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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의 숙제들(1) - 정치개혁
인적청산으로 진정한 '국민이 대통령'이 되는 시대로
 
임흥재   기사입력  2003/02/25 [18:10]
이제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으로 노무현이 취임했다. 생전 처음으로, 내가 선거권을 법률에 의해 취득한 이후 최초로 내가 뽑은 대통령이 취임하는 것을 내 눈으로 보게 된다. 아마도 상당히 감격스러울 것이고 벅찬 흥분에 눈물을 흘릴 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찍은 후보가 대통령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럼에도 노무현이 내가 뽑은 첫대통령이라 함은 이전의 대통령 후보에 대한 나의 선택이 네거티브 방식에 의한 투표행위였음을 의미한다. 즉, 되어서는 안될 사람을 차례차례 배제하고 난 후, 마지막으로 남은 후보자에게 마지못해 한 표를 행사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번 16대 대선에서 만큼은 그런 고민아닌 고민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선거일 훨씬 이전부터 내가 찍을 후보를 망설임없이 정해 놓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수단으로 그의 당선을 위해 뜬 눈으로 밤을 지새고 상대 후보에 대한 약점을 부풀려 말하는 몰염치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키운 내후보에 대한 사랑이 나를 눈 멀게 하였고 그에 대한 믿음이 그와 똑같은 신념과 전망을 닮아가도록 하였다. 그런 나의 후보가 오늘 드디어 대통령이 되어 국민앞에 자신의 5년을 국민에게 맡기겠다고 선서를 하는 것이다.

2002년 12월 19일. 드라마틱한 선거결과를 확인하고서 나는 잠시 무중력의 대기권에 있는 듯한 상태로 있었다. 내 안의 모든 것이 빠져나간 의식의 진공상태에서 돌아왔을 때, 미치도록 기쁠 것 같던 나의 예상과는 달리 엄습한 두려움에 소름이 돋았다. 그만큼 노심초사한 시간이 많았음이고 앞으로 그가 담당하겠다고 큰소리친 개혁의 길이 결코 녹녹한 과정이 아닐 것이란 지레 짐작이 나를 공포에 가둔 것이다. 당선 확정을 내 눈과 귀로 확인하고서 맨먼저 한 일이 조중동 사이트를 뒤져 보는 일이었다. 그런 나를 보고는 혼자 실소하며 노무현 당선자의 험난한 장도에 대한 경계의 글을 쓰고 말았으니... 실제적 의미의 개혁과 변화라는 것이 어떤 반동의 흐름으로 정체되고 때로는 역작용하는 경우를 걱정하였다면 아마도 나는 지나친 비관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

우여곡절 끝에 노무현호는 출범한다. 신대륙 탐험의 꿈을 안고 출항하던 지리상 발견의 범선들도 당시에는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와 그와 맞먹는 두려움을 가진 채 돛을 올리고 출항하였으리라. 바람이 거세면 거셀 수록 나아가는 뱃길도 그만큼 빨라질 것이라 스스로 위안하면서 미지의 세계를 향해 항해하였을 것이다. 노무현호의 출항을 몇시간 앞둔, 아직은 캄캄한 이 어둠의 시간에 나는 그 탐험선을 떠나 보내는 가족의 심정으로 파도 거센 항구에서 기도한다. “제발 살아 돌아와 주기를... ” 비록 많은 날을 깍지 못해 덥수룩한 수염과 모진 고생의 흔적인 양 쾡한 눈빛으로 돌아올지라도 기다리는 항구의 가족들에게 저 먼 동방의 황금을 한아름 안겨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개혁된 정치, 그 전인미답의 땅에 닿기 위하여

노무현이 당선자로서 여러 일정을 챙기던 시간에 나는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았다. 필연 같은 우연으로 정치칼럼을 쓰면서, 대선을 목전에 둔 한 지지자로서의 내가 저지른 까닭없는 미움과 결과적으로 아무런 애정도 없는 민주당의 정권창출을 위하여 헌신한 내 꼴이 우선 우스웠기 때문이며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나의 이런 비이성적이고 논리적이지 못한 부끄러움을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부끄러움을 애써 변명하자면 언젠가 썼던 글에서처럼 노무현에 대한 나의 애정은 오로지 감성의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며 늘 이성보다는 그 감성의 지배를 받고야 마는 나의 덜 훈련된 의식과 행동의 결과이다.

