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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보다 더 중요한 대의가 있는가?
참여정부는 성숙한 시민의식에 성숙하게 대응해야
 
정문순   기사입력  2003/04/10 [01:34]
반전, 세계 시민의 양식

반전 운동 및 이라크전 파병에 대한 찬반 논의가 이 땅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가 진작 획득했어야 할 시민적 양식이 이제는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구나 하는 성급할지 모르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멀리는 베트남에서 가까이는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반전과 평화라는 인류의 보편적 덕목은 한반도라는 냉전의 섬에서만큼은 당당한 시민권을 얻기 힘든 먼 나라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인류 평화라는 시민 사회의 상식은 기껏해야 시민운동가들이나 소수의 양심적인 시민들의 ‘이불 속의 활개 치기’에 그칠 정도로 여론의 힘을 얻지 못한 오랜 세월이 있었다.

한반도 땅에도 뿌리 내리나

그러나 세상은 바뀌고 있다. 전세계적인 반전운동의 영향에 힘입은 바도 있겠지만, 정부와 기득권 세력이 일방적으로 정의를 내린 ‘국익’에 이제는 그대로 동의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시민들, 국민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부도덕한 전쟁을 지지하고 파병을 결정해버린 정부를 무조건 따를 수 없다고 말하는 시민들의 목소리야말로 ‘참여정부’의 시대에 걸맞는 모범적인 시민 참여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정작 ‘참여정부’가 세상을 보는 사람들의 눈이 달라지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하고 여전히 옛 가락에 장단을 맞추는 구태를 답습하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노무현 정부가 파병과 관련하여 저지른 심각한 실수는 변화하는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했거나 그것을 존중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한 데 있다. ‘형님 나라’ 대통령으로부터 전화 한 통 받자마자 일사천리로 전쟁 지지와 파병 결정을 내린 우리 대통령의 행태는, 그의 공약과 달리 이 정부에게 역대 정권의 대미 종속성이라는 중증질환을 치유할 능력이나 의지가 있음을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허황한 일인지, 이 정부가 강대국의 일방적인 전쟁 놀이에 찬동할 수 없다는 시민들의 여론을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약소국이라는 이 나라의 처지를 모르는 바 아니며 노무현 정부의 본질적인 보수성을 감안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약한 자의 슬픔’이 집권자로 하여금 무고한 인명이 살상되는 잔혹한 전쟁에 대한 성찰마저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종을 울려주면 절로 침을 흘리는 실험실 개처럼,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동시에 미국 지지와 파병을 선언한 이 정부에게서 속절없이 죽어갈 이라크인에 대한 일말의 안타까움이라도 읽히는가.

성숙한 시민 의식에는 성숙하게 대응하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그러나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고심 끝에 파병을 선택했다는 그의 해명은 전혀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솔직하지도 못하다. 미국이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인명 살상 행위에 도움을 받으면 한반도의 평화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도 순진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런 ‘결단’은 미국은 차치하고 대화의 당사자인 북한조차 이해시킬 수 없는 논리다. 이라크 침략을 미국이 자신들에게 행할 일의 ‘예행 연습’으로 받아들일 것이 분명한 북한이 남한의 파병을 이해해 주리라고 믿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북한이 등을 돌리고 반전을 선언한 중국과 러시아가 남한을 외면한다면 노무현 정부는 누구와 머리를 맞대고 한반도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생명’ 보다 귀한 명제 있으랴

그러나 침략 전쟁과 파병을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세력만 이라크인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에는 원칙적으로 반대하나 “대통령의 판단은 존중한다”는 대통령 지지자들과 파병을 어쩔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이자는 ‘현실주의자들’ 역시, 이라크인이 당하고 있는 처참한 살육을 방관하거나 정당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는, 이 정부를 포함하여 밥 먹기 전에 ‘갓 블레스 아메리카’를 기도하는 우익 기독교인이나 기득권 세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를 이분법론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생명 존중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대의를 능가할 수 있는 명제가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반전의 외침이 설령 우리에게 피해를 줄지언정 이라크인들이 끔찍하게 죽어야 하는 인륜 범죄와 비할 수는 없지 않은가.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 본문은 '언론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이 힘을 모아 만든 신문' 경남도민일보 (http://www.dominilbo.co.kr/) 4월 7일자에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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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4/10 [01:3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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