 강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 미국 파시즘은 종교가 정치적이며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종교학자인 엘리아데(Mircea Eliade)가 지적하듯이 종교적인 성스러움은 본래 제국주의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종교적인 성스러움이 종교적인 맥락을 자꾸 일탈하면서 적용될 때 (엘리아데는 이를 상징의 유치화(幼稚化) 내지 타락이라고 설명한다), 성스러움은 제국주의나 파시즘의 장치에 기여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파시즘은 일상생활의 모든 세부에 파고들려는 경향을 갖는데, 여기에는 종교만큼 좋은 도구가 없다. 그러나 과도함은 항상 끝의 예고편 같은 것이다. 종교적인 성스러움의 과도한 적용은 결국 성스러움의 완벽한 세속화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 선교사들의 작품인 한국 개신교에도 미국식 파시즘이 수입된 것일까. 간단한 예로, 현재 부시 미국 대통령은 '악의 축'이라는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파시즘의 징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종교 언어가 정치 언어가 될 때 생겨나는 가장 기본적인 종교 파시즘이다.
종교 언어가 정치 언어로 변형되는 몇 가지 장치는 이러하다. 먼저 현재의 상황을 심판이 임박한 마지막 시간으로 파악하는 종말론적 장치가 있다. 이것은 세계적인 재난과 한반도의 핵위기를 강조하고 한국의 현정권을 좌파로 묘사함으로써, 공산주의에 의해 박해받은 전력이 있는 개신교의 화급한 위기 상황을 강조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이것은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공포의 테크닉이다. 다음으로 '악의 세력'과 '하나님의 세력'이라는 이분법을 통해 상황을 묘사하는 기독교적 이원론의 장치가 있다. 이는 김정일을 악마화하고 미국을 하나님의 군대로 묘사하는 것과 연관된다. 이것은 자칫하면 정치적인 십자군의 논리로 흘러간다. 그리고 종교적인 과장법의 장치가 있다. 종교는 언어와 행동 등을 과장함으로써 그 형식과 내용의 일치를 꾀한다. 이것은 세부와 단순에 시선을 끌어 의미를 증폭시키는 전략이다. 우리는 고첩론·군복론·땅굴론 등에 나타난 언어 사용에서 이러한 징후를 읽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잘못된 정확성의 테크닉이 첨가될 수 있다. 친북성향자 400만 명, 고정간첩 5만 명, 군복 30만 벌, 땅굴이 발견된 수원·연천 등의 구체적 지명 거론 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이것 또한 파시즘의 징후라 할 수 있다.
그밖에도 통일성의 장치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교파를 초월해서 종교적인 세력을 규합하려는 시도와 관계된다. 교회 일치 운동의 과도한 적용은 그러한 징후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한기총의 기도회는 이러한 초교파적 속성을 지닌다. 이것은 해당 종교를 한 나라의 국교로 만들려는 시도와도 맞닿아 있다. 이것은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부정이며 종교적 파시즘의 징후로 읽힐 수 있다. 마지막으로 조상 숭배의 장치가 있다. 과거의 순교를 강조하고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강조할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이것은 과격한 애국주의로 드러난다. 물론 하나의 징후가 파시즘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장치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될 때 종교와 정치의 차이와 경계가 붕괴되면서 파시즘이 똬리를 트는 것이다. 이러한 징후 속에서는 어김없이 군사주의 상징이 범람한다.
한기총과 기지협의 기도회와 「월간조선」의 만남은 '잘못된 만남'이다. 개신교인들 대다수는 종교적인 기도회가 정치적인 국민대회로 변형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만남은 사태를 전혀 예기치 못한 필연으로 몰고 가게 되어 있다. 한기총과 기지협의 최종 목표가 개신교의 국교화는 아니라고 믿는다. 종교적 파시즘은 종교적 몰락의 징후임을 먼저 알아야 한다. 광화문과 사이버는 갈등과 점령의 장소가 아니라, 소통과 만남의 장소임을 배워야 한다.
註1) 언론 매체와 관련된 정교분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장석만 〈매스미디어와 종교: 텔레비전은 종교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사회비평』 2002년 가을호를 참조.
註2) 이 글에서 종교와 파시즘의 문제에 관련된 논의는 주로 다음 논문을 참고했다: Theodor W. Adorno, The Religious Medium," Religion and Media, ed. Hent de Vries & Samuel Weber,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1), 531-554.
* 필자는 한신대학교 강사입니다.
* 본문은 격월간 아웃사이더(http://www.eoutsider.co.kr ) 12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