다행히 내가 사랑한 그가 대통령이 됨으로써 나는 이제야 그에 대한 비이성적인 외사랑의 사슬에서 풀려날 기회를 잡았다. 정치하는 사람들의 각성의 결과이든 신망을 잃은 자신들의 당에 대한 자구책의 일환이든 대선 전부터 논해지기 시작한 ‘정치개혁’이란 화두는 지금 이 순간에 시급을 다투는 사회적 의제가 되었고 내용과 동떨어진 형식일망정 ‘당정분리’라는 그럴싸한 수사는 내게는 노무현을 벗어나 신랄하게 정치판을 질타할 수 있는 호재가 아닐 수 없다.

노무현 정권의 첫실험은 무엇보다도 그 정치개혁이란 사회적 의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노정권의 승패는 개혁된 정치마당을 만들어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상당한 명운을 걸 수밖에 없다. 이것이 아이러니한 노무현정권의 속성이다. 그런 다음에야 ‘국민참여’고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노무현 등뒤의 문구가 국민들에게 실체적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개혁이란 보통명사화한 시대적 요청이 벌써부터 심한 저항을 받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개혁독재’라는 반동의 수사가 여당의 대표(어제 사퇴하였다)에게서 강한 톤으로 뱉어지는 뻘밭같은 정치의 땅에서, 여전히 언론권력의 탑꼭대기에서 내려올 생각이 전혀 없는 족벌신문들의 폐해가 상존하는 작금에 개혁의 길은 험난한 가시밭길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치개혁은 어떻게 해야할까? 이미 대다수 국민들이 그 당위성과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음으로 우리의 관심은 정치개혁의 수단으로 집중된다. 피투성이의 해프닝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정치개혁은 ‘인적 청산’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여기에서의 인적 청산이란 한 정치인에 대한 야박한 성토나 비겁한 공작이 아니다. 인적 청산의 대상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정치인들은 모두가 정치는 현실이고 자신은 정치를 하는 그 시대에 필요한 정치적 결단과 기여를 했다고 강변한다. 이런 현실논리는 그 정당성의 유무를 고려할 것도 없이 이상하게도 시대의 악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는 많은 정권과 정치인들의 주장과 판박이이다.

민주당에서나 한나라당에서 논해지는 정치개혁에 관한 여러 논의들이 바로 인적청산의 대상이 되는 정상배들에 의해 심한 저항을 받고 있다는 것은 여당이고 야당이고 구시대의 습속과 사고로 박제된 정치인들을 거세하지 않고는 정치에 새로운 기풍과 변화의 바람을 진작시키지 못할 것이란 추정을 확신하도록 한다. 그들의 현실논리에 대하여 나의 현실논리는 이렇다.

‘정치가 현실이라면 노무현 또한 현실이 아닌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노정권의 출범에 많은 기대와 새로운 이상을 꿈꾸는 것은 국민들이 노무현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정치적 기대이며 욕구이고 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우리 사회의 합의일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반동적인 한 정치인의 존재가 사회적인 해악을 끼치는 것은 그 정치인의 행위의 결과 때문이기보다는 그 정치인의 그릇된 견해와 부조리한 웅변이 자칫 그 시대에 걸맞는 정신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판을 들여다보면 그동안의 붕당정치 계파정치 부정한 돈의 정치가 오랜 관행으로 세습되어 왔음으로 인하여 인적 청산의 대상이 되는 정치인일수록 남보기에는 그럴싸한 ‘무슨 포럼’이니 하는 등의 사병(私兵) 조직을 거느린 경우가 많다.

그들은 그 사병조직을 통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고 오직 공천과 떡고물에 목을 매어 ‘입법기관으로서의 위대한 개인’의 역할을 전혀 하지도, 할 생각도 없는 사병들은 시시때때로 유니폼을 갈아 입기 바쁘다. 그들에게서 발견하는 그 민첩함과 어떤 역할이든 훌륭히 수행하는 연기능력은 도저히 그들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나는 많은 엑스트라를 필요로 하는 사극의 촬영현장에 저들을 투입하면 많은 제작비를 들이지 않아도 완성도 높은 대하사극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무소신한 그들 한 명의 출연으로 그들의 당번병(군대 속어로 ‘딱갈이’)을 자처하는 많은 수의 얼치기 배우들은 자동 대기하는 것이 우리의 정치판이다.

