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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죽음을 욕되게 하지 말라
초등학교장 자살 사건과 관련하여
 
정문순   기사입력  2003/04/13 [02:16]
자고로 모든 죽음은 인간을 숙연하게 한다. 하물며 자살의 경우, 고인이 제 삶을 스스로 던지기까지 겪었을 고통을 헤아리며 넋을 달래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천안 모 초등학교장의 죽음은 보수 언론들이 아니었다면 고인과 가까운 이들만 애끊는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 데 그쳤을지 모른다. 가능한 한 많은 이들에게 고인의 안타까운 죽음을 알게 하는 것이 살아 있는 자들의 도리라고 말한다면, 고인을 향해 전사회적인 애도와 추념의 물결이 일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죽음이든 동등하게 추모를 받을 자격이 있다. 보수 언론이 주도하고 있는 추모 열기는 십 수년 전 그들이 오늘의 경우와 전혀 다르게 다룬 하나의 죽음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1989년 전교조 출범 당시, 당국이 전교조에 가입한 교사들을 탈퇴시키기 위해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부모에 대한 회유나 협박을 서슴지 않았을 때, 부산의 어느 여교사의 부친은 어느 교육관료로부터 '빨갱이 딸'을 두었다는 폭언을 듣고 목숨을 끊어버린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전교조를 용공 세력이라 규정한 군사정권에 동조한 보수 언론들은 고인의 죽음을 부각하지도, 고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세력을 조사하여 처벌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생떼 같은 목숨이 스러져도 평등하게 애도할 줄 모르는 그들은 지금, 교육 기득권 집단과 함께 아직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학교장의 죽음을 자의적으로 왜곡하여 눈엣가시이던 전교조를 죽이기 위한 여론몰이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엉뚱한 장난을 치도록 내버려두기에는 인간의 죽음은 너무 무겁다.  

학교장 자살이라는 비극을 부른 이 사건은, 교육 현장의 비민주성과 학교장의 권위주의가 야기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에 대한 성차별과 관련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일선 학교의 고질적인 가부장적 구습은 학교와 학생들의 관계 뿐 아니라 학교장과 평교사, 정규직 교사와 비정규직 교사, 남자 교사와 여자 교사 사이에서도 수직적으로 관철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기간제 교사가 차 시중을 강요받은 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성차별적 행태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묵인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알고 있다. 학교장과 비정규직 여교사의 권력 차이는 교사와 교생의 관계와 비슷할까. 필자의 경우 교생 시절 담임교사로부터 부르스춤 추기를 강요당한 적도 있다.

세간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말할 때 차 '시중'이 아닌 차 '접대'라 부름으로써 성착취적 성격을 흐리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시각이 있다. '일개' 기간제 여교사가 상급자이자 연장자인 학교장에게 커피를 '접대'하는 것이 무어 그리 어렵다고 말썽을 일으켜 결국 비극을 불러오게 했느냐는 식이다. 좋든 싫든 직장의 관행이니 따라야 한다는 말도 들린다. 아닌게 아니라 인터넷 여론을 뒤져보다가 고인을 두둔하고 해당교사를 비난하는 의견이 적지 않은 데 대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일터에서 여직원이 직장 상사에게 커피를 대령해야 하는 등의 잔심부름을 해주어야 하는 '관행'이 뜯어고쳐야 할 악습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교육 현장이라고 예외가 아님도 물론이다. 학교장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여교사를 보면서 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한국처럼 군대식 상명하복 질서가 완강한 건재를 과시하고 있고, 나이 어린 여성이 연로한 남성에게 하녀처럼 취급당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에 적응하는 사람이라면, 차 시중을 거부한 해당교사와 그를 도와준 전교조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학교내에서 하늘과 같은 권한을 가진 학교장으로부터 원치 않는 일을 강요당한 해당교사의 고통과 모욕감에 둔감해서는 안된다. '관행'을 떳떳이 거부하고 문제의 개선을 촉구한 그 교사에게 도대체 무슨 죄가 있는지 알 수 없다. 한편 전교조의 경우 사건 처리 과정에서 섬세하지 못한 대응을 했다는 비판은 모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전교조가 교육개혁 사안에 대해 간혹 보인 경직성을 이번 사건과 결부하여 비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교육 마피아'라는 오명을 들어도 족한 교육 관료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보수언론이 해당교사와 전교조에게 가하는 '패륜' 운운의 시대착오적 매도는 그들의 관심이 한 사람의 죽음을 추모하는 데에 있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로 인해 안 그래도 한국 사회에서 어떤 곳 못지 않게 수구적인 곳으로 남아있는 학교의 보수화가 강화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는 한 사람의 죽음을 욕되게 하는 것일 뿐이다. 고인의 죽음은 교육 현장에서 관행이라 불리는 것의 타파가 얼마나 어려우며 개혁을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게 한다. 아무래도 학교가 사회의 변화와 개혁에 진작 동참할 수 있었다면 막을 수 있는 불행이라는 생각을 물리치기 힘들다. /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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