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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부시와 파월에게 한방 먹이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사의 핵심은 '대미 자주선언'
 
여인철   기사입력  2003/02/27 [16:46]

지난 25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다녀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통령 취임식 참석은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초청장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초청장을 받고는 마음이 흔들렸다.  

지역에서 나름대로 애정을 갖고 뛰었는데 그래도 한번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도 들었고, 과연 노 대통령이 어떻게 그의 임기의 첫 날을 시작할 지가 궁금해졌다.  결국 올라가 보기로 했다.

취임식 행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취임사는 11시 15분경에 시작되었다.  날씨는 쌀쌀한데다 오래 앉아있으니 몸이 으실으실 해왔다. 코트깃을 목덜미까지 세우고 눈을 지긋이 감고 들었다.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평범하게 낮은 톤으로 시작한 그의 목소리가 35분경 갑자기 높아졌다.  

나의 귀는 중반 이후 '한반도 평화' 대목에 이르러 쫑긋 세워졌다.  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증진과 공동번영을 목표로 하는 '평화번영 정책'의 핵심원칙으로 "모든 현안의 대화를 통한 해결"과 "남북당사자 원칙"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어 "북한핵 문제가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자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미국의 군사조치 계획을 우회적으로 미리 차단하며 우리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한반도 문제의 "대화를 통한 해결"과 "남북당사자 원칙", 그것은 내게는 '자주선언'이었다.  마침 와있는 미국의 파월 국무장관에게, 그리고 멀리 미국의 부시에게 전하는 '대한민국의 대미 자주선언'으로 들렸다.

갑자기 노 대통령의 후보시절의 '깽판' 발언이 생각났다.  그리고 한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 지금 이 순간 만일 한나라당 후보가 저 자리에 섰더라면 무슨 말이 나왔을까.  미국에 가서 부시의 대북정책이 우리 당의 정책과 일치한다며 대북강경책을 부추겼던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았다면 지금의 이 살얼음판같은 북핵정세를 어떻게 풀어 나갔을까.  아니 어떻게 '깽판' 쳤을까.

부시는 거칠 것이 없었을 것이고, 우리 정부는 미국의 군사조치에도 결국은 동의하지 않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치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미국에 부시 행정부가 등장한 것은 우리 남북에게는 재앙이었지만, 남한에 노무현 대통령의 등장은 그나마 한 줄기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정말이지 불행 중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취임사에서 한가지 아쉬운 것은 "북한이 핵개발 계획을 포기한다면, 국제사회는 북한이 원하는 많은 것을 제공할 것입니다"라고 함으로써 부시가 주장하는 "선 핵포기, 후지원 검토"라는 억지에 우리 정부가 동의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 주장하는 "선 핵포기"는 한마디로 북미사태를 고의로 악화시키기 위한 억지주장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북측이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릅쓰고 벼랑끝으로 내몰리면서도 저토록 핵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누가 북한을 그 벼랑끝으로 몰아가고 있는가.

장검을 든 거인과 면도칼을 (실제로 면도칼을 손에 쥐고있는지는 손을 하도 꼭 쥐고 있어서 알 수 없다) 든 소인이 대치를 하고 있는데, 거인이 "면도칼 먼저 버려라"고 윽박지른다.  소인은 "(이거라도 없으면 난 죽은 목숨이다.)  제발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라.  그러면 면도칼을 (집을 생각을) 버리겠다."며 애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거인은 "면도칼을 버리면 살려줄지 말지를 그때 가서 '생각해' 보겠다.  그러니 일단 무조건 버려라."고 말하면서 세상사람들에게 "저 자가 저 면도칼로 나뿐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해칠 수 있으니 우리 같이 힘을 합해 저 면도칼을 빼앗읍시다." 하며 합세를 유도한다.

작금의 북미 대치상황 같지 않은가.

북으로서 핵은(다시,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만) 체제보전과 생존을 위한 마지막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수단을 이용해 북한은 미국에게 '불가침조약'의 체결을 줄기차게 요구하며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다.  그런데도 미국은 살려준다는 보장도 없이 그 마지막 자위수단을 무조건 포기하라고 한다.   

미국은 과연 북이 핵을 포기하기를 바라는가.  미국이 진정으로 북의 핵포기에 관심이 있다면, 지금과 같은 정책을 쓸 수는 없다.  써서는 안 된다.  그런 터무니없는 강경책으로는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미국이 잘 알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요구를 무시하며 자기 얘기만 하고 있다.  속셈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은 북의 핵 '제거'에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여진다. 그저 북핵을 가지고 적당히 시간을 벌면서, 적당히 에스컬레이트 시켜가며 이라크전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미국의 독백.

