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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사고/수습, 공적영역의 권위가 없는 한국사회
미국의 9.11테러시 완벽한 현장보존이 가능했던 요인은?
 
늦깍이   기사입력  2003/02/25 [23:25]
대구 지하철사고의 발생 경위가 밝혀지면서 인력, 시설안전기준, 비상시 대책 등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제반시설에 대한 개선요구가 드높고, 지하철 관리책임을 지고 있는 지하철 공사와 대구시에 책임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형성하는 보다 근본적인 난제는 상대적으로 짚어지지 못하고 있다. 지하철 안전, 사고발생시 대처, 이후 수습과정에서 일관되어 나타나는 문제인 공적영역의 권위부재 내지는 불인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관련당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흔히 대형사고가 발생하면 시민들과 언론은 담당기관을 격렬히 비난한다. 그 기관들이 공적기관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데 대해 그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시민들과 언론역시 공적인 영역에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는 점은 간과한다.

이점은 사고 발생후 수습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사고는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하더라도, 수습과정은 그 사회전체의 역량을 반영한다. 가슴아프게도 우리의 수습과정은 시민들과 언론 역시 관련당국과 별로 다를게 없음을 확인시켜준다.

일단 대형사고가 발생하면, 경찰 등 관계당국은 접근금지 라인을 명확히 설정하고, 수습관계자들 이외의 통제가 엄격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KBS는 아예 사고 현장에서 보도를 했고, 사고 다음날 유족들에게 현장 접근을 허용했다.

현장에 가보고 싶은 사람은 다 가본 듯하다. 물청소를 한 공사측의 어이없는 태도는 아예 논외로 치자.  그 중요한 사고 현장을 통제하는 그 어떤 기관도 보이지 않았으며, 설령 있었다 할지라도, 집요했을 사적인 접근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러한 어수룩한 면은 모든 대형사고의 수습과정에서 되풀이된다. 삼풍백화점사고가 났을때, MBC는 현장에 보도본부를 차리고 구조를 진두지휘했다.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어떤 권위있는 공적기관도 현장에 대한 통제를 못했다.

부끄럽지만, 이러한 우리의 상황을 9.11테러가 난 미국과 비교해보자. 사고 현장은 현장의 안전여부가 확인되고 증거물품들이 수집될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완전히 통제되었다. 설사 유족들이라 할지라도 감히 그 통제를 뚫고 현장에 접근할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상황을 통제할 권위있는 통제기관도 없는 듯하며, 설령있다 할지라도, 그 누구도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비상사태시 국가기관도 시민도 언론도 공공성에 입각한 대처를 하지 못한 채, 사적인 욕구들에 기인한 사적행동들이 현장을 누빈다.

왜, 우리에게는 공적영역의 권위가 없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권위가 없는 공적영역은 어불성설이므로 더 정확하게는 왜 '공적 영역'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지옥과도 같은 현장에서 쓰러져간 희생자들의 영정사진들이
소리없이 유가족들을 바라보고 있다.
시민의 신문(ngotimes.net)  양계탁 기자


안타깝게도, 우리는 중앙집권적 권위주의 체제가 강요한 규범만이 공적영역을 이루는 전근대적 사회에서, 개인의 이해들을 조정하고 수렴한 끝에 만들어진 합의와 그에 입각해 구성되고 권위가 인정받는 공적영역이 튼튼하게 구축된 근대적 사회로 완전히 진입하지 못했다.

시민들과 언론은 기존의 공적영역이 시민들의 이해를 보장해준다고 결코 믿지 않고 그럴 수밖에 없다. 도대체 사고현장을 물청소해버리는 지하철 공사를 어떻게 믿고 처리를 맏길 수 있겠는가? 반면 공적영역도 결코 시민들을 믿지 않는다. 오죽하면, 카파라치들이 놔왔겠는가? 그리고 카파라치들이 없어지자, 다시 교통질서가 어지럽혀지지 않는가? 상호 신뢰에 기반하지 못함으로 인해, 공적영역은 정작 위기상황에서 무기력하기 그지 없고, 시민들은 각자의 이해를 쫒을 뿐이다.

조선왕조가 몰락하고 이제 겨우 100년이 흘렀다. 100년동안 한국은 근대화의 경제적 기반을 만들었고, 우리에게는 전혀 생소할 수 밖에 없었던 서구의 민주주의를 정치영역에서 정착시켰다. 그러나 그 근간이 되야할 시민사회 (사적이해와 공적이해의 합의체)는 아직도 미진하기 짝이 없다.

필자는 결코 한국의 시민사회의 미래에 비관적이지 않다. 시민사회란 사회 곳곳의 미시영역에서 형성발전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릴 뿐이다. 오히려 짧은 시간동안에 이룩한 지금만큼의 시민사회도 경이적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다 완벽하게 발전시켜, 우리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짚어보아야 한다.

우리 한국사회 전체가 져야할 책임을 간과한채, 그저 관련당국에만 비난을 쏟는다면, 궁극적인 문제 해결은 여전히 멀다. 제발 이제는 우리가, 그리고 내가 문제임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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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2/25 [23:2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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