노무현이 현실이듯이 이제 그 현실에 걸맞지 않는 기득권 유지와 협잡과 거래(?)로 정치의 세월을 대부분 소비한 인사들은 정치의 땅에서 떠나가야 한다. 그들이 떠나지 않으면 우리들이 그들을 솎아내어 내쫓아야 한다. 개인에 대한 미움에서가 아니라 그들은 새로운 세상의 문을 걸어 잠그고 심지어는 못질까지 해대며 우리의 전망을 가두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가 새로운 개혁과 전망의 문을 열어 젖히는 날, 그 새로운 세계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뛰쳐나가는 날이 오면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운명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후단협을 만들고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깽판을 치고 철새처럼 날아서 퀴퀴한 냄새나는 폐가에 둥지를 틀었으며 투표 몇시간을 앞두고 지지철회라는 유사이래 까무러칠 주정을 부리면 한편에서는 아무 때나 전쟁하자고 난리법석을 부리고 지금껏 왼편 오른편을 가르다가 왼손잡이에 빨간옷을 입었다고 시비가 아닌가.

지금 위에 열거한 기상천외한 정치쇼에 한 번이라도 출연한 배우는 우리의 손으로 출연금지를 시켜야 한다. 어두운 시절, 어른의 용안을 닮았다하여 드라마에 출연하지 못했던 배우가 있었고 노래와 글이 불순하다하여 판금조치 되었던 기억이 우리에게는 남아 있다. 우리가 그 전통을 잊지 않고 세상의 진보에 아무 짝에도 도움이 안되는 그들을 출연정지 시킨다하여, 그 강제의 주체가 국민이라면, 누가 우리를 욕할 것인가. 우리의 인정상 야박하고 못내 가슴 아픈 그 선택을 해야한다. 그 인정보다 우리 아이들과 우리 민족이 대대손손 번영을 구가하며 통일을 이루어 살아가야할 이 땅의 운명이 더욱 중차대하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수단은, 아무런 실체적 힘을 행사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길은 끊임없는 여론의 생산과 형성이다. 정치권에서 행해지고 있는 다양한 개혁의 흐름들이 그동안 늘 그래왔던 것처럼 국민의 여망과는 별개로 정치적인 논리와 현실을 빗댄 상황과의 타협으로 흐지부지 되어갈 때, 그것을 좌시하면서 수용해서는 안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격언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금과옥조요 국민들이 새겨야할 일상의 지침이다. 노무현 내각의 짜임새를 모르는 형편에서 미리 실망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그저 지켜보면서도 일단은 만족스럽지 못한 총리 인선에서 나는 다시 한번 선거일의 두려움을 느낀다.

시스템으로서의 정치개혁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직 이르다. 오늘에야 노무현 정권이 닻을 올리는 시점이고 또한 여러 변화의 기류와 한 편에서는 모처럼의 호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개혁의 역동적인 힘이 서서히 가해지고 있기 때문이며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개혁에 관한 구체적 해법들을 아직은 확연하게 감지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또는 노무현 정권의 담당자들은 국민들은 경제적 안정과 함께 갈아엎어진 새로운 정치판을 보는 것을 소망하고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국민들 스스로 정치개혁의 바람을 일으킬 수는 없다. 누군가가 그 선동의 징후를, 동참하고 함께 부딪치고 싶은 개혁의 징조를 일으키고 퍼뜨려야 한다.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고 난 후에는 국민 열망의 발현태로서 정치개혁의 중심에 그리고 선두에 노무현 정권의 창출자들이 있어야 함은 자명하다. 허울로서의 당정분리라는 제약을 넘어 실제적인 개혁의 선두에서 노무현 정권은 발동하여야 하고 그를 정권의 담당자로 만들기 위해 나선 사람들은 어쩌면 대선보다 더욱 힘겨운 구태와 반동과 저항의 발악에 맞서 혼신을 다한 전투를 치러야 한다.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반개혁의 무리들은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개혁세력보다 더욱 능수능란하며 교묘한 술책과 모계를 몸으로 터득하고 있고 숱한 공습과 포위전술에도 끄떡없을 견고한 아성과 풍부한 전략물자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국민이 대통령입니다’가 될 때, 즉 국민 모두가 대통령으로서의 책임과 개혁의 과제들을 완수해내겠다고 결의하고 그 책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할 때, 끈질긴 수구족벌의 저항을 이겨내고 새로운 개혁의 땅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노무현 정권은 전시성의 구호가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을 대통령으로 모시고 모든 것을 국민 앞에 투명하게 공개하며 헌신할 때라야 ‘국민참여 정권’이라는 자신들의 규정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김대중 전대통령이 동교동으로 돌아감으로써 비로서 우리의 정치는 21세기의 정치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세기의 첫출발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고 그 밑그림이 자신의 정권에서 그려져야 함을 노대통령은 항시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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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2/25 [18:1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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