북한이라는 '희미한 악'을 그대로 소멸시켜서는 안 된다.  '악의 축'으로 승격을 시켜서는 가급적 오래오래 '현존하는 북한의 위협'(도대체 북한이 미국에 대해 '위협'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부시에 세뇌된 미국인 말고 있을까?)으로 존치시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놔야 한다.  심리전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 장사판을 계속 벌일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이라는 '악의 축'이 없어지면 우리 미국의 군산복합체, 공화당 매파는 심심해진다.  먹고 살기도 막막해진다.  세계평화? 우리의 아젠다엔 없다.  우리는 무기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생산해서 내다 팔 시장과 소비처가 필요하다.  

그 커다란 봉이 한국이란 나라인데, 바로 위의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북한과 대치를 하고 있으니, 잘만 하면 평생 장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너희 북한이 '악의 축'으로 선발되었다.

그런데 북한이 핵개발 계획을 순순히 포기하도록 내버려두다니...안 될 말이다.  그러니 절대 북한이 핵을 포기할 만큼 대가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끈을 놓지 말고 계속 약을 올려야 한다.  마침 북한이라는 나라가 자존심 하나는 하늘을 찌를 듯 높으니, 그것을 잘만 이용하면 강경대응을 이끌어내기는 쉽다.  

지난 해의 서산호 나포같은 것도 국제법 위반이란 것은 알지만 슬쩍슬쩍 저질러가며 강경대응을 유도한 바 있다.  그때도 북한은 우리에게 국제법위반에 대해 사과하라며 엄청 대들었지.

이렇게 한 단계씩 한 단계씩 잘만 하면 상황의 악화를 유도할 수 있다.  마침 한국과 일본은 꿔다놓은 보리자루마냥 우리가 큰 소리 한번 치면 순순히 따라온다.  중유공급 중단도 그렇게 윽박질러 이루어낸 쾌거(?)다.  그래서 상황이 한꺼번에 크게 악화되었다.  

북한이 성질을 발끈 내며 전력공급을 이유로 원자로 재가동을 선언했고 NPT를 탈퇴했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IAEA가 드디어 개입하기 시작했다. 아주 잘 되었다.  

그로써 북한의 "북핵문제는 북과 우리와의 양국간의 문제"라는 주장은 우리의 의도대로 "국제사회와의 다자간의 문제"로 변질되었다.  북한으로써는 제 성질에 못 이겨 우리가 쳐 놓은 그물에 들어온 셈이다.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또 북한에서 별다른 이상징후는 없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고 해서 한반도에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항공모함도 파견해서 긴장을 조금 높인다.  그러니까 역시 북한이 선제공격을 가할 수도 있다며 강하게 나온다.  바라던 바다.  상황이 무르익었다.

이제 "모든 가능성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는 말이 우리 대통령에게서 나오기 시작했고, 한국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파월 국무장관에게는 "선택가능한 옵션을 완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쯤되면 군사조치가 슬슬 기정사실화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하지만, 북의 핵은 그들로써는 생존의 마지막 의존수단이다.  그것을 아무런 대가없이 포기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북한에게 "핵을 먼저 포기하기 전에는 일체의 협상이나 지원은 없다"며 계속 윽박지른다면, 미국은 북핵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북핵을 이용해 다른 것을 이루려는 흉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에 직면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미국은 지금이라도 재고하기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노 대통령의 "북한이 핵개발 계획을 포기한다면, 국제사회는 북한이 원하는 많은 것을 제공할 것입니다"라는 말은 "핵개발 계획 포기를 국제사회의 지원과 동시에 진행할 것을 제안합니다"라고 말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북측에게 일방적으로 먼저 핵개발 계획 포기를 설득할 것이 아니라, 핵포기와 국제사회지원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북측의 두려움과 의심을 완화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웠던 부분이다.

작년에 노무현 후보가 "모든 것 다 깽판 쳐도 남북관계 하나만 잘하면 된다"는 취지로 얘기했듯 지금의 내 심정이 그와 비슷하다.  "모든 것 다 깽판쳐도(그러면 안되겠지만!) 한미관계, 그럼으로써 북미관계 하나 잘하면 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온다.

어제 취임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대미 자주선언'을 들으며 속이 정말 후련했다.  어떤 대통령에게서 저런 소리를 듣겠는가. 무리를 해서라도 오길 잘했다.  

취임식 장에 '상록수'가 퍼져나갔다.  취임식에 아주 딱 맞는 노래다.  아무쪼록 노 대통령의 그 초심이 '상록수'처럼 변치 않기를 바란다. / 